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빌 봉제 협동조합 '익팅'의 재간둥이 보니폴이 쑥스러운 듯 펼쳐 든 종이에는 분홍색 슬리퍼 그림이 있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어렸을 때 사촌 언니한테서 슬리퍼를 선물 받았을 때예요."
보니폴에게 소중한 선물을 준 사촌 언니는 병원과 공장을 그렸습니다.
"타워빌에 오기 전 마닐라에서 살 때, 공장 일이 너무 힘들어 유산 했어요. 너무 슬프고 끔찍한 일이었죠. 공장과 병원을 오가던 그 때가 저에겐 가장 힘든 때였어요."
나나이들은 기뻤던 기억, 슬펐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흰 도화지에 담았습니다.
타워빌의 과거와 현재, 미래
필리핀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두 시. 40여 명의 익팅 멤버들이 잠시 재봉틀 돌리던 손을 멈추고 한 데 모였습니다. 봉제센터 바깥쪽 벽면을 장식할 벽화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주제는 '타워빌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프레시안> 손문상 화백이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나나이들이 그린 그림을 참고해 손 화백이 벽화 밑그림을 그리고, 한국에서 온 자원 활동가들이 채색하기로 했습니다.
나나이들은 각각 스케치북을 나눠 들고, 타워빌에 오기 전 자신의 삶을 그렸습니다. 기뻤던 순간의 기억을 그린 보니폴과는 달리, 대다수 나나이들이 힘들고, 아팠던 과거 모습을 그렸습니다. 홍수로 마을이 물에 잠긴 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됐던 일, 재개발 때문에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동네를 뒤엎은 일, 화재로 집을 잃은 일….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림만으로도 나나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강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현재' 모습을 그릴 시간입니다. 나나이들은 세 팀으로 나뉘어 앉아 머리를 맞댔습니다. 조금 어두웠던 좀 전 분위기와는 달리,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30분 뒤, 각 팀 대표가 나와 발표했습니다.
"봉제 훈련 받을 때 식료품을 들고 집에 가던 모습을 그렸어요. '익팅'은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놨다는 데에 다들 공감할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다들 생존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이제는 워크숍도 하고, 패션쇼도 하고, 다 같이 결혼 준비도 하잖아요,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큰 변화죠."
"수입이 생기니까 남편 없이 쇼핑도 하고, 봉제 공부도 하고, 예전엔 타갈로어만 했는데 이젠 영어도 하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니 행복해요."
"익팅 그 자체가 우리예요. 가끔은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신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아요."
이번엔 40명 전원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그릴 차례입니다. 나나이들은 각자 손을 들고, 어떻게 그릴지 의견을 말했습니다. 과연 40명의 생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집약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나이들이 색연필,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테이블을 모아 그 위에 종이를 넓게 깐 뒤, 쓱쓱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여기저기서 '와우'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드디어 완성입니다.
'익팅' 깃발이 휘날리는 배와, 그 배 앞에서 불을 밝혀주는 큰 여객선 그림이 보입니다. 지구를 빙 둘러싸고 서로 손을 맞잡은 그림, 싱그러운 나무들도 보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캠프'라는 큰 배를 타다가 나나이들이 자립과 발전을 위해 '익팅'이라는 작은 조각배에 옮겨 탑니다. 이제 익팅은 캠프의 보호망을 벗어나 사회적 기업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지만, 캠프는 익팅이 길을 잃지 않도록, 뒤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합니다. 그 빛을 따라 익팅은 당당하게 지역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립에 대한 의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그림이었습니다.
손 화백은 "나나이들이 너무나 멋진 그림을 그려주셔서 제가 할 게 없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타워빌 랜드마크의 탄생
필리핀식 택시 '트라이시클'이 매연을 내뿜는 길가 가장자리에, 형형색색의 페인트들이 도착했습니다. 손 화백과 7~8명의 자원활동가들이 야무지게 목장갑을 끼고 흰 벽 앞에 섰습니다. 페인트에 물과 도료를 적당히 넣고 붓으로 휘휘 저어 섞으면 물감 만들기 완성. 손 화백이 먼저 쓱쓱 붓질 시범을 보이자 자원활동가들이 하나둘 따라 밑그림 위에 색을 입힙니다.
벽 하단에는 화염에 휩싸인 집들, 풍랑에 휩쓸려가는 집들을 그려 넣습니다. 그 위로는 푸르른 언덕과 나나이들이 탄 배를 그립니다.
자원활동가들은 팔을 늘여 빼고 그리다가, 다시 쪼그려 앉아 그리기도 합니다. 붓 잡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흰 벽이 점차 알록달록해지자,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나도, 나도' 하며 그리겠다고 손을 번쩍 듭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동네 어른들도 다가와 구경합니다.
익팅 깃발을 번쩍거리는 금색 물감으로 덧칠하고 나나이들의 얼굴에 눈코입을 그려 넣을 즈음이 되자. 어느덧 해가 기웁니다. 10시간 만에, 드디어 모든 채색 작업이 끝났습니다.
때마침 봉제 일을 마치고 나온 나나이들이 벽화를 보고 환호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라며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는 나나이도 있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나나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정말 멋진 벽화예요. 저희뿐 아니라 모든 타워빌 주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그림이에요."
벽화 속 나나이들 표정처럼, 단체 사진을 찍는 나나이들의 표정은 무척 해맑았습니다.
나나이들의 아이디어와 손 화백과 자원봉사자들의 노고가 합쳐져 탄생한 공동 벽화는 지금은 타워빌 최고의 랜드마크가 되었다는 후문입니다.
나나이들은 5년 뒤, 10년 뒤엔 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매일 노력하는 나나이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지금 행복하다"는 나나이들,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나이, 살라맛 뽀(감사합니다)"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바로 가기 : "나나이(Nanay), 슬럼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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