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형 사장 인터뷰가 잡혔어."
몇몇 지인에게 툭 뱉었다. 그냥 흘린 말이었다. 그런데 맙소사. 한순간에 눈앞에 말과 글의 탑이 쌓였다. 다들 한마디씩 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날렸다. 인터뷰 준비를 하며 자주 겪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금융계에선,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더불어민주당 총선정책공약단 부단장)이 확실히 '화제의 인물'이다.
그의 행적과 이력은, 이미 꽤 알려져 있다. 한화S&C가 담당했던 한화투자증권의 전산 업무를, 주진형 사장이 IBM에 맡기려 했다. 한화S&C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전체를 가진 업체다. 재계의 관행에 비춰보면, 황당한 짓 맞다. 그룹 총수 후계자의 회사에게 돌아가야 할 일감을, 월급쟁이 사장이 밖으로 빼돌린 셈이니까. 물론, 이런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이 일갈했다.
"재벌 개혁의 모든 이슈가 응축된 이 사건이 '증권업계의 실패한 이단아'로 소비되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 (2015년 9월 30일자 <경향신문>)"
하지만 주 사장의 모험이 재벌 개혁의 불씨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증권업계의 실패한 이단아'로 소비되는" 분위기가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반전이 생겼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그를 전격 영입했다. '경제 민주화'의 간판 격인 김 대표가 그를 부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벌 총수 일가를 위한 일감 몰아주기 관행에 맞섰던 이력이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다. 그의 다른 여러 모험들도 마찬가지.
논란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그의 모험은, 시장 규율에 대한 소신에서 비롯됐다. 시장 질서에 어긋나면, 재벌 총수와도 기꺼이 부딪힌다. 그러나 시장 논리는 위로만 향하는 게 아니다. 직원을 줄이도록 강제하는 것도 시장이다. 그는 지난 2013년 9월 대표이사 취임 이후 전체 직원의 21%를 내보내는 구조조정을 했다. 국회로 출근하는 그의 '색깔'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지난 23일, 국회 본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오는 4월 총선 공약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한화투자증권 사장 직은 오는 29일까지만 유지한다. 한화투자증권은 이날 이사회를 열고 여승주 사내이사를 신임 대표이사(사장)로 선임할 예정이다.
정치권에 왔지만, 그는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지도, 될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정책 전문성을 활용해서 김종인 대표를 도울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했는데, 앞뒤가 딱딱 맞았다. 자기 생각이 잘 정리돼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갓 입사한 고졸 사원까지 내보내야 했나" vs "현실 알고 비판하라"
프레시안 : 사장 취임 이후, 직원 350여 명을 내보냈다. 이런 전력 때문에 말이 많다.
주진형 : 같은 시기, 거의 모든 증권사가 감원을 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이익이 나는데도 직원을 줄였다. 반면, 한화투자증권은 적자가 심각한 상태였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었다. 한화투자증권을 비롯한 금융권 명예퇴직자들은 수억 원대 돈을 들고 나간다. 다른 쪽 사람들은 만져보기도 힘든 돈이다. 이런 구조조정이 왜 비난받아야하는지 모르겠다.
프레시안 : 고졸 사원을 뽑았다가 채 1년도 안 돼 내보낸 사례가 있다. 고학력자가 즐비한 증권사에서 고졸 사원은 약자다. 그들에게 더 가혹한 구조조정이라면, 정의롭지 않다.
주진형 : 틀린 지적이다. 현실을 제대로 알면, 그런 비판 못한다. 구조조정이 약자에게 집중된 것이 아니다. 푸르덴셜증권과 한화증권이 한화투자증권으로 합병하는 과정에서 지점 수가 대폭 줄었다. 상당수 고졸 사원이 지점 창구 업무를 맡았는데, 지점이 줄어드니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점 영업 자체가 사양 업종이다. 창구에서 손 놓고 있는 직원이 계속 생길 수 있다. 그들에게 희망퇴직금 줄 테니 나갈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고졸 사원만 대상으로 한 건 아니다. 대졸 사원도 포함됐다. 희망퇴직 신청자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갓 입사한 고졸 사원도 있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졸 사원, 경력이 오래된 사원도 많았다.
희망퇴직 이후에 '원래는 회사를 나갈 마음이 없었는데, 지점장이 압력을 넣어서 희망퇴직 신청서를 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역시 늘 있는 일이다. 이런 일 역시 고졸 사원만 겪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한 번 따져보자.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줄여야 한다. 그건 정해져 있다. 그럼 누구를 내보내야 하나. 오래 다닌 사람?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 법에 따른 기준을 적용하면, 아무래도 회사를 오래 다닌, 나이 든 사람이 보호 받는다. 반면, 회사는 대체로 나이 든 사람을 내보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받는 돈에 비해 생산성이 낮다고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회사 입장에서 투자를 한 대상인데, 그걸 회수하기 전에 내보내면 아깝다.
갓 입사한 사람을 내보냈다고 비난한다면, 나이 든 사람을 내보내라는 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회사 입장에선 그게 차라리 낫다. 그런데 그건 과연 옳은 일인가. 법은 나이 든 사람을 먼저 보호하라고 한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희망퇴직 신청 받을 당시에는 회사를 나가지 않았던 고졸 사원 가운데 절반 가량이 나중에 스스로 퇴사했다. 그들은 희망퇴직금도 못 받고 나갔다. 왜 그랬을까. 증권사 지점에서 2년쯤 일하면, 대학 등록금 마련한다. 그때, 퇴사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걸 모르고 하는 비판은 의미가 없다.
"생산성에 비례한 급여 받되, 회사 오래 다니자"
프레시안 : 연봉제 도입을 놓고서도 직원들과 마찰을 빚었다.
주진형 : 급여는 생산성에 비례해서 받는 게 옳다. 지금 체계에선 급여와 생산성이 엇갈린다. 젊은 직원들은 대체로 생산성에 비해 급여가 적다. 윗세대는 반대다. 이걸 바로 잡아야 한다. 대신, 직장에 오래 다닐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프레시안 : 생산성에 대한 평가가 과연 공정할 수 있나. 성과가 꼭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시장 상황이 좋으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은 성과가 나온다. 시장 상황이 나쁘면, 아무리 유능하고 성실해도 성과가 나빠진다.
주진형 :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과 동떨어진 생산성이란 있을 수 없다. 생산성 개념 안에 시장 상황이 포함돼 있다. 시장 상황이 나빠서 성과가 안 좋았다면, 생산성이 낮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는 급여가 줄어야 한다. 대신 시장 상황이 개선되면 생산성도 높아질 테니, 급여가 오른다. 그래도 성과가 안 좋은 경우라면,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지.
"시대에 뒤쳐진 윗세대, 아랫세대 안 키운다"
프레시안 : 앞서 페이스북에 고도 성장기에 쉽게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후배들을 지휘한다고 썼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방금 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아랫세대는 능력과 기여에 비해 대우를 못 받고, 윗세대는 반대라는 것이다.
주진형 : 페이스북에서 했던 이야기가, 내 생각 그대로다. 지금 50대 세대는 대학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대부분 그랬다. 그럼에도 쉽게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반면 지금 젊은이들은 다르다. 악착같이 실력을 쌓아도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도 이런 상황에 대해 미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
덧붙이자면, 이런 면도 있다. 50대 세대가 배운 지식은 지금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는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성장속도 둔화가 가져온 새로운 세대 교체 문제"라는 글을 썼다. 인터뷰 내용과 관련 있는 부분을 발췌했다. <편집자>
"나는 한국에 1990년대 중반에 돌아온 후 몇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10년 위인 상사들보다 내 또래 직장인들이 확실히 더 우수했고, 나보다 10년 아래인 후배들이 우리 세대들보다 더 우수했다. 더 많이 알고, 더 개방적이고, 더 유연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들이 지도층이 된다. 또 그들 아래 세대는 그들보다 더 낫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사회가 저절로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제는 이런 시나리오처럼 흘러가지 않고 있다. 나이 많은 세대의 은퇴 연령이 길어지고 있다. 저성장이 예상보다 빨리 닥치면서 젊은 세대가 취직할 좋은 직장 수가 줄어들고 있다. 직장을 다녀야 현장 경험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데 아예 직장에 못 들어가니 장기적으로는 동세대 인구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경제학적으로 이것을 빈티지 캐피탈이라는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즉 각 자본재는 태어난 시대의 기술을 체화한 것이라서 언제 생산된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포도주처럼 각 자본재에 생산연도를 붙여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량의 단순 합이 아니라 제조 연도 별 구성과 노후화 속도를 따져봐야 한다.
인적 자본도 그렇다. 언제 키운 인재인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교육 기술 수준이 낮은 시절에 길러 낸 인력이 너무 오래 직장을 다니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그동안 고속 성장을 해서 그 인력들이 자랄 때보다 지금 세상이 크게 달라져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시대에 뒤떨어져서 쓸모가 없게 된 자본재는 도태시켜야 한다. 고철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복잡해진다.
유일한 대처 방안은 재교육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그 인력들을 계속 재훈련시켜서 시대에 맞는 인력으로 다시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작업에 소홀했다. 한국 회사의 직원 훈련 프로그램은 너무 허술하다. 기껏 해야 과장급까지만 그런대로 육성 프로그램이 있고 그 이상이 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더십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고속성장 시기가 저속성장 시기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력 문제다. 능력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후배들은 지휘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리를 안 비켜주고 있기도 하지만 옛날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 정부의 지도층이다. 뼛속 깊이 시대착오적이다. 30년 전 얘기를 다시 꺼내들고 있다. 그때 자랐으니 그렇다고 하기엔 동년배들 사이 중에서도 유독 더 뒤떨어진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젊은 층이 질색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당 정치인들도 그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젠 자기만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후배들을 발탁하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새로운 세대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기업 지도층도 마찬가지다. 점점 노령화하고 있다. 사람 키우는데 인색하다. 예전보다 희망퇴직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낮아지고 자기 미래도 불확실해지니까 직원을 단기 실적 올리는 데만 이용한다는 느낌을 주는 경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재교육 없이 일만 한 그들, '번아웃' 아니면 '권위주의'"
주진형 : 맞다. 윗세대는 지금과 같은 조직 문화의 수혜자다. 이해관계가 겹친다. 그러니까 조직 문화를 바꿀 마음이 없다. 그런데 따져볼 지점이 또 있다.
지금 50대 역시 30~40대 시절에는 정말 일만 했다. 그 결과는 크게 두 갈래다. 한 부류는 '번아웃(Burnout)'된 경우다. 말 그대로, 소진돼 버리는 것이다. 다른 부류는 더 권위적으로 변한다. 기댈 곳이 그것뿐이니까. 30~40대 시절에 적절한 재교육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게 없었으므로 생긴 일이다.
프레시안 : 예전 군대 내무반을 보면, 이병과 일병이 일을 다 한다. 상병부터 일을 덜하고, 병장은 아예 논다. 이병 시절엔 '나는 병장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사람도, 병장 되면 달라진다. 이병과 일병 시절에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일종의 보상 심리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 윗세대의 권위주의 역시 그런 면이 있는 듯하다. 30~40대 시절에는 직장에 모든 걸 바쳤으므로, 나이 들어서 보상 심리가 생기는 것 아닐까.
주진형 : 그러니까 한국 조직 문화가 군대 같다는 게다.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다. 50대 세대에겐, 오래 일할 수 있는 기회로 보상해야 한다. 급여가 줄어들어도 오래 일하는 게 낫다. 실제로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확연히 다르다. 예전에는 은퇴했을 나이의 사람들이 지금은 일을 한다. 인구 고령화가 본격화되면,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질 게다.
"노인 취업과 국민연금, 갈수록 중요해질 것"
프레시안 : 한국은 인구 면에선 고령화 됐고, 경제 성장 면에선 저성장 국면이다. 미래를 어떻게 보나.
주진형 : 경기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본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중요해질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이 든 세대가 계속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윗세대에게 과거와 같은 보상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은 고도성장기가 아니니까. 조직 문화를 바꾸고, 급여는 생산성에 연동해야 한다고 한 건 그래서다. 두 번째는 연금 문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국민연금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아졌다. 지금 50대, 베이비붐 세대가 정년을 맞으면 그 관심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뜨거운 쟁점이 되리라고 본다.
프레시안 : 국민연금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대기업 주가를 받쳐주는 역할만 한다는 것이다. 연금 기금을 대기업 주식에 투자하는 건 그렇다 치자. 국민의 돈으로 투자했으면, 그에 걸맞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안 한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당시 국민연금의 행태도 그랬다. 합병에 찬성하면 손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찬성했다. 대체 누가 그럴 권리를 줬나 싶다. 당시 한화투자증권의 보고서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증권사와 달리, 한화투자증권은 합병 전망을 부정적으로 봤다. 결과적으론 틀린 셈이지만, 중요한 지적이었다. 그 보고서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다.
주진형 : 그룹 측에서 당시 보고서에 대해 문제 삼았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관한 전망이 빗나갔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합병이 어렵다고 전망한 근거는, 주요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대부분 합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역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대하라"는 보고서를 국민연금에 제출했었다.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합병이 무산되는 거였다. 중요한 결정에 대해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열도록 돼 있다. 그러면, 의결권 자문기관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다. 합병에 반대하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열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갔는데, 그런 예상까지 보고서에 담을 수는 없다.
프레시안 : 국민연금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 공부도 꽤 했다고 들었다.
주진형 : 1990년대 중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왔다. 그때 가장 궁금한 제도가 국민연금이었다. 연금 가입자가 내는 돈은 너무 적어 보였다. 그런데 받는 돈은 커 보였다. 국민연금이 '부과식'은 아니다. '적립식'인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았다.
(부과식 연금은 당대의 노동자에게 돈을 거둬서 당대의 은퇴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적립식 연금은 개인이 적립한 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주진형 사장은 "지금처럼 적립식에만 의존하는 국민연금 체제를 부과식과 적립식을 병행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편집자>)
투자 원칙 역시 빈 구석이 많아보였다. 적립한 돈을 어떻게 투자할지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주변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몰랐다. 혼자 공부하다 김종인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관련 내용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레시안 : 그래서 김종인 대표와 친분이 생겼고, 결국 더불어민주당에 들어오게 된 건가.
주진형 : 그건 아니다. 김종인 대표와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프레시안 : 경기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현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보니까, 야당에 들어간 걸 텐데.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라고 보나.
주진형 : 문제가 많다. 예컨대 최경환 경제팀은 줄곧 '빚내서 집 사라' 기조였다. 정권 임기 안에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생긴 부작용이 너무 크다.
프레시안 : 야당이 집권하면 다를까.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 정책을 실제로 다루는 건 관료들이다. 관료는 안 바뀌지 않는가. 어느 정권이건, 폭탄을 다음 정권에 넘기고 싶어 한다. 야당이 집권해도 비슷한 부양책을 쓰려고 하지 않을까.
주진형 :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무리한 부양책에 따른 부작용이 더 커지는 시점이 다가오니까. 현 정부만 해도, 최근에는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부작용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정규직 교수와 시간 강사, 하는 일은 비슷한데 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나"
프레시안 :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모아보면, 대기업의 나이 든 간부들이 급여를 너무 많이 받는데, 그게 큰 문제라고 보는 것 같다. 그걸 깎자고 하면 반발이 클 텐데. 또 대기업 정규직 급여 줄인다고 해서, 그 돈이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직원에게 흘러간다는 법도 없지 않나.
주진형 : 노동운동이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한 탓에, 결국 노동운동이 약해졌다고 본다. 예전에는 노동조합 조직가들이 흔했다. 노동조합이 없는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이들이다. 그런데 중소기업, 비정규직 등 정말 노동조합이 필요한 현장에 뛰어든 조직가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회 이중화'라는 말을 쓴다. 약 10%의 인사이더(내부자) 집단과 나머지 아웃사이더(외부자) 집단으로 나누는 개념이다. 대기업 및 공기업 정규직, 공무원,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교수, 교사 등이 인사이더 집단이다. 그들은 기존 제도와 관행의 수혜자다. 정치와 언론 역시 그들의 목소리를 주로 대변한다. 야당조차 그들 편이다.
내가 볼 때,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사이의 벽이 너무 높다. 대학 교수를 예로 들어보자. 정규직 교수와 시간 강사. 둘 다 하는 일은 비슷하다. 하지만 전자는 인사이더, 후자는 아웃사이더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게 정상인가.
프레시안 :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인사이더를 비난한다고 해서, 저절로 간극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주진형 : 세금과 복지. 그게 방법이지.
프레시안 : 그래서 정치권에 들어왔나. 세금과 복지를 다루는 게 정치니까.
주진형 : 그런 셈이다. 그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10% '인사이더' 목소리가 과잉 대표됐다"
프레시안 :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인사이더'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층이라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어떤 부담을 지라고 요구하는 게 쉽지 않다. 복지를 강화하기 어려운 한 이유다. 기득권층이 기득권층이라는 걸 인정해야, 그들에게 복지 확대를 위한 부담을 지울 수 있다. 첫 단추부터 꿰기 힘들다.
주진형 : 1980년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낮았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면 인간관계도 대학 중심으로 짜여 진다. 사회에 나온 뒤에도, 대부분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러니까 사회 전체 평균과 그들이 체감하는 평균 사이의 간극이 크다. 주변에 '인사이더'가 많으니까, 사회 전체로 봐도 '인사이더'가 흔한 줄 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인사이더'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는 일이 생긴다.
프레시안 : 지난해 초 연말정산 파동 당시에도 같은 지적이 나왔었다. 당시 연말정산으로 오히려 세금을 더 내야 할 상황이 된 직장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런데 그들은 전체 임금 노동자 가운데 소득이 높은 구간에 속한 이들이었다. 연말 정산 신고자 1600만 명을 소득 순으로 줄 세웠을 때, 중간에 있는 사람의 소득(중위소득)이 2300만 원대다. 중위소득의 150%를 고소득층으로 분류한다면, 연봉 3450만 원 직장인은 고소득층이다. 그런데 대기업 정규직은 임금의 출발선이 이 수준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위치와 실제 위치 사이의 차이가 크다.
주진형 : 그게 정말 큰 문제다. 연봉 6000만 원 넘는 대기업 직원도 살기 힘들다고 한다. 전체 임금 노동자 가운데 상당히 높은 수준인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그들이 체감하는 소득 순위는 왜 실제보다 한참 낮은 걸까. 내가 보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부동산이다.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너무 높다. 일해서 번 돈이 상당 부분 부동산에 묶여 있다. 나머지 하나는 사교육비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소득이 높은 사람도 늘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사교육 문제를 풀려면, 교육 부문에서 공적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또 앞서 말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줄어들어야 한다. 사교육비를 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자식을 '인사이더' 집단에 넣기 위해서니까.
"국회의원, 되고 싶지 않다"
프레시안 : 국회의원이 되면, 하고 싶은 게 많겠다.
주진형 : 나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지 않다. 지역구 선거에 출마할 마음은 전혀 없다.
프레시안 : 비례대표 의원도 안 할 건가.
주진형 : '저를 공천해 주세요'라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례대표 공천을 준다면, 받겠지. 그런데 나한테 올 자리는 없을 것 같다. 비례대표 후보 절반은 여성 몫이다. 나머지 절반을 놓고,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
프레시안 : 국회의원이 왜 하기 싫은가.
주진형 : 나는 사장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었다.
"재벌이 무리하게 몸집 불리는 진짜 이유?…빨대 꽂기!"
프레시안 : 한화투자증권 사장으로 일하면서, 총수 일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을 많이 했다. 재벌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라고도 알고 있다. '경제 민주화'를 내건 김종인 대표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 '경제 민주화', 여전히 의미가 모호한 느낌인데, 생각이 궁금하다.
주진형 : 그게 왜 모호한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명료하다. 시장에서 기업은 개인보다 힘이 세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힘을 실어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게 '경제 민주화' 아닌가.
프레시안 : 한국의 재벌은 시장이 부여한 권력을 넘어서는 권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예컨대 롯데 그룹 총수 일가는 여전히 복잡한 순환 출자 구조를 유지한다. 이런 편법으로 자기 지분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한다.
주진형 : 한번 물어보자. 재벌은 왜 순환출자 같은 방식을 썼을까. 왜 그렇게 무리해서 몸집을 불릴까. 재벌이 도둑질하는 걸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국 재벌이 흔히 사용한 방식은 이렇다. 일단 규모를 키운다. 자기 지분이 적어도 좋다. 배당을 적게 받아도 된다. 대신, 그들은 기업에 빨대를 꽂는다. 총수가 장악한 회사로 일감을 몰아주는 등의 방법으로 이익을 빼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기업은 규모가 큰 쪽이 좋다. 그래야 빨대 꽂아서 가져갈 수 있는 이익도 커진다. 따라서 이런 식의 빨대 꽂기가 불가능하게끔 하면, 무리한 몸집 불리기를 시도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자면 우선, 소액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 등의 방법으로 총수가 이익을 빼 가면, 결국 소액 주주들이 손해다. 그들의 몫이 줄어든 셈이니까. 집단 소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아울러 이익을 도둑질한 총수에 대한 처벌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 이 두 가지만 잘 이뤄져도, 시장이 부여한 것 이상의 권력을 재벌이 휘두르는 일은 막을 수 있다.
프레시안 : 무리한 몸집 불리기 등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벌 체제가 지닌 순기능이 있다는 말도 있다. 어찌 됐든, 과감한 신규 투자를 했다는 게다.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나.
주진형 : 다시 물어보자. 지금 재벌들이 신규 투자 하고 있나. 그들이 지금 힘이 없나. 아니다. 그런데 왜 투자를 안 하나. 재벌 체제를 유지해야 과감한 투자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프레시안 : 소액 주주들은 단기 이익에 주로 관심이 있으므로,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장기 투자가 힘들어진다는 말도 있는데.
주진형 : 어느 경영진이 소액 주주 무서워서 투자 안 하나.
"형편 없는 글쓰기, 증권사 보고서의 고질적인 문제"
프레시안 : 한화투자증권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증권사 보고서의 수준을 확 높였다. 이제껏 한국 증권사 보고서는 무조건 주식을 사라고만 했다. 업황이 좋으면, 주가가 계속 오를 테니까 사라고 한다. 나쁘면, 값 떨어졌을 때 사라고 한다. 정말 나쁘면, 용기를 내서 사라고 한다. 그런데 주진형 사장은 보고서 가운데 일정 비율은 무조건 매도 의견을 내도록 했다. 외국에선 당연한 일인데, 한국에선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해 당사자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중립적인 전문가들은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증권사에 편집국을 둔 것도 신선했다. 한국 증권사 보고서는 온통 비문(문법에 어긋나는 문장) 투성이다. 그런데 기자 및 소설가 출신 편집자를 채용해서 보고서 교열을 맡겼다. 그러니까 문장 수준이 한결 나아졌다는 평가가 있다. 이 부분은 여전히 논란이 된다. 증권사 안에 꼭 편집국을 둬야 하느냐는 이들이 많다.
주진형 : 외국 증권사에선 에디터(편집자)를 두는 일이 흔하다. 그리고 에디터가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그게 당연하다. 사장 취임하고 나서 따져보니, 증권사가 외부에 발표하는 글의 양이 대략 주간지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에디터를 안 두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증권사 보고서의 문장을 문제 삼은 건 오래 전부터다. 형편없는 문장은 한국 증권사 보고서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읽어도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다.
삼성증권 전략기획실장 재직 시절, 리서치 센터장이 낸 보고서를 사원더러 교열 보게끔 했었다. 잘못된 문장을 찾아 빨간 펜으로 고치게 했는데, 종이가 온통 빨간색이었다.
프레시안 :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이면, 상당히 고위직이다. 그런데 평사원더러 글을 고치게 하면, 자존심 문제가 될 텐데. 센터장이 자존심 상했다는 말 듣지 않았나.
주진형 : 자존심이 상해야지.
프레시안 :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은 품질 관리가 꽤 잘 된다. 한국 제품은 품질 나쁘다는 말, 이제는 듣기 힘들다. 그런데 정신노동으로 만들어낸 것들은 여전히 품질 관리가 안 되는 것 같다. 비문으로 가득한 증권사 보고서는 그 중 한 가지 사례라고 본다. 그러니까 정신노동은 공정한 평가도 어렵다. 인맥 따지는 연고주의, 권위주의 등이 안 사라지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주진형 : 그게 글쓰기 문제와 맞닿아 있다. 한국의 직장은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엉터리 문장을 써도 윗사람이 그냥 넘어간다는 뜻이다. 정확한 문장, 적절한 단어 선택 등을 요구하는 직장을 한국에서 세 군데 정도 본 것 같다. 한국은행, 정부 부처, 언론사 등이다. 이들 직장에선 문장을 잘못 쓰면 윗사람이 야단친다. 그렇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하지만 나머지 직장에선 그런 경우를 못 봤다.
문장이 엉망이라는 건, 지식노동의 품질 관리가 전혀 안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서비스 산업 역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평가 기준 등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낸다. 선진국은 그 시간을 거쳤다. 우린 안 거쳤다. 그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정치인의 의정활동 역시 품질 관리가 안 되는 분야 아닌가.
주진형 : 정치는 정치인들이 그간 하던 방식을 존중해야지. 그것까지 내가 건드릴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할 생각이다.
"사장이 들어올 때, 다른 임원들이 일어나도 나는 안 일어났다"
프레시안 : 권위주의를 무척 싫어하는 것 같다. 원래부터 그랬나.
주진형 : 어릴 때부터 그랬다. 삼성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원 회의실에 사장이 들어오면, 다른 임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도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내가 사장이 된 뒤에도 그대로였다. 내가 나타났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짓은 못하게 했다.
프레시안 : 다른 임원들은 모두 일어나는데, 혼자 앉아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
주진형 : 내가 원래 그런 데 무감각하다.
프레시안 : 그런 성격인데, 용케 최고경영자가 됐다.
주진형 : 운이 좋았다. 내 장점을 알아보는 상사를 만났다.
프레시안 : 어떤 장점인가.
주진형 : 복잡한 문제를 잘 파악하고 해법을 찾는 능력이다.
프레시안 : 시장 규율에는 엄격하되 권위주의는 배격하는 유형인 듯하다. 한국에선 드문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선 진보로, 다른 자리에선 보수로 분류된다.
주진형 : 직원들도 그런다. 내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헷갈린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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