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의 2월, 제47강은 한겨울의 빼어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며, 조선에게 가장 치욕적인 전란이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임금과 조정(朝廷)이 궁궐과 도성을 버리고 숨어들어 청(淸)나라와 피 말리는 항쟁을 치른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47강은 2016년 2월 14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남한산성 로터리주차장(버스종점)에서 모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남한산성도립공원> 홈페이지 <찾아오시는 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하차 후 2번 출구로 나와 9번 버스 승차. 문의 : 경기도 콜센터. 집합장소가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행궁→침괘정→영월정→숭렬전→연주봉옹성→서문→청량당→수어장대→매바위→남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북문→동장대터→봉암성→벌봉→신지옹성→장경사→동문→수구문→지수당→연무관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월 남한산성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조선(朝鮮)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훗날 청(淸)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後金)과 ‘형제의 나라’로 맹약을 하였으나 후금이 명(明)을 친다는 명분으로 지나친 요구를 해오던 중, 마침내 국호를 청이라 정하고 왕(王)을 제(帝)라 칭하며 사신이 와서 이를 통보하려고 하자 이들을 마나주지 않으니 청태종(淸太宗)이 직접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1636년(丙子年)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1636년 12월 12일 조정(朝廷)에서 청(淸)의 2차 침공 사실을 알고는 13일에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비빈(妃嬪)과 종실(宗室)은 강화로 피난하였고, 14일 임금의 수레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홍제원(弘濟院)에 이미 적진이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 1637년 1월 30일 인조(仁祖)가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西門)으로 나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禮]로써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한양의 궁궐로 돌아가기까지 청과 맞서 전쟁을 치렀던 회한(悔恨)이 서린 곳이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산성(山城)이란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과는 달리 전란과 같은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임금을 비롯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여 적과 대치하며 항전을 벌였던 곳으로 그곳에는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런 삶이 함께 했던 회한의 사연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의 입지적 특성에 대하여 심상규(沈象奎)가 쓴 <좌승당기(坐勝堂記)>에는 “한산(漢山)의 성(城)은 예부터 백제 온조(溫祚)의 도읍지로 일컬어져 왔는데 서북쪽은 깎아지른 듯한 협곡과 한수(漢水)로 막혀 있고 동남쪽은 영, 호남을 제어하고 경사(京師)를 막아낼 정도로 하늘이 만들어낸 산은 장자(長子)의 기상이요, 잔교(棧橋)와 검각(劍閣)과 같이 험한 형세는 앉아서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을 수 없는 땅”이라고 하였듯이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기보(畿輔)의 보장처(保障處)’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왔습니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남쪽 외성(外城)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백제(沸流百濟)를, 온조는 한강 유역에 한성백제(漢城百濟)의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비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나라가 없어져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한성백제로 합쳐졌습니다.
삼국 초기의 도읍 형태는 고구려가 그랬듯이 이성도읍체제(二城都邑體制)로서 한성백제도 그 방식을 따랐는데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두개의 도성으로 삼고, 동서남북에 도성을 외호하는 산성을 두어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아차산성(峨嵯山城), 서쪽으로는 수도산(修道山)에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 동쪽으로는 광주에 이성산성(二姓山城),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을 구축하였습니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정책으로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아차산성에서 전사하자 백제는 공주까지 남쪽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여 웅진백제(熊津百濟)를 열었고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 일대는 60여 년간 고구려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무찌르고 성왕까지 죽인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영토 확장정책으로 한강 유역이 신라의 땅이 되어 한산주(漢山州)라 하였는데, 특히 북쪽을 북한산주, 남쪽을 남한산주라 불렀고 당나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지금의 남한산성의 동봉에 산성을 구축하여 일장성(日長城) 또는 주장성(晝長城)이라 하였습니다.
2000년대 이후 진행된 행궁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주거지 8기와 수혈유구(水穴遺構)가 확인되었고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가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았다는 주장성(晝長城)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주목받다
삼국이 길항(拮抗)하던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남한산성을 차지하는 나라가 강국으로 성장하였는데 최종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그 이전의 주인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12목(牧) 중에 하나인 광주목(廣州牧)으로 승격하게 되고 이후 12목을 8목으로 줄일 때에도 광주목은 그대로 남았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읍지 한양(漢陽)을 외호하기 위하여 사방에 보(輔)를 두었는데 이른바 근기사진(近畿四鎭)이 그것으로, 광주(廣州)가 좌보(左輔), 원주(原州)가 우보(右輔), 수원(水原)이 전보(前輔), 양주(陽州)가 후보(後輔)로서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일본에게 승리한 조정은 산성의 효능에 대해 크게 고무되면서 고성(古城)이나 옛 성지(城址)를 수(修), 개축(改築)하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 수원 독성산성은 수축하였고 파주의 마산고성(馬山古城), 양주의 검암산고루(儉岩山古壘), 여주의 파사성(婆娑城), 죽산의 죽주고성(竹州古城) 등을 개축하였습니다.
한양을 방어하고 유사시 거점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가 요구되면서 남한산성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남한산성 수어책(守禦策)을 주장하였고 그로부터 3년 뒤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승군 60여 명으로 산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며 광해군 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石城)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인조 집권 2년 만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재개하여 공사 개시 2년 만에 남한산성의 개축공사가 완료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와서 한 달 반을 버티다가 결국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하게 됩니다.
팔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축성공사를 진행할 때 나라에서는 공사 책임을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에 이어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에 올라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고 있는 벽암각성(碧巖覺性) 선사에게 맡겼습니다만 동원된 승려들이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팔도와 지휘소를 포함해 아홉 곳의 사찰을 세웠는데 남한산성 내에 예전부터 있었던 장경사 뒤 기슭에 있는 망월사(望月寺), 북문 안 남쪽 기슭에 있는 옥정사(玉井寺) 외에 동문 북쪽에 장경사(長慶寺), 서문 안에 국청사(國淸寺), 지수당 옆에 개원사(開元寺), 개원사 동쪽 기슭에 한흥사(漢興寺), 서장대 아래에 천주사(天柱寺), 벌봉 아래에 동림사(東林寺), 사단(社壇) 오른쪽에 남단사(南壇寺) 등 7곳의 사찰을 더 짓고 개원사에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도총섭이 머물며 승군을 총괄했습니다.
9개의 사찰 중에 천주사, 남단사, 한흥사, 동림사, 옥정사 등 다섯 곳은 아직 복원되지 않아 주춧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석물(石物)들만 폐사지(廢寺址)에 뒹굴고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승군(僧軍)의 규모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 나오는 축성 이후 승군의 편제는 총섭(總攝) 1명, 승중군(僧中軍) 1명, 교련관(敎鍊官) 1면, 초관(硝官) 3명 기패관(旗牌官) 1명,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 의승(義僧) 356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거승군은 산성에 거주하는 승려이고 의승은 지방의 향승(鄕僧)을 차출한 승려로서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승번제(僧番制)가 폐지될 때까지 270여 년간 산성의 수비를 맡았으며 군사무기와 화약도 이곳 사찰에 저장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의 방위의 책임은 초기에는 도성 밖을 지키는 총융청(摠戎廳) 소속이었으나 남한산성을 새롭게 축성하고 나서 수어청(守禦廳)을 두어 도성 밖 북쪽은 기존의 총융청이 맡고 남쪽은 새롭게 신설된 수어청에서 맡았습니다.
수어청에는 전(前), 좌(左) 중(中), 우(右), 후(後)의 오영(五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北將臺), 후영장은 동장대(東將臺), 우영장은 서장대(西將臺), 그리고 좌영장도 동장대에 머물렀습니다만 지금은 서장대만 남아 있습니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된 독특한 형식
남한산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산성으로, 주봉인 청량산(淸凉山. 483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옹성(連珠峰甕城)과 동쪽의 신지옹성(信地甕城)을 둘러쳐 내성을 이루고 동쪽으로 봉암성(峰巖城)과 한봉성(漢峰城)까지, 남쪽으로는 신남성(新南城)까지 외성이 이어집니다.
외성이란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산성인데 봉암성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 병사들이 봉암성의 정상인 벌봉에서 성 안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내성의 보강 차원에서 동장대(東將臺) 부근에서 동북쪽 산줄기를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한봉성은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의 정상까지 구축한 외성으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봉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여 성안 곳곳에 포탄을 쏘아대며 성안을 유린하였기에 이러한 요충지를 적으로부터 미리 차단하기 위해 폐곡선(閉曲線)을 이루지 않고 일직선으로 연결된 독특한 형태로 성을 쌓았습니다. 신남성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1.5km 지점에 있는 검단산(黔丹山) 정상에 세워진 성으로, 내성과 마주보고 있어 대봉(對峰)이라고 부르며 이곳에 두 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뛰어난 조망의 전략적 요충지로 적의 척후활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남한산성에는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북문인 전승문(全勝門),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의 4대문이 있고 장대(將臺)는 동서남북 네 곳과 봉암성의 외동장대(外東將臺)를 합하여 다섯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장대(西將臺)인 수어장대(守禦將臺)만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본래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고 나머지 네 곳은 그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임금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를 하기 때문에 궁궐의 좌향(坐向)은 남향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동쪽은 왼쪽이라 좌익문이라 하였고 서쪽은 오른쪽이라 우익문이라 하였으며 빨리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정문(正門)인 남문은 지화문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쌓은 것을 옹성(甕城)이라 하는데 남쪽에 제1, 2, 3 옹성의 세 곳, 동쪽에 신지옹성(信地甕城), 북쪽에 연주봉옹성을 각각 하나씩 모두 다섯 곳에 설치하였는데 남쪽에 많은 옹성을 설치한 이유는 북, 동, 서쪽에 비해 남쪽이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포루(砲壘)는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로서 제1남옹성에 8개, 제2남옹성에 9개, 제3남옹성에 5개, 장경사 부근의 내성에 2개, 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에 2개, 봉암성에 2개 등 모두 30개의 포루가 있었으나 연주봉옹성의 포루 2개는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어 현재 28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치(雉)는 성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가까이 접근한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인데 제1남옹성, 제3남옹성, 연주봉옹성의 세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누각이 없는 문을 암문(暗門)이라 하는데 주로 군인들의 비밀통로로 사용되었고 남한산성에는 홍예문(虹霓門) 같은 아치형으로 된 것이 열 곳, 네모난 우물 정(井)자 형태가 여섯 곳에 있으며 암문의 번호는 최근에 동문에서 북문으로 차례로 붙여진 것입니다.
분지 형태의 남한산성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水源)이 풍부했으며 성내에는 국청사, 천주사, 개원사, 옥정사로부터 흘러내린 네 개의 계곡물이 지수당(池水堂) 부근에서 합류하여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동쪽으로 흘러가 동문인 좌익문 옆 성벽에 구축된 수구문(水口門)을 지나 성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봉수대(烽燧臺)도 두 곳에 있습니다.
도성의 격식 갖춘 행궁
남한산성에는 임금이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 세종의 능)과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참배하러 오갈 때 임시 머무는 곳인 행궁(行宮)을 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함께 세웠습니다.
행궁은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전국 20여 곳의 행궁들 중에 유일하게 종묘(宗廟)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사직단(社稷壇)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이 설치되어 도성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漢南樓)를 원래 있던 외삼문(外三門) 위에 누각으로 높이 세웠고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과 재덕당,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 등의 부속건물도 설치하였습니다.
임금이 머무는 상궐(上闕)은 내행전으로 73칸 규모이며 서쪽 담장 문을 통하여 좌승당(坐勝堂)으로 연결되어 있고, 154칸 규모의 하궐(下闕)은 외행전으로 상궐의 삼문 밖에 있으며 서쪽 담장 문을 통하여 일장각(日長閣)과 통하게 되어 있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행각(行閣)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곳 행궁은 병자호란의 중심에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해야만 하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격론과 지방수령과 군졸들의 이탈 상황에 대한 장계와, 산성을 지키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병졸들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12월 14일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를 비롯한 1만 2천여 명의 신하와 군졸과 양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으며 1월 중순에 이르자 양식이 떨어져서 새벽에는 닭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인조의 처절한 심정이 기록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새벽에 망궐례를 마친 인조가 때마침 내리는 눈비에 젖은 군졸들을 보며 “군민이 다 죽겠구나” 하며 한탄한 후 행궁 뜰에 나와 거적을 깔고 향을 피우고 네 번 절을 한 다음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날이 저물도록 하늘에 빌었다고 합니다.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되나 백관(百官), 만민(萬民)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게 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이렇듯 인조의 처절하고 비참한 회한이 서려 있는 행궁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수시로 찾아와서 머무르며 남한산성의 군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군사훈련과 무과시험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행궁 터에서는 백제시대의 주거지와 8기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고 하궐 동쪽에는 정면 12칸이 넘고 길이 50m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터와 한 장의 무게가 18kg이나 되는 암키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는 세 곳에 사당(祠堂)이 있습니다.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과 남한산성 축조의 책임자인 이서(李曙)의 위패를 함께 모셨으며, 청량당(淸涼堂)은 산성을 쌓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벽암각성(碧巖覺性) 대사와 동남쪽의 공사 책임을 맡았으나 그를 시기한 무리들의 모함으로 처형된 이회(李晦)와 남편을 따라 강물에 투신자살한 그의 부인 송씨(宋氏)의 위패를 함께 모셨습니다. 현절사(顯節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계속 항쟁할 것을 주장한 주전파(主戰派)로서 인조의 항복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처형당한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三學士)를 모셔 오다가 이후에 좌의정 김상헌(金尙憲)과 이조참판 정온(鄭蘊)의 위패도 함께 모셨습니다.
침괘정(枕戈亭)은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王宮址)로 전해지고 있으나 산성을 수축할 당시 수어사인 이서(李曙)가 건물터를 발견하였는데 무기고 또는 무기제작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무관(演武館)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그 중에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한양으로 보냈다고 하며 연무당(演武堂)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연병관(練兵館)’이란 편액을 내렸으며 정조 때는 수어영(守禦營)이라 개칭하였으나 지금은 연병관(練兵館) 또는 연무관(演武館)이라 부릅니다.
지수당(地水堂)은 1672년(현종 13)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가 엄고개에 주정소(晝停所)를 새로 지으면서 폐목재를 옮겨와서 건립하였는데 정자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연못이 3개가 있었으나 정자와 연못 2개는 남아 있고 연못 하나는 밭으로 변했으며 남학명(南鶴鳴)이 지은 <지수당기(地水堂記)>에는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방한차림, 방한모, 장갑, 스틱, 아이젠,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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