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이번에 찾아가는 폐사지는 해발 1,172미터 높이의 정령치에 있었다는 개령암터[開嶺庵址]와, 머리에 관(冠)을 쓰는 것도 원치 않았고 선(襌)을 배우기도 원치 않았다고 말하던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만복사터[萬福寺址]입니다. 더구나 만복사터는 김시습이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물 때 쓴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소설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실제 무대이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보다 불교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던 현대의 소설가 최명희(1947∼1998)가 쓴 장편소설 <혼불>에 등장하는 호성암터[虎成庵址]도 찾아갑니다.
개령암터와 호성암터에는 마애불이 남아있습니다.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된 개령암터마애불상군은 12구의 마애불이 산마루의 거뭇한 바위에 새겨져 옛일을 말하고 있으며, 호성암터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한 문화재자료 146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 남아있습니다. 더구나 만복사터에는 보물 제30호인 5층석탑, 보물 제31호인 석불대좌, 보물 제32호인 당간지주와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남아있어 이번 제20강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답사가 될 것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개령암터]
지리산 일대에 사람의 성씨가 들어가는 고개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정령치요, 다른 하나는 황령(黃嶺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쓴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만복대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다시 그 남쪽에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이는 신라의 고승인 우번선사의 도량이라고 하니 지금의 우번암을 일컫는 것이며, 만복대의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황령암(黃嶺庵)으로도 부른다고 했으니 서산대사가 쓴 <황령암기>가 남아있다. 기문에 따르면 한나라 소제(昭帝) 3년인 BC 85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갯마루에 성을 쌓을 때 황 장군과 정 장군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고개 이름을 각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고 한다.
개령암터 마애불상군은 지리산의 정령치와 고리봉을 잇는 능선 상에 있으며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되었다. 개령암은 유생들이 남긴 수많은 지리산 유기(遊記)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남 구례의 천은사에 전하는 필사본인 <호좌남원부(湖左南原府) 지리산감로사(甘露寺)사적>에서 도선이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애불상군 앞에 있었던 암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보물로 지정되던 1992년에 ‘개령암터 마애불상군’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마애불은 모두 12구이며 만약 개령암이 도선국사가 세운 것이 확실하다면 전남 화순의 운주사 불상들과 연결하여 조성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곳의 주존불이라 할 수 있는 높이 4m에 이르는 입상은 소맷자락 안에 양손을 끼고 있는 수인을 하고 있으니 이는 운주사의 불상들에서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의 표현 또한 운주사의 마애불과도 닮았으며 월출산 용암사터 마애불좌상이나 남원의 용담사터 석불입상들과 많이 닮아있어 조성 시기를 고려시대라고 추정할 수 있다.
불상의 조각수법이나 표현양식이 모두 일정하여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존불의 왼쪽 어깨 근처에 새겨진 명문이 ‘세전명월지불(世田明月智佛)’이라고 되어 있으니 비로자나불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의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하고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은 지권인을 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 이토록 작은 규모의 바위에 12구의 부처님을 한꺼번에 조성한 예는 없으며 토속미가 물씬 풍기는 파격미는 운주사의 불상을 능가하는 것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복사터]
만복사터는 전북 남원 시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했다고 하며,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폐사가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이며 1597년 남원성이 함락될 당시 왜군들이 절을 불 지르고 사천왕을 수레에 실어 끌고 다녔다고 하니 그 즈음에 폐허가 된 것으로 본다. 그 후, 1678년 조선 숙종 당시 남원부사인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했으나 승방 1칸을 짓는 것에 그쳤다.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맹(1424~1483)의 문집인 <사숙재집(私淑齋集)>의 부록에 만복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다음과 같다.
“기린산 동쪽에 5층의 불전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이 있다. 고려 문종 때 창건한 것이다.(在麒麟山東 有五層殿 西有二層殿 殿內銅佛長三十五尺 高麗文宗時所創)”
또 그는 <호남형승십일절(湖南形勝十一絶)>에 만복사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松桂陰濃接郡家 寶坊鐘磬月中多)”
그 후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만복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복사는 서문 밖 2리에 있었고 오백나한이 있었으며 1597년 8월 14일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의 사천왕을 싣고 와 성 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西門之賊 以輸車載萬福寺四天王 回示城外 大軍益駭)”라고 했다. 왜적이 만복사의 사천왕을 끌고 다녔으니 이때 만복사는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해에 별시문과에 합격한 남원의 선비인 양경우(梁慶遇 1568~?)가 만복사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황량한 들판에 슬픈 바람이 부니 曠野饒悲風
해질 무렵 맑은 쑥대 가지가 슬피 우는구나 蕭條歲將暮
옛 절은 그대로인데 중은 간 곳 없고 僧亡古寺存
날 저물었건만 종소리와 북소리조차 없구나 日落無鍾鼓
그가 과거에 합격하고 만복사를 찾았을 때는 이미 폐찰이 되고 난 후였던 셈이다.
김시습이 쓴 <만복사저포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만복사는 해마다 3월 24일에 남원 사람들이 등불을 밝히고 법회를 열어 복을 빌었다던 곳이다. 그 동쪽에 살던 남자 주인공인 양생이 그날 법회에 참가했다가 사람들이 돌아가자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했다. 그것도 자기가 이기면 부처님에게 여인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며 내기를 했던 것이다. 기어코 양생은 내기에 이겼고 부처님 뒤에 숨어 있다가 배필을 구해달라며 부처님께 빌러 온 아리따운 여인과 만나게 된다. 양생과 그녀는 만나자마자 만복사의 행랑에서 사랑을 나누고 절 마당에 술자리를 마련하여 밤을 새고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개령동(開寧洞)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양생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 인사를 드리러 보련사(寶蓮寺)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은 처녀의 부모들이 가엾은 딸을 위해 보련사에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기로 한 날이었다. 드디어 양생은 그녀의 부모를 만났고 운우의 정을 나눈 그녀가 왜적에 항거하다가 죽어 간 혼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심한 양생은 부모들과 함께 그녀를 위해 천도재를 치르고 개령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의 빈장처(殯葬處)였다. 양생은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그녀를 위해 장례를 치러준다.
그 후, 양생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서 사흘 낮밤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위해 또 다시 천도재를 치른다. 죽은 영혼들을 달래는 천도재가 두 번이나 거푸 치러진 것이다. 한번은 부모들과 함께 그녀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개령동 초빈(草殯) 앞에서는 그녀의 육신을 위해서 치른 것이다. 양생은 이미 그녀와 영혼결혼을 한 남편이었기 때문이며 천도재를 통해야만 비로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감동한 것일까. 양생이 깊은 마음으로 천도재를 올리고 있던 날, 극락왕생한 그녀가 공중에 나타나 말한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양생은 그날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전해지며 다시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성암터]
호성암(虎成庵)이라는 암자는 한국전쟁까지도 존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돌절구와 같은 몇 개의 석물들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호성암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이라는 소설에서 되살아났다. 도환이라는 법명을 지닌 스님이 암자에 살았다고 하며 그는 손 맵시가 남달라 연봉과 연꽃, 설중화, 오색등화, 불봉화 같은 꽃들을 생화보다 곱고 섬세하며 선연하게 만들어 보는 이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나타난 도환 스님의 모습은 이렇다. “꽃 만드는 손이어서 그러한가. 도환은 손이 고왔다. 중키 넘어 호리한 몸집이며 얼굴 모습도 단아하고 맑은 쪽이었는데, 눈매만은 뜻밖에도 매눈이어서, 웃을 때는 얼핏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 보면, 그 빛이 내리꽂을 듯 날카로웠다.”
그런 스님이 만드는 지화(紙花)들은 금세라도 피어날 것만 같아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종부(宗婦) 청암부인 상을 당했을 때 몇 날 밤을 새며 꽃상여를 장식할 꽃을 만든 것도 도환 스님이었다
호성암터에 남아 있는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은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있는 <혼불문학관> 뒷산인 풍악산 노적봉 중턱에 있다. 높이와 너비가 15m남짓한 거대한 바위에 저부조로 새겨졌으며 원형이 제대로 잘 남아있다. 마애불 앞에 있었던 호성암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마애불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애불은 두툼한 연화대좌에 앉았으며 손에는 연봉을 받쳐 든, 흔히 보지 못하는 수인을 하고 있다. 더구나 가지가 없이 봉우리만 들고 있어 특이하며 연봉을 들었으니 용화수인(龍華手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본디 연봉은 관음보살이 드는 지물이지만 고려시대에 들면서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퍼져 유행했으니 이 여래좌상 또한 고려시대에 조성된 미륵불로 봐야 할 것이다.
법신은 두 겹의 굵은 두광과 신광으로 싸여 있으며 머리에 육계는 없다. 머리는 나발이지만 도식적인 문양이 반복되어 독특하며 귀는 늘어져 어깨에 닿아있다. 목에는 내의의 목선과도 같은 것이 새겨져 있지만 삼도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상호는 둥근 형지만 입은 작게 표현되었고 그 주위로 광대뼈가 돋보이도록 움푹하게 주름을 잡았다.
그 외에도 이 마애미륵에게는 마애불에게서 흔히 보지 못하는 요소들이 많이 베풀어져 있어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크기는 높이가 6m에 달하며 너비가 4m인,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이며 조성 시기는 고려 후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2016년 3월 폐사지학교 제20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19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0강 여는 모임
-지리산 정령치휴게소 도착
-개령암터 도착
-정령치휴게소 출발
-점심식사 겸 뒤풀이(남원 <새집추어탕>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도토리묵과 추어탕, 기타)
-만복사터 도착
-혼불문학관 도착
-호성암터 도착
-혼불문학관 출발. 서울 향발
<걷기 메모>
정령치휴게소에서 개령암터 가는 길은 등산로이긴 하지만 평지와 다름없습니다. 휴게소와 암자터가 거의 같은 높이입니다. 편도 15분 정도 걷습니다.
만복사터는 시내 한 가운데 있고, 식당에서 5분 거리입니다. 버스 내리면 바로 거기입니다.
호성암터는 <혼불문학관>에서 30~40분 정도 걷습니다. 처음 10분 정도는 시멘트 포장된 얕은 오르막, 그 다음 20분 정도는 빡센 고개인데 산길입니다. 그 다음 10분 정도는 원만한 고개입니다. 올라갔던 길로 내려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산행복/배낭/등산화), 선글라스, 모자,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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