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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삼문·김좌진·한용운 기른 절의(節義)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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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영·성삼문·김좌진·한용운 기른 절의(節義)의 땅

3월 고을학교는 <홍성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3월 제29강은 산과 들, 바다가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진 땅, 절의(節義)와 충의(忠義)를 지킨 최영(崔瑩), 성삼문(成三問), 김좌진(金佐鎭), 한용운(韓龍雲)을 배출한 홍성(洪城)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산과 들, 바다가 조화를 이루며 절의(節義)의 지사들을 기른 땅, 홍성고을 Ⓒ홍성군

고을학교 제29강은 2016년 3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광천IC-결성읍치구역(결성읍성/결성동헌/결성향교)-신금성-한용운생가지-김좌진생가지-점심식사 겸 뒤풀이-홍주읍치구역(홍주성역사관/홍주성/조양문/광경사당간지주/홍주의사총/홍주향교)-용봉사-성삼문유허지-노은단-최영사당-서울의 순입니다.

▲<홍성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9강 답사지인 <홍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내포(內浦) 지방 열 고을의 중심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겹침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북쪽으로 향하다가 안성 칠현산(七賢山)에 이르러 한 줄기는 한남정맥이 되어 북서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줄기는 금북정맥이 되어 천안의 광덕산(廣德山)에서 크게 기세를 떨칩니다. 이어 부드럽고 온화한 산줄기를 유장하게 이어오다가 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은 오서산(烏棲山)에서 크게 솟구치고 예당평야를 넓게 부려놓고는 서산 가야산에서 태안 앞바다로 숨어듭니다.

홍성은 금북정맥의 오서산과 가야산 주변에 부려놓은 내포(內浦) 열 고을의 중심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철마산 너머로 예산과, 장곡산 너머로 청양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오서산 너머로 보령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예산과 함께 용봉산(龍鳳山)을 품고 있고 봉화산(烽火山) 너머로는 서산과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천수만 너머로 서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물줄기는 금마천(金馬川)이 화양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고 와룡천(臥龍川)은 서쪽으로 흘러 천수만(淺水灣)에 이르며 금리천(錦里川)은 보령과 경계를 지우며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숨어드는데, 예당평야의 한 자락을 차지하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두어두는 시설이 절실하였기에 홍양, 봉서, 홍동, 광천, 장신, 벽정, 공리 이호, 가곡, 대사 등의 많은 저수지가 전해져 옵니다.

이처럼 홍성은 넓은 평야에 농경문화가 정착되면서 농사와 농요(農謠)가 크게 발달하게 되는데 결성 지역 금곡천(金谷川) 유역에 신금성(神衿城)을 중심으로 발생한 결성농요(結城農謠)는 순수한 우리가락인 ‘들소리’로서 조선 영조 때 최고 명창(名唱) 최선달과 조선 말 김창용 등의 후예들에 의해 대를 이어 전승되어 왔습니다.

결성농요의 모내기소리인 “이럴럴럴상사리”와 논매기소리인 “얼카덩어리” 그리고 ‘두레소리’ 등은 이 지방에서 자생한 농요로서 역사성이 짙고 향토성이 특이하여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농요의 내용은 용신제, 모내기, 건젱이, 뚝매기, 아시매기(논매기), 쉴참, 만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산줄기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은 가야산 앞뒤에 위치한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을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는 내포 지역을 홍주목(洪州牧 홍성)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했던 것을 보면 내포 지역은 충청지역 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홍주관아의 동헌인 안회당 Ⓒ홍성군

오서산(烏棲山 791m)은 내포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홍성, 보령, 청양에 걸쳐 산줄기를 이루고 있으며 정상에는 은빛 물결의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서해안 일대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지며 산중턱에는 대운대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습니다.

백월산(白月山 394m)은 홍성의 서쪽에 위치하며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지만 산 정상에 오르면 홍성읍과 서해의 천수만이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특히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들도 볼 수 있으며 동쪽 사면에는 전통사찰인 산혜암이 있습니다.

용봉산(龍鳳山 381m)은 산세가 용과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어 그렇게 부르고, 8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팔봉산이라고도 합니다. 높거나 험하지는 않지만 수려한 자연경관과 산 전체가 바위산이라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전설을 간직한 기암괴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사마애불, 상하리미륵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철마산(鐵馬山 180m)은 고려의 최영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사통팔달의 자연경관을 갖춘 명산으로, 3.1만세운동 당시 184명의 의사들이 이 산에 올라와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며 자주독립을 외쳐 일명 봉화산(烽火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백제부흥군의 거점


신금성(神衿城)은 낮은 구릉에 쌓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갖추어진 토성으로 평탄한 구릉에 쌓여져 평지성에 가까운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어 방어용보다는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쌓은 읍성의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입니다. 발굴 결과 수혈시설 2개소와 저장고 4~5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성안에서 삼족토기(三足土器) 등 백제시대의 토기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병(甁)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축성하였으나 후대에 기능상의 목적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곡산성(長谷山城)은 석축산성으로 주변의 지형은 형세가 험하고 계곡이 좁아 군사적 요충지로 훌륭한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산성 내에선 대규모 건물지와 사시(斯尸), 사시량(斯尸良), 사라(斯羅) 등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석곽묘에선 청동제 방울이 출토되었고, 백제시대 토기 등이 다수 발견되어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사시량현의 정치, 행정적 중심 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지형적 조건으로 보아 백제부흥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홍주(洪州)는 고려 때 운주라 하며 995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1012년에는 지주사(知州事), 이후 홍주로 개칭되었으며 1358년 목(牧)으로 승격된 후 1368년 다시 지주사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습니다.

결성(結城)은 본래 백제의 결기현으로, 신라 때 결성으로 고쳐 서림군의 영현이 되었고, 1018년 운주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에는 진성을 두고 유민을 정착시켰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 결성군 및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되었고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1942년 광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홍성에는 옛 홍주군인 홍성읍과 옛 결성군인 결성면에 읍치구역이 남아 있습니다.
홍주성은 백제부흥군의 중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종 1년(1451)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읍치구역의 읍성을 새로운 법식에 따라 고쳐 지을 때에 새로 수축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축성 당시에는 성의 둘레 4,856척, 높이 11척, 여장이 608개, 적대(敵臺) 24곳, 문이 4곳, 우물이 2, 작은 개울 1, 해자는 시설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있었던 성보다 물려 쌓았고, 그 후 순조 24년(18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새로 지었습니다.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고 북문에서는 사형수를 처형하였는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 농민군 수백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홍주성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서 많은 참화를 입었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고려 때부터 16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자 그 이듬해에 의병을 일으킨 민세영, 이종식 등이 화포 6문과 병사 1,100명을 이끌고 와서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밀어내기도 하였답니다.

성내에 있던 관아 건물은 36동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성의 동문인 조양문, 관아 정문인 홍주아문,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과 여하정(餘何亭) 등 4동의 건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홍주향교(洪州鄕校)는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은 전하지 않고 다만 홍주에 중앙에서 외관이 파견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홍주목으로 승격되어 향교도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8년(1408)과 18년(1420)에 건축,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향교의 위치가 홍주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등 몇 차례 큰 재난을 당한 뒤 1871년(고종 8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880년에는 동, 서무와 중삼문이 신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대성전이 중수되었고, 1914년에는 대성전과 후원이 수선되었으며, 1924년에는 문묘(文廟) 전부가 보수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며 명륜당 전면 좌우에 있던 동재, 서재는 일제 강점기 때 훼철되었고 전사청(典祀聽), 대성전, 동무, 서무, 제기고 등이 남아있으며 특히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어둠을 밝히는 청료대, 손을 씻는 관수대 등의 석물이 남아 있습니다.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은 병오년(丙午年 1906)에 홍성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입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 이조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유생, 농민들과 홍주성에 쳐들어가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으나 일본군이 대포를 사용하여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하였는데 그때 조양문이 부서졌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그후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와 경찰서장이 현재 의사총이 있는 곳에서 식수를 하다가 많은 유골이 나오자 그 연유에 대하여 옛 노인에게 설명을 듣고 병오년 때 전사한 항일의병군의 유골이 임시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유골을 모아 합장 분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습니다. 처음에는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했으나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홍가신청난비는 선조 29년(1596) 7월 6일 종친이면서 서자(庶子)인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당시 홍주목사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이 적을 평정한 사실을 영구히 알리기 위하여 인조 19년(1641)에 비를 세웠는데 오랫동안 방치한 관계로 파손되고 퇴색한 것을 1973년에 보수하여 현재 모습에 이르고 있습니다.

결성읍성(結城邑城)은 1451년(문종 1)에 결성의 주산(主山)인 석당산(石堂山 146m)의 북쪽 기슭을 에워싼 포곡식(包曲式) 석성(石城)으로, 고려 때 결성현의 치소(治所)였던 석당산 산성을 토대로 넓혀 쌓은 것으로 추정딥니다. 읍성의 동북 벽은 파괴되었으나 남벽에 2개소, 서벽에 2개소, 동벽에 1개소의 치성(雉城)과 너비 6m 정도 되는 해자(垓字)가 남아 있습니다. 축성 당시 성 안에는 17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지방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東軒), 치안을 담당하던 형방청(刑房廳), 문서를 보관하던 책실(冊室) 등이 남아 있습니다.

결성향교(結城鄕校)는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1623년(인조 1년)에 중수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수(改修)가 있었습니다.

구릉지에 위치하여 외삼문이 없는 전학후묘의 배치로 중심축에 명륜당과 내삼문, 대성전이 일직선상에 있고 동재만 있고 서재가 없어 전체적으로는 비대칭이지만 중심 건물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4현과 국내의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고 서쪽에는 제기고가 있습니다.

▲읍치구역에 남아 있는 정자 여하정 Ⓒ홍성군

고려 명장 최영, 사육신 성삼문,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민족시인 한용운의 고향


홍성은 고려 명장 최영, 사육신 성삼문,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독립운동가며 민족시인인 한용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은 고려의 명장으로 본관은 동주(東州), 사헌규정 원직(元直)의 아들로 홍주 적동(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352년(공민왕 1)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1358년 배 400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파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紅巾賊) 4만 명이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이를 물리쳤고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경(開京)을 함락시키자,이듬해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였습니다.

1367년(우왕 2) 왜구가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자 늙은 몸으로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을 인정받아 철원부원군이 되었고 1378년 왜구가 승천부에 침입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습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북쪽, 서쪽, 동쪽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팔도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 그리고 군사 3만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고양)으로 귀양갔습니다. 그후 합포(지금의 마산), 충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개경으로 압송되어 순군옥에 갇힌 뒤 그해 12월에 참수되었습니다.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은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槿甫),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입니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져옵니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 창제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입었습니다.

1691년(숙종 17)에 관직이 회복되어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1676년(숙종 2년)에 이량과 호서의 유림 등이 선생의 옛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綠雲書院)이란 사액을 받았으나 훗날 우암 송시열은 이 동네를 노산(魯山)의 노(魯)자와 은의(恩義)의 은(恩)자를 따서 노은(魯恩)이라 하여, 1709년(숙종35) 서원의 이름도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노은서원 옆에 별사(別仕)를 세워 성승의 위패를 1687년에 봉안하였으나 1871년 노은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철거되었으며 그때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아서 묻고 ‘노은단(魯恩壇)’이라 하였습니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은 1889년(고종 26)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12세손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하고 용력이 뛰어났고, 18세 때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으며 광복단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보다 2년 앞서서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합니다.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령관이 되었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로 출전 중이던 일본군 3,000여 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7일 간의 전투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25년 김혁(金爀), 최호(崔灝), 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하고 김종진(金宗鎭)이 농무 및 조직선전을, 이을규(李乙奎)가 교육을 맡아 동포들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 앞에서 공산당 당원인 김봉환(金奉煥)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습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1879년(고종 16)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골에서 부친 청주 한씨 한응준과 모친 온양 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입니다.

7세 때 홍성 남문동으로 이사하여,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였고 26세에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명성이 자자한 강사(講師)가 되었고 1910년에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는 한일불교동맹의 반대철폐운동을 하였으며, 1911년 조선사찰령이 내려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제창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고 1919년 최린(崔麟), 오세창(吳世昌) 등과 3.1만세운동을 모의하여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 말미에 3.1만세운동의 행동지침인 ‘공약3장’을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조선독립의 이유를 조목조목 밝힌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를 발표하였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으며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인 신간회의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만해는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 바치다가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節義)의 행적을 남기고 광복을 한해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생을 마감하여 망우리시립묘역에 부인 유씨와 쌍봉으로 안장되었으며,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생가지가 복원되고 사당(祠堂)도 건립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생가 Ⓒ홍성군

홍성은 또한 고려 태고보우국사(太古普雨國師)의 고향으로 불교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광경사(廣景寺)는 고려 때 대규모의 평지 사찰로서 지금은 폐허가 되어 폐사지에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폐사지에 3층석탑과 석불좌상이 함께 있었으나 지금 3층석탑은 홍성여중에 옮겨져 있고 석불좌상은 용주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고산사(高山寺)는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가람의 배치와 석탑의 연대를 추정해 볼 때 고려시대의 사찰로 짐작됩니다. 고산사를 품고 있는 산이 청룡산(靑龍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산사는 청룡산에 있다(高山寺在靑龍山)” 그리고 “청룡산은 일명 고산이라 하며 결성현의 서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靑龍山一名高山 在縣西北五里)”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산사의 사명(寺名)이 청룡산의 다른 명칭인 고산(高山)에서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절암(九節庵)는 보개산(寶蓋山)에 있으며 칠절사(七節寺)로 불리기도 하는데 백제시대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고 다만 강희(康熙)라고 새겨진 조선시대 기와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강희가 연호로 사용된 청나라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1662~1722년 사이의 어느 시기인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혜암(山惠庵)은 백월산(白月山)에 있는 사찰로서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이웃해 있는 보령의 성주사지(聖住寺址)에 낭혜화상비가 전하는 등으로 미루어 무염이 이 일대에서 활약했으므로 후대에 창건자로 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영조 20년에 만들어진 <홍주읍지(洪州邑誌)>에 “산혜암재주북면서거십리 읍지주산작청원당(山惠庵在州北面西距十理 邑之主山作廳院堂)”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용봉사(龍鳳寺)는 용봉산에 있으며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해지는 유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있던 자리는 서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있었으며 그 터가 명당이라 하여 평양 조씨(平壤 趙氏) 일가가 묘를 쓰겠다고 절을 폐허화시켜 할 수 없이 떠밀려 내려온 것입니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인 마애석불, 용봉사영산회괘불탱이 있고 그 외에 많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어 큰 사찰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암사(淨岩寺)는 오서산에 있는 사찰로, 원래의 정암사는 터만 남아 있고 옛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에 방형(方形)의 자연석 초석이 남아 있으며 금당지에서 서쪽으로 약 20m의 거리에 현재의 정암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 차림,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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