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왜 기사화를 막으려고 하십니까?"
청와대 핵심 관계자와 한 출입기자가 1일 오전 청와대 기사송고실 안에서 주고 받은 언쟁이다. 전날 열렸던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토론내용의 기사화를 제지하려는 청와대 측과 이에 반발한 일부 출입기자들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진 것. 순간 기자실 내에선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실수'로 공개된 토론전문, 그리고…
문제는 비공개로 진행되는 업무보고 토론내용이 청와대 대변인실의 '실무적인 실수'로 지난 31일 오후 기자들에게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통상 각 부처 업무보고 과정에서는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공개된다. 세부적인 토론내용은 청와대 대변인실과 관계 수석실, 그리고 부처 간의 협의를 거쳐 필요한 경우 부분적으로만 공개된다. 그러나 금융위 업무보고 이후 공개된 자료에는 A4용지 10장 분량에 달하는 토론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실 관계자는 즉시 관련 자료를 내부 전산망에서 삭제한 뒤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이미 일부 언론이 당시 토론 내용 중 일부를 기사화한 뒤였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논의 끝에 이미 기사화된 내용은 제약없이 공개키로 하고 전문의 공개 여부는 1일 오전 중 금융비서관 등 책임있는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뒤 결정키로 했다.
그러나 1일 오전 기자실을 찾은 사람은 이동관 대변인이었다. 이 대변인은 "우리도 아직 정리가 안 돼 생긴 해프닝이었다"면서 "감출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오가는 대화가 그대로 여과없이 전해져 오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일종의 '비보도 협조'를 구한 셈이다.
이 대변인은 "내용 자체가 크게 문제되는 것이 많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며 "이번에 좀 흔쾌하게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일부 출입기자들이 재차 반발하고 나섰다. "중요한 게 아닌데 왜 기사화를 하려고 하느냐", "중요한 게 아니라면 왜 막으려 하느냐"는 언쟁은 이 과정에서 나왔다. 결국 이동관 대변인이 "이렇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어렵다. 잘 부탁한다"고 말문을 닫으면서 기자들과의 언쟁은 유야무야됐다.
직후 기자단은 자체 회의를 통해 이날 오후 3시를 기준으로 금융위 토론내용 전문을 제한없이 보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강만수 "10대 은행 하나는 있어야"…李대통령 "4월 중 논의하자"
그렇다면 "별로 중요한 게 없다"는 당시의 토론내용을 보자.
이 자리에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업은행 민영화와 관련해 "아시아에서 적어도 10대 은행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그 절호의 기회"라면서 "한 번 놓치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니까 심도있게 검토하고 최종방침을 확정하도록 하자"고 말했다.
강 장관은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동북아 3위 규모인데, 우리나라 최고은행은 (세계) 70위 정도"라면서 "키플레이어를 만들어야지 소규모 은행이 5~6개 있어선 아시아 금융허브도 오렵고, 국제시장의 자본을 조달하는 데 있어서도 어렵다"고 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규모 면에서의 경쟁력이 대두되고 있으니 4월 중 그 점도 검토해서, 우리은행이나 민간소유 은행 중심으로 해서 그 제안도 같이 포함해 논의를 하자"고 지시했다.
"특정 대기업과 관련있다는 오해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하지 못하면 한계에 묶여 늘 할 수 없다", "변화는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점진적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는 이 대통령의 독려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관련기사 : 李대통령, '금융규제'도 '전봇대 뽑기'식? )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은행 민영화, 그리고 금산분리 원칙의 완화, 산업자본의 은행소유제한 완화 등의 조치와 맞물려 '거대은행'의 설립에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얘기다. 이러한 기류 자체는 이미 전부터 거론돼 왔었다. "별로 중요한 게 없다"는 청와대의 반응 역시 그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추진원칙, 그 구체적인 논의일정 등을 대통령 이하 책임있는 정부당국자들이 직접 거론했다는 것의 의미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기사화가 필요하다"는 기자들의 반발은 그래서 제기됐다. 특히 일각에서는 이 문제를 금산분리 완화, 금융산업 구조조정 등에 팔을 걷어부치고 있는 당국의 움직임과 삼성을 비롯한 일부 대기업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금산분리 완화는 삼성이 주력 계열사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책임있는 관계자'들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이와 관련해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구체적인 플랜을 갖고 추진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김주현 금융정책과장은 "우리나라는 전략적으로 정부가 (금융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회사들을 따라가기 어렵다"며 "주요 금융회사를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충격을 줘 선도 금융회사를 만들겠다. 또 비금융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그룹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산업은행은 투자은행 중심의 국제적 은행으로, 우리은행이나 기업은행은 은행 중심의 국제적 플레이어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관계부처와 계속 협의하겠다"고 덧붙였다.
'프레스 프렌들리'라더니…왜 청와대가 대신 판단하나
통상 청와대는 사안의 민감성과 파장의 진폭에 따라 내용의 공개 여부와 그 범위를 제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국익이 직결된 외교적 문제나 대통령의 신변안전과 관련된 문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비보도 요청, 일정 시점까지의 보도금지(엠바고) 등 일종의 '룰'이 적용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자들 역시 대체적으로 이를 준수하려고 노력한다. 자체적인 가이드라인도 마련돼 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이 "별로 중요한 게 없다"는 식으로 '팩트'의 중요도를 대신 판단하는 건 월권이라는 지적이다. 비록 청와대측의 실수로 공개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기자들에게 알고 있는 내용을 모른 척 해달라는 주문 역시 청와대 측이 먼저 꺼낼 말은 아니었다는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 새 정부들어 유난히 불투명해진 청와대의 취재환경이 이번 사태를 부른 본질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지난 인수위 시절부터 '프레스 프렌들리'를 누누히 강조해 왔던 이명박 정부이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기자실 복원'을 들먹이며 이전 정부가 박아 놓은 '대못 뽑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취재가 안 된다"는 푸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수석들을 접촉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가까스로 통화가 되더라도 "답변드릴 수 없다", "나는 모른다"라는 답변이 되돌아오기 일쑤다. 비서관, 행정관, 사무관들도 마찬가지다. 재임기간 내내 언론과 충돌해 왔던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면서 등장한 '프레스 프렌들리'에는 이렇게 다른 겉과 속이 있었다.
청와대 기자들과 청와대 사이에서 벌어진 '금융위 업무보고' 사건은 '프레스 프렌들리'의 이같은 이중성에서 발생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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