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2월 제28강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면서도 단종(端宗. 1441~57. 재위 1452~55)이 유배 가서 사사당한 애절한 땅, 영월(寧越)을 찾아 단종의 애사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8강은 2016년 2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주천면(요선정/요선암/술샘)-읍치구역(관풍헌/영모전/자규루/영월향교/보덕사/금몽암/금강정)-장릉(장릉/배식단사/낙촌기적비/배견정)-점심식사 겸 뒤풀이(장릉보리밥집)-청령포(노산대/망향탑/금표비/단묘유지비/관음송)-김삿갓면(김삿갓유적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8강 답사지인 <영월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고려 때 ‘영월’이란 이름 얻어
강원도 영월(寧越)고을은 동쪽은 태백, 서쪽은 횡성과 원주, 남쪽은 제천과 단양 그리고 영주와 봉화, 북쪽은 평창, 정선과 접하고 있는 중첩된 산줄기에 갇혀 있는 산지 고을입니다.
산줄기는 북서쪽에 백덕산(白德山 1426m), 두위봉(斗圍峰 1466m), 직운산(織雲山 1172m), 남쪽에 태화산(太華山 1027m), 어래산(御來山 1064m), 선달산(先達山 1236m), 구룡산(九龍山 1346m)이 둘러싸고 영월 군내에도 매봉산(1268m), 망경대산(望景臺山 1027m), 응봉산(鷹峰山 1013m), 봉래산(蓬來山 800m) 등이 솟아 있습니다.
물줄기는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酒泉江)과 평창강(平昌江)이 심한 곡류를 하면서 한반도면의 신천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영월읍 하송리에서 한강 본류와 만나고, 구룡산에서 발원한 옥동천(玉洞川)이 서쪽으로 흐르다 김삿갓면 각동리에서 한강 본류인 남한강에 흘러듭니다.
영월에서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은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속사천이 되고, 평창군 대화면과 봉평면 경계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흥정천을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대화면 하동미리에서 대화천과 합쳐지고 평창읍을 지나서 서북쪽에서 오는 주천강과 합쳐져 영월읍 남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합니다.
영월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일부였고 4세기 초부터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백제의 세력이 커져 한강 하류지역 일대를 차지함에 따라 이때부터 백제에 속하게 되었으며 당시 영월이 100가구가 넘는다는 뜻으로 백제의 백월(百越)땅이라 불렀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그 세력을 남으로 뻗쳐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함락시킨 후 한강 유역을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자 백월은 고구려에 속하여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뒤 신라가 차지하여 통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생현을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9주5소경 중 명주(溟州)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40년(태조 23) 영월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주천현(酒泉縣)을 폐하면서 원주(原州)에 이속시켰으며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원주와 같이 중원도에 속했고, 5도양계 이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편입되었다가 1372년(공민왕 21)에 영월 출신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여 영월을 군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조선시대는 1401년(태종 1)에 강원도에 귀속되면서 지군사(知郡事)가 다스렸고 1698년(숙종 2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을미개편 때 군이 되었고 원주, 평창, 정선 등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에 다시 강원도로 복귀하였습니다.
영월의 읍치구역에는 객사의 일부인 관풍헌((觀風軒), 단종이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는 자규루(子規樓), 읍치 성황사(城隍祀)였던 영모전(永慕殿), 그리고 영월향교(寧越鄕校)가 남아 있습니다.
관풍헌, 단종이 사사된 곳
관풍헌은 1392년 영월 객사의 동익헌(東翼軒)으로 창건되었으며 단종이 1457년(세조 3년) 6월 22일 한양을 출발해 7일 만인 6월 28일 청령포에 유배되어 유배생활을 하다 여름 홍수로 인해 시내에 있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던 중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으로, 현재 객사의 정청(正廳)은 보덕사의 약사전(藥師殿), 서익헌(西翼軒)인 망경헌(望京軒)은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규루는 단종이 이곳에 자주 올라 <자규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로서 원래는 1428년(세종 10) 군수 신권근(申權根)이 누각을 세우고 ‘매죽루(梅竹樓)’라 불렀던 것을 단종의 <자규사>가 너무 슬퍼 누각 이름을 자규루로 바꿨다고 하며 그 후 퇴락하여 민가가 들어선 것을, 1791년(정조 15)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一自怨禽出帝宮)
짝 잃은 외로운 몸 깊은 산중에 있구나. (孤身雙影碧山中)
밤마다 잠들려 해도 그럴 겨를이 없으니 (暇眠夜夜眠無假)
수없이 해가 가도 끝없을 이 한이여 (窮限年年恨不窮)
자규 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聲斷曉岑殘月白)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血淚春谷落花紅)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사람의 귀에만 홀로 밝게 들리는가 (何柰愁人耳獨聰)
영모전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영월의 주산인 매봉산 자락 읍치구역 남쪽 언덕에 있습니다. 1517년(중종 12) 영월부사 이용하(李龍夏)가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려고 성황당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건립하였고, 이용하의 후손 이계진이 개수하여 ‘영모전’이라 하였으며 단종의 영정은 추익한(秋益漢)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進上)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추익한은 한때 한성부윤을 지내다가 1434년 사직하고 고향 영월로 내려갔는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 있을 때 단종을 찾아가 문안드리고 머루, 다래 등 귀한 과실을 구하여 진상하였다고 합니다.
영월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성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습니다. 1973년에 중수하여 지금은 대성전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과 동재(東齋), 서재(西齋) 그리고 풍화루(風化樓)가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전적(典籍),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하고 있습니다.
산성 많은 고을
영월 지역은 산지고을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삼국의 영토 확장의 격전지임을 말해 주는 산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야산성(大野山城)은 대야리 큰재(400.8m) 정상에 있는, 삼국시대에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400m, 높이는 4.5~5m 정도로 현재는 붕괴되어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성터에서는 회백색연질 기와조각과 적갈색연질, 회청색경질 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영월에 있는 태화산성, 정양산성, 영춘산성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양산성(正陽山城)은 정양리에서 연하리에 걸쳐 있는, 달리 정양산이라고도 하는 계족산(鷄足山)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771m, 성벽 높이 4∼10m, 너비 6m로,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산성의 남쪽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남한강을 따라 영월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길을 한눈에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험준하고 높은 산의 장벽을 피해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양산성을 쌓은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검왕이 쌓았다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남쪽에서 침입하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대야산성, 온달산성, 봉래산성 등과 함께 축조하였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서문, 남문, 북문 및 동문지가 잘 보존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특히 북문은 양쪽 터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법흥산성(法興山城)은 백덕산(白德山 1350m) 정상에서 남쪽으로 5.7km 정도 뻗어 내린 능선에 있는 829m 고지에 세워진 토축(土築)과 석축(石築)의 혼합형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 성벽이 거의 파괴된 상태이며 성의 전면(全面)이 평창을 향해 있는데, 이는 공기리의 공기산성(恭基山城), 도원리의 도원산성(桃源山城)과 동일한 형태입니다.
도원산성(桃源山城)은 길이 약 2km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성벽의 흔적은 거의 없으나 마을에 성안(城內), 병진내(兵陣川), 화약골 등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성지(城址)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공기산성(恭基山城), 법흥산성(法興山城)과 함께 세 산성이 동일한 양식으로 축성되고,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완택산성(莞澤山城)은 완택산(莞澤山 916m)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7개 봉우리의 산 정상을 감싸면서 돌로 축조한 석성(石城)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산성의 둘레는 3,477척(약 1.05km)이며, 1290년(고려 충렬왕 16) 원나라의 반군이었던 합단(哈丹)의 무리가 침입했을 때 고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산성은 현재 거의 붕괴된 상태이고 800m 능선 위 망대(望臺)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기와장과 토기 조각, 강돌무더기가 출토되었으며 이곳에서 서남쪽 방향의 능선을 따라 토성(土城)의 흔적도 약간 남아 있으며 서쪽 경사지 아래 작은 분지는 본영지(本營地)가 있었던 흔적으로 추정됩니다.
동강·서강 가의 아름다운 정자들
영월은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 만나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아름다운 정자(亭子)가 많이 있습니다.
금강정(錦江亭)은 영흥리 보래산 아래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으로 1428년(세종 10)에 김복항(金復恒)이 세운 후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영월제영(寧越題詠)>에는 이자삼(李子三)이 영월군수로 있을 때 사재를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퇴계 이황이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금강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강정>이라는 시(詩)도 전해지고,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1684년(숙종 10)에 <금강정기(錦江亭記)>를 남겼습니다.
금강정 뒤편에는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낙화암(落花岩)에서 몸을 날려 사절(死節)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인 민충사(愍忠祠)가 있는데, 1742년(영조 18)에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습니다.
금강정 아래로는 동강이 흐르고, 그 앞에는 계족산과 태화산이 둘러쳐져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금강정 주변에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산재해 있어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방문한 기록이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선정(邀仙亭)은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 상류의 풍경이 아름다운 강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학자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곳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긴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1913년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元), 곽(郭), 이(李)씨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가 사액(賜額)한 어제시(御製詩)를 봉안하기 위하여 정자를 짓고 요선정이라 하였습니다.
정자에는 이응호(李應鎬)가 쓴 ‘요선정’과 ‘모성헌(慕聖軒)’이라는 현판과, 홍상한(洪象漢)의 <청허루중건기(淸虛樓重建記)>와 <요선정기(邀仙亭記)>, 그리고 <중수기(重修記)>가 걸려 있으며 정자 건립 당시 주천에 있는 청허루에 보관했던 숙종의 어제시를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습니다.
지금의 요선정 터는 신라 불교 전성기에 징효대사(澄曉大師)가 열반했을 때 천 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법흥사의 부속 암자 터였으며 정자에 앉으면 기묘한 형상의 화강암 절벽이 펼쳐진 최고의 절경과 동강으로 흘러가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가장 멋지게 바라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암자 터임을 알리는 5층석탑과 바위에 암각된 마애불이 남아 있습니다.
배견정(拜鵑亭)은 장릉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거북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형상을 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입니다. ‘낙화암에서 순절한 궁녀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 묘소를 찾아와 울며 절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었다고 하며 낙화암은 영월의 동강 강변에 있는 층암절벽으로, 단종이 승하한 후 궁녀, 관비, 무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졌던 곳입니다.
이 정자는 1792년(정조16)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으로 영월부사, 승지, 대사간, 병조참판을 지낸 박기정(朴基正)이 창건하였고 동남쪽으로는 박기정이 배견암(拜鵑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으며 지금은 매몰됐지만 예전에 배견정 앞으로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습니다.
영월, 단종의 비애가 서린 땅
영월에는 단종의 비애가 서린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청령포(淸泠浦)는 단종의 최초 유배지로서 동, 남, 북 삼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의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도산(刀山)이라고도 부르는 66봉의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막혀 있어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단종의 유적인 노산대와 망향탑, 영조 때에 세운 금표비와 단묘유지비가 남아 있습니다.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는 단종이 머무르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 39년(1763)에 어명으로 원주감영에서 세운 것으로 ‘단종이 여기 계실 때의 옛터(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씌어 있고 서북 편에는 영조 2년(1726) 단종이 죽은 지 270년 뒤에 세워진 ‘청령포금표(淸冷浦禁標)’가 있는데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금지 푯말입니다.
노산대(魯山臺)는 청령포 서쪽 66봉에 있는 높이 80m 되는 낭떠러지를 말합니다. 단종이 해질 무렵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의 궁궐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하며,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이름을 본따 ‘노산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옆 절벽에 남아 있는 망향탑은 단종이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돌탑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는 유난히 우뚝 선 우아한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로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리며 수령이 600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강 건너 나루 왼쪽에 서 있는 기념비는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단종 유배지로 인도하는 직책인 금부도사를 맡은 왕방연(王邦衍)이 단종의 죽음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조를 새긴 비입니다. 비참한 단종의 최후를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감싸고 흐르는 서강의 물을 보고 괴로운 심정을 노래하였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장릉(莊陵)은 단종(端宗)의 능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습니다.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세웠으며, 1681년(숙종 7)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습니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왕릉의 배치와는 상관없는 시설물로서 단종을 위해 순절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旌閭碑), 박충원이 묘를 찾아낸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駱村記蹟婢), 그리고 배견정(拜鵑亭)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릉인 장릉이 3곳에 있는데 영월의 제6대 단종은 장중할 장(莊), 파주의 제16대 인조는 긴 장(長), 김포의 추존 왕인 원종은 글 장(章) 자를 씁니다.
창절사(彰節祠)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 의하여 피살되거나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원래 장릉(莊陵) 경내에 있던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六臣祠)에서 비롯되었는데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이 개수하여 사육신과 함께 엄흥도(嚴興道)·박심문(朴審問)을 합사하여 팔현사(八賢詞)가 되었습니다. 그후 1698년 노산군에 대한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부터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있느냐는 논란이 일면서 170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709년 영월 유생의 소청으로 ‘육신사(六臣祠)’를 ‘창절사(彰節祠)’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고 1791년(정조 15) 생육신 중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을 추가 배향하여 10위의 위패를 모시면서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하였습니다.
난고 김삿갓의 고향
또한 영월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며 1807년(순조7년)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에서 출생하여 6세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다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투항한 것과 관련하여 폐족을 당한 후 황해도 곡산, 경기도 가평, 광주, 강원도 평창 등을 전전하다가 영월 삼옥리(三玉里)에 정착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병연은 20세 때 영월동헌에서 열리는 백일장에서 “홍경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규탄하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는 시험 제목의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조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상을 욕되게 하여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다고 삿갓을 쓰고 57세로 객사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하였습니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들른 곳이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로, 명소 적벽(赤璧)에 매료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훗날 그의 둘째 아들 익균이 영월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하였고,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 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줄기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으며, 이곳을 흐르는 곡동천 주변에 김삿갓 연구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난고문학관과 많은 돌탑이 조성되어 있는 김삿갓 묘, 작은 성황당, 김삿갓이 살던 집터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정조 태실 및 태실비(正祖大王胎室, 胎室碑)는 정조가 태어난 다음해인 1753년(영조 29)에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에 처음 만들어졌고 정조가 죽자 1800년(순조 1)에 가봉(加封)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으나 1929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이때 이곳의 태 항아리를 꺼내 갔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석회비료 광산의 개발로 유적이 매몰될 위기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 읍내 KBS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1997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
태실1호는 조선시대 팔각 원당형부도와 비슷한데 조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 난간을 돌렸고 태실2호는 원통형 석함이고 정상 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있습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며 비신의 앞면에는 ‘정조대왕태실(正祖大王胎室)’이라 쓰고 뒷면에는 ‘가경육년시월이십칠일건(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이라 새겼습니다.
법흥사와 보덕사
영월의 사찰은 법흥사와 보덕사가 유명합니다.
사자산(獅子山) 법흥사(法興寺)는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져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사리를 봉안한 후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사찰 이름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습니다.
이후 891년(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되었고, 944년(혜종 1)에 중건하였으나 다시 불타서 천년 가까이 소찰로서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적멸보궁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石函)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토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 징효국사부도(澄曉國師浮屠)와 <패엽경(貝葉經)>이 전해지는데 <패엽경>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인도에서 영라수(靈羅樹) 잎에 범어로 경전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본래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한 승려가 남쪽으로 가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澈鑒國師) 도윤(道允)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 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입니다.
징효대사탑비는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에 36행으로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 내용을 적고 있으며 비문 마지막에는 “천복구년세재갑진유월십칠일립(天福九年歲在甲辰六月十七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천복 9년’, 곧 고려 혜종 1년(944)에 부도비를 세웠으며, 보인(寶印)이라는 탑호를 받아 ‘징효국사보인지비(澄曉國師寶印之碑)’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징효대사부도는 높이 2.7m로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이 새겨진 장구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원당형의 몸돌을 얹고 모서리마다 귀꽃을 장식한 팔각의 지붕돌을 이고 있으며 몸돌 앞뒤에는 곽선을 두르고 자물통을 새긴 문비 조각과 상륜부에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남아 있으며 징효대사 부도비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습니다.
법흥사가 있는 사자산 일대를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福地)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보덕사(報德寺)는 686년(신문왕 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지덕사(旨德寺)라 하였고 1132년(인종 11)에는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 4성전(四聖殿), 염불암(念佛庵), 고법당(古法堂), 침운루(沈雲樓) 등을 증축하였습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되자 사찰 이름을 노릉사(魯陵寺)라 개칭하였으며 1705년(숙종 31)에는 한의(漢誼)와 천밀(天密)이 대금당(大金堂)을 건립하였고 영조 때는 장릉수호조포사(莊陵守護造泡寺)라는 장릉(莊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보덕사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그 후 거의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하고 방한 차림, 방한모, 장갑, 스틱, 아이젠, 스패츠,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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