올해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결정될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도널드 트럼프는 '공화당이 키운 괴물'로 불린다. 현재 공화당 지도부가 트럼프를 낙마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인종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인종주의에 편승해 이민자를 배척해온 공화당 지도부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분노한 계층은 '백인 블루칼라'다. 이들은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를 쫓아내자고 유세하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가장 강한 결집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에서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후보가 보여주듯, 미국에서 분노에 찬 계층들은 백인 블루칼라만이 아니다.
더 큰 맥락에서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가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결국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과 1%의 부자를 위한 정책이며, 양당체제인 미국에서 공화당이 집권하든 민주당이 집권하든 이런 정책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박탈감을 느낀 대중의 분노가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이들을 가장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점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20일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드워드 루스는 "미국에서 새로운 계급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에서 계급 전쟁에 나선 이들은 "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적시했다.
그런데 이건 느낌이 아니다. 통계로 확인된다. 최근 워싱턴대학교의 사회학 교수 마크 랭크와 코넬대학교 개발사회학 교수 토머스 허슐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경제적 현안은 두 가지다.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경제적 불안감과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소득 불평등이다.
"정신이 번쩍 들어 행동에 나서게 할 통계"…한국은?
두 가지 문제는 단순히 학자나 정책자들에게 한정된 현안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반 시민들에게 최대 현안이 된 문제들이다. 두 현안을 일반인들의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경제적 위험을 겪게 될까", 그리고 "내가 겪을 위험과 다른 사람들이 겪을 위험이 얼마나 차이가 날까"이다.
두 학자는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위험 계산기(risk calculator)'를 개발했다. "당신이 향후 5년, 10년, 15년 뒤 빈곤층이 될 확률"을 알려주는 계산기다. 혈압 등 몇 가지 신체 지표를 가지고 의사가 향후 10년 뒤 심장질환을 겪을 확률을 계산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의사들의 진단은 여러 가정의 장기 데이터를 축적해 만든 '프래밍험 심장연구'의 통계패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두 학자가 만든 계산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68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인종, 혼인 여부, 나이에 따른 소득 분포 데이터를 사용해서 "당신의 소득이 향후 5년, 10년, 15년 사이에 정부의 공식 빈곤선 이하로 떨어질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다. 2015년 기준 미국의 4인 가구의 빈곤선은 연간 2만4000달러(약 2800만 원)다.
연구의 결론은 현재 많은 미국인들이 빈곤층이 될 위험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빈곤층이 될 확률이 가장 적은 조건을 갖춘 집단은 30대 후반, 백인, 미혼, 고졸 이상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15년 뒤에 빈곤층이 될 확률이 무려 32퍼센트로 나왔다. 상대적으로 빈곤층이 될 확률이 가장 적다는 집단에 속한다고 해도, 3분의 1 정도는 최소 1년이라도 멀지 않은 장래에 빈곤선 이하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인으로 생존할 기간을 더 넓게 잡으면 미국인 대다수가 빈곤을 경험할 것으로 나타났다. 20~75세의 연령대에서 60퍼센트 정도가 최소 1년은 정부의 공식 빈곤선 밑으로 떨어질 것이며, 4분의 3은 빈곤선의 150퍼센트 이하인 '상대적 빈곤층'으로서 최소 1년은 살아갈 것으로 추정됐다. 두 교수는 "미국의 불평등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처한 문제인지 이번 연구가 알려준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사실은 "인종, 교육, 혼인 여부, 연령"이 빈곤을 겪을 확률에 큰 차이를 가져오는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45~49세 나이의 백인이며 결혼을 했고,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미국인이 5년 뒤에 빈곤을 겪을 확률은 5퍼센트에 불과했다. 반면 25~29세의 나이에 백인이 아니며, 비혼, 그리고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미국인이 5년 뒤에 빈곤을 겪을 확률은 무려 72퍼센트에 달했다.
미국에서 이처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수십년 사이에 확대됐다. 이번 연구에서 미국의 집단별 소득 격차가 미래에 더 크게 벌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에서 비백인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비싸진 학비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결혼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결혼도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빈곤을 겪을 인구의 비율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 집단에게 노동시장에서의 진입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건강보험, 주택, 교육개혁 등 미국의 사회정책은 미국 사회에 고착화된 체계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두 교수는 "미국은 인구의 일부만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고,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빈곤을 삶의 정상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사회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두 교수는 "우리가 개발한 빈곤 계산기로 미국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경제적 취약도를 직접 측정해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이런 정보로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들어, 행동에 나서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크 랭크와 토머스 허슐 두 교수의 경고와 기대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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