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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북한이 맞지도 않을 채찍 들고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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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북한이 맞지도 않을 채찍 들고 뭐하나?

[정세현의 정세토크] 제재 일변도 박근혜 정부 '낙동강 오리알' 될라

북한의 '수소탄'시험과 장거리 로켓 '광명성 4호' 발사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역대 가장 강력'하다는 대북제재 결의안 2270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런데 안보리 결의 통과 이후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하고 있다.

존 커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7일(현지 시각) 정례브리핑에서 다자·양자 제재와 한미 연합 군사 훈련 등의 대북 압박은 북한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반도 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의 젊은 독재자가 책임 있는 길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다면 (사드)협의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대북 압박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낙동강 오리알'신세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은 현재 상황에서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이를 누그러뜨리고 싶어 한다. 이는 북한에 주는 사인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을 이끌어내고, 북한이 여기에 동조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비확산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또 북한은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혔듯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에서 평화협정을 추진할 수 있고, 미국은 북한이 비확산만 보장해준다면 얼마든지 평화협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미국이 입으로는 비핵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비확산에서 끝날 수 있다는 것도 전제로 하고 한국 정부가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독자적인 대북 제재를 발표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이라는 당근을 보여주면서 제재와 군사적 압박의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 줄 당근은 없이 채찍만 휘두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나마 그 채찍도 길이가 짧아서 북한이 맞지도 않는다. 때린다고 때리는데 북쪽을 향해서 휘갈기지만 하지, 닿지 않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정 전 장관은 "지금은 남북 모두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국제 정세와 각자가 처한 상황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며 "정치만 생물이 아니다. 남북관계도 생물이다. 이 부분 역시 '정치'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8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우선 정부가 발표한 대북 독자 제재 내용부터 짚어 보겠습니다. 이번 독자 제재로 남한, 북한, 러시아가 함께 추진했던 복합 물류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가 중단됐는데요. 향후 러시아와 외교적인 마찰이 있지는 않을까요?

정세현 :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유연탄을 파는 데 있어서 좀 불편한 측면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외교라는 것은 국제정세가 변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서로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진행한 것이니까, 이익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재개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압박 일변도로 가는 박근혜 정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압박과 제재라는 원격 조정 방식으로 체제나 정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번 제재를 발표하면서 정부는 대북제재가 "북한의 잘못된 셈법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단호한 의지의 발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긴밀한 협력 하에 대북 제재와 압박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압박과 제재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는 없었습니다. 미국이 쿠바를 지난 1962년부터 그렇게 봉쇄했는데 쿠바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국제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쿠바와 손을 잡았습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를 위해 미국 바로 뒤에 위치한 골칫거리인 쿠바와 불편한 관계를 청산한 겁니다.

봉쇄나 차단으로만은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결국 변화를 위해서는 접촉해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관여(Engagement) 정책'의 핵심은 접촉입니다. 교류와 왕래가 있어야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국제사회에는 중앙 정부가 없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중앙정부가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고 범죄를 근절시킬 수 있고 범인을 잡아다 놓고 종신형을 때려서 본인이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종교적인 '접촉'이라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죄수를 독방에 가둬놓는다고 알아서 회개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재 내용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북한에 화가 난 박근혜 정부가 금융제재, 해운제재, 수출입 통제, 북한 식당 출입 자제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수출입은 이미 통제되고 있고 해운 제재만 해도 이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나마 새로 들어간 것이 식당 정도인데, 이것도 '자제'를 해달라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북한에 별로 아픈 제재는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정부의 독자제재 중에 북한에 기항 후 180일 이내에 국내에 입항하려는 외국 선박은 입항이 금지된다는 조항이 있던데, 사실 6개월은 정세가 충분히 바뀌고도 남을 만한 시간입니다. 6개월 동안 지금과 같은 제재 일변도 국면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북한 주변에는 한-미-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제재에 어쩔 수 없이 동참은 하지만, 자기들도 동북아 지역에서 자국의 국제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가 한미일의 희망대로만 움직여 줄까요? 만약 그렇다고 생각해서 독자제재까지 추진했다면 그건 너무 낭만적인 사고입니다.

▲ 이석준 국무조정실장(가운데)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독자 대북 제재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인 2270호는 어떤가요?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제재가 나온 초기에는 한반도 주변 국가들을 중심으로 엄격하게 제재를 이행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중국은 처음부터 이 제재가 민생에 영향을 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제재 국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은 얼마든지 변경무역 방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5월 당 대회를 앞두고 있는 북한은 이번 제재가 아프고 불편할 것입니다. 당 대회를 앞두고 북한 주민들에게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먹는 문제, 입는 문제에서 이렇다 할 선물을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이 주민들에게 선물을 주는 과정에서 중국이 북한의 숨통을 어느 정도 열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북한이 당 대회마저 서글프게 치르도록 내버려 두면 북한이 중국에 섭섭해 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장악력이 떨어집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완충 국가'가 중국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면 또 다른 사고를 칠 수도 있습니다. 이를 미리 막고자 중국은 북한에 선물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중국에 유엔 안보리 제재를 제대로 이행하라고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은 이 결의안이 나오기 전부터 '민생'문제에 영향을 줘서는 안된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식(食)·의(衣) 문제는 민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양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재가 강력하게 진행되는 동안 정말 힘들면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비핵화 논의를 시작하자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평화협정을 비핵화 다음 단계로 진지하게 논의해준다면, 또는 비핵화 이야기하면서 평화협정 이야기도 한다고 하면 그렇게 대화해보자고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전에 미국과 양자회담을 먼저 하자고 제안하면서 회담 순서와 절차적인 논의를 진행하자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죠.

실제 1994년 6월 미국의 영변 핵 단지 폭격 계획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북한 김일성 주석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 국면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북한이 예상 밖의 카드를 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우리보다 훨씬 자유롭게 국면 전환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외교 정책 결정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독재성이 강한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합목적성만 보장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합리성을 중심으로 정책이 결정되고 국민들의 여론도 이런 방향에서 형성됩니다. 남한 정권이 마음대로 정책을 바꾸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실제 북한이 국면을 뒤집었던 사례가 있었고, 이론적으로도 독재 국가가 국면을 뒤집는 데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많지 않기 때문에 북한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느 때든 유턴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압박이 아프다고 느껴지면 바로 태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겁니다.

▲ 2일 (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이사국들이 만장일치로 대북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AP=연합뉴스

안보리 대북제재 이후미국이 이상하다?

프레시안 : 북한이 돌연 입장을 바꿀 수도 있지만 남한은 북한 체제를 바꾸려고 하고 있고 미국은 오바마 정부 임기가 이제 채 1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미국 내 일부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쿠바, 이란과 화해한 것을 두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설사 북한이 입장을 바꾼다고 해도 이걸 남한과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정세현 : 물론 그런 한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이 비핵화와 평화협정 대화를 위해 굽히고 나오면 미국도 이를 무시하기는 힘듭니다. 국제정치의 명분 때문에 도망가기가 어렵습니다.

국제정치에서 실익이 중요하고 성과가 보이는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거부할 수 없는 조건으로 북한이 협상 제의를 한다면 국면을 바꿔버릴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대북 제재 결의안 타결 직전 미국 태평양 사령관은 한미 양국이 사드 배치 협의에 합의한 것이지 사드 배치에 합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국 하원청문회에서 한반도에서의 병력이나 무기 규모로 볼 때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2차 대전보다 더 복잡하고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가 나오고 난 뒤에 국무부에서는 비핵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 추진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습니다. 또 북한에 대한 제재와 한미 연합 군사 훈련 등의 압박은 북한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부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현재 상황에서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이를 누그러뜨리고 싶어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북한에 주는 사인이기도 합니다. 북한이 반발하면 미국이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한미 양국은 대북제재 결의안이 나온 이후 바로 한반도 내 사드 배치를 위한 공동실무단 구성에 합의했습니다. 정말 미국이 현재 국면을 대화로 이끌고 갈 것인지에 의문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세현 : 사드 배치 논의를 재개한 이유가 미국의 전략적 계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 정부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인지 확실한 의도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황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사드 협의가 다시 시작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지난 2월 7일 '광명성 4호'를 발사한 당일, 당장에라도 사드를 배치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초안에 미국과 중국이 합의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한미 양국은 예정돼있던 공동실무단 구성 협약을 당일 30분 전에 취소했습니다. 미중 양국의 협상 결과로 제재 결의안이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아니었다는 모습을 보이려면 사드 협의를 조속히 이어가야 합니다. 설사 나중에 사드 배치가 흐지부지될지언정, 일단 협의가 다시 본격화되는 모양새는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드는 부지 문제부터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면서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드 문제가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는 체면을 유지시켜주는 차원에서 진행될 것이고, 미국은 동맹 관계이자 자국 무기의 주요 소비자인 한국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협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류제승(오른쪽) 국방부 정책실장과 토머스 밴달 미8군 사령관이 4일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방부에서 사드 배치 협의를 위한 한미 공동실무단 구성 협약 약정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국방부

중국의 배신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미리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이 도와줬기 때문에 '역대 최강'의 대북 제재가 나왔는데, 사드 문제 협의로 중국을 반발하게 해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입니까? 미국이 중국과 아무런 이야기 없이 사드 배치 논의를 진전시킨다면, 중국은 대북 제재의 강도를 확 떨어뜨릴 것입니다.

사드 배치가 미국의 본심이고 진짜 목표라는 것이 드러나면 미국은 안보리 대북 제재의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미국은 북한을 제재해서 핵 비확산을 이루겠다는 당초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프레시안 : 미국이 비핵화보다는 비확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정세현 :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비핵화와는 다릅니다. 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야기합니다. 즉 미국이 한반도에 전개하는 핵 전략자산도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에 비확산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북한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고, 비확산이 보장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에서 평화협정 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 1992년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던 때, 당시 김일성 주석은 미국에 김용순 당 비서를 특사로 보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교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이같은 입장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그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 장관과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김 위원장은 냉전이 끝난 이후 주한미군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은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안정자 역할'(stabilizing role)을 하고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비확산이 더 매력적인 카드입니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정말 달성된다면, 미국의 무기 시장이 줄어듭니다. 미국이 그런 자살골을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국 무기를 사주는 국가가 한국인데, 이런 '황금시장'을 포기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결국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에서 평화협정을 추진할 수 있고, 미국은 북한이 비확산만 보장해준다면 얼마든지 평화협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이 입으로는 비핵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비확산에서 끝날 수 있다는 것도 전제로 하고 한국 정부가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채찍만 들고 있는 한국,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몰라

프레시안 : 결국 미국은 제재·압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화를 탐색하는 다면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북한을 고립시키겠다는 압박 일변도의 대북 정책을 계속 가져가도 될지 의문입니다.

정세현 : 외교는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이 병행돼야 합니다.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이라는 당근을 보여주면서 제재와 군사적 압박의 채찍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 줄 당근은 없이 채찍만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 채찍도 길이가 짧아서 북한이 맞지도 않습니다. 때린다고 때리는데 북쪽을 향해서 휘갈기지만 하지, 닿지 않는 겁니다.

물론 한미 양국이 '역대급'의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은 분명 북한에 위협이 됩니다. 그런데 미국의 전략 자산이라고 부르는 B-52, F-22, 항공모함, 핵잠수함 등이 한반도에 얼마나 머무느냐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보여주기 식으로 한번 쓱 왔다가 갈 가능성이 높은데, 박근혜 정부가 대북 독자 제재를 발표한 이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한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미국이 북한 압박만을 강하게 펼치고 있는 남한 모르게 북한과 만나면서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미국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존 케리(왼쪽)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1월 27일(현지 시각) 베이징에서 만나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안을 논의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미국도 우리처럼 북한을 압박 일변도로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압박과 전쟁도 동원하지만, 때로는 회유정책을 쓰기도 합니다. 현재 미국은 북한 때문에 동아시아의 헤게모니가 중국으로 일부라도 넘어가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계산으로 면밀하게 따져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단순히 '밀어붙이자'는 식은 아니라는 겁니다.

미국이 강하게 압박만 하면 북한은 살아남기 위해 중국 편에 기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중국의 영항력이 커지고, 여기에 러시아까지 손을 잡고 나오면 미국 입장에서는 압박 일변도로 가자는 박근혜 정부 편을 들었다가 아시아 재균형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리 임기 말이라지만, 동북아 외교를 망치고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으면 안될 것 아닙니까?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해줬다는 평가를 받고 싶을 겁니다.

프레시안 : 결국 제재 일변도로 일관했던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불가역적'으로 파탄시킨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이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내일이라도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도 경제가 이렇게 나쁜데 국회가 법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던 양반이, 야당 대표가 경제 상황이 안 좋다고 하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고 되묻지 않았습니까?

남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피차 영토를 옮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남쪽 정부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유연한 정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도 이를 마냥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지금은 남북 모두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국제 정세와 각자가 처한 상황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치만 생물이 아닙니다. 남북관계도 생물입니다. 이 부분 역시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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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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