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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시련'…'형님'을 어찌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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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시련'…'형님'을 어찌하오리까?

개입도 방관도 못하고 뒷수습도 장담 못해

한나라당의 전방위적 내홍사태를 두고 청와대와 이명박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선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표와의 갈등은 어차피 여권 주류 교체 과정에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치부하더라도 '믿는 도끼'인 수도권의 직계 출마자들이 "이상득 부의장은 물러나고 청와대 인사 책임자도 문책하라. 청와대는 대국민사과에 나서라"며 발등을 찍은 게 적이 당황스러운 눈치다.

23일 청와대 회동 이후 다시금 '출마' 쪽으로 입장을 바꾼 이재오 의원은 24일 오후 서울 모처에서 장고 중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안팎에선 결국 이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될 것이라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어있다. 이상득 부의장의 용퇴 압력을 위해서라도 이 의원이 불출마는 전제조건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의장은 출마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형님 친구'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도 임명장만 기다리고 있다. 이 부의장의 자리 보전용으로 중국, 일본 대사 자리도 비워놓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거세다. '이상득 암초'가 순조롭게 해결되지 못할 경우 자칫 당·정·청이 총체적 난국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를 탓하랴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 과반의석 확보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대선 직후만 해도 고공행진을 하던 자신의 지지율에 총선결과가 수렴할 것이 분명해 보였고 압승은 따놓은 당상 같았다.
▲ ⓒ문화체육관광부

그런데 인수위 시절을 거쳐 집권 한 달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 당내 권력투쟁, 총선 민심의 이상기류 등은 이명박 정부의 위기와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이 대통령이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총선 공천에 대한 불만은 내부에서 연소됐을 터이고 수도권 직계들은 친위부대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이처럼 각종 문제가 청와대에서 비롯됐다는 게 이 대통령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원인이다. 수도권 직계들의 '반란'을 당장 수용하기는 어렵다. 집권 한 달도 안된 시점에서 여당의 공세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건 당청관계의 첫단추가 대단히 잘못 끼워지는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형님'을 안고 가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수도권 직계들은 행동 수위를 한층 더 높일 태세다. 칩거 중인 이재오 의원의 단독 불출마 선언이 나온다면, 이건 대규모 반란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전날 이상득 용퇴론을 일축했던 강재섭 대표도 이날 방송토론회에서 "이상득 부의장이 알아서 할 것으로 본다"고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정무기능 상실한 청와대

'여의도 정치'에 부정적인 이 대통령이 청와대를 '업무 중심'으로 재편해놓고 당무에 대해선 일정 정도 거리를 두도록 짠 것도 급한 상황에 대응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무적 능력에서 의심을 산 유우익 대통령실장이나 박재완 정무수석에게 난국타개 책임을 맡기기도 어렵다. 여권을 담당하는 장다사로 정무1비서관은 이상득 부의장의 보좌진 출신인 탓에 아예 기피 인물이다.

23일 강재섭 대표는 불출마 기자회견 이후 기자들 앞에서 이 대통령과 나눈 전화 내용은 이 대통령과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로서의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대통령의 만류에 강 대표는 공손한 말투였지만 "아닙니다. 그대로 불출마하겠습니다"라고 굽히지 않았다.

한나라당이나 청와대 주장대로 이 통화가 조율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이 대통령은 당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사전에 모르고 있었거나 뒷북을 치는 역할만 한 셈이다.

적어도 공천 갈등이 권력 게임으로 비화된 이상 이 대통령이 여권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다. 믿었던 당내 직계는 반기를 들었고, 그렇다고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1971년의 박정희와 2008년의 이명박

지난 1971년 10월 공화당의 핵심인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 등 이른바 '4인방' 항명사건과 현 상황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들은 3선 개헌 과정에서 걸림돌이던 김종필계를 쳐내는 데 앞장섬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공화당을 좌지우지 하던 '4인방'으로 꼽혔다. 이들은 당시 신민당이 각료 해임안을 제출하자 자신들의 실력을 박 대통령에게 과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들은 1971년 10월 2일 해임안이 올라온 각료 가운데 김종필계인 오치성 내무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당장 이들을 연행해 치욕스러운 고문과 함께 개인 비리를 털었고 이들은 정계를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2인자 그룹을 모두 거세한 박 대통령은 이듬해 10월 유신 체제를 열어젖혔다. 이 대통령이 1971년의 박정희 대통령처럼 '반란'을 진압하고 직계들을 꿇어앉힌다면 5년간 당청관계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2인자 그룹의 발호라는 상황은 지금과 그 때가 유사하지만, 이 대통령이 '절대권력'이 아니라는 게 큰 차이점이다. 이 대통령에게는 중앙정보부도 없고 이후락 부장도 없다. 직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방법은 정치력과 통치력의 조합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민주화시대의 당청 관계다. 하지만 그 길은 현재로선 '형님 퇴진'으로 연결된다. 제3의 선택지는 없다.

문제는 이상득 부의장을 퇴진시킨 이후의 그림이 청와대에 있느냐다. '이상득 논란'이 발등의 불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서 이렇다 할 시그널이 감지되지 않는 건 권력 내부 관리에 대한 '액션 플랜'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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