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丙申年) 새해 첫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27강으로, 역사적으로 강화도(江華島)의 방어진지였으며 지금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이면서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된 <김포고을>을 찾아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7강은 2016년 1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7시 45분 서울지하철 2번, 6번 합정역 8번출구 홀트아동복지센터 앞에서 중간정차 합니다. 이곳 이용하실 분은 참가접수시 탑승지 알려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김포읍(김포향교/우저서원/장릉)-양촌읍(대포서원/양성지 묘역 및 신도비/수안사)-대곶면(덕포진/손돌묘)-점심식사 겸 뒤풀이(대곶면 <주막보리밥>)-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문수산성-문수사-통진읍(통진이청/통진향교/선정비)-한재당-애기봉-장만유적지-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7강 답사지인 <김포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강화도를 지켜라”
김포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염하(鹽河)라 불리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와,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祖江) 건너 북한의 개풍군과, 북동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양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천, 동쪽으로는 서울과 맞닿아 있습니다.
김포에서 서해로 숨어드는 한남정맥은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금북정맥(錦北正脈)과 갈라져 나와 경기도의 한강 본류와 남한강 남쪽 유역의 분수령(分水嶺)을 이루며 천안, 평택, 오산, 수원, 안산, 시흥, 인천을 거치며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김포로 접어들어 가현산(歌絃山), 필봉산(筆峰山), 학운산(鶴雲山)을 지나 문수산(文殊山)에서 크게 솟구치고 마침내 서해(西海)로 숨어듭니다.
김포는 서해와 한강을 곁에 두고 있어 조운(漕運)과 수산업(水産業)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갯벌과 한강 하류의 퇴적층이 부려놓은 비옥한 땅 때문에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되어 쌀 생산지로서 그 명성을 떨쳤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김포 ‘금쌀’이 유명하며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 최초의 벼농사 재배지로 비정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으로 김포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설치되었으며 지금도 분단된 조국의 최전선으로 군부대의 방어시설이 많이 들어 서 있습니다.
김포의 관방시설은 과거에는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도(江都)인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대부분 강화도와 접한 염하(鹽河)라 불리는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김포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376m)에 1694년(숙종 20년)에 축성된 산성으로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로서 그 이름은 신라 혜공왕(765∼780) 때 창건된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에서 유래됐으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는 한강과 서울의 삼각산, 서쪽으로는 멀리 인천 앞바다, 북으로는 개풍군이 한눈에 바라다 보입니다.
유서깊은 문수산성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과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었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어 해안 쪽 성벽은 없어져 그곳에 마을이 들어섰으며, 총 6km에 이르는 산성 중 4km의 성곽만 남았고 서문과 북문이 복원되었습니다.
수안산성(守安山城)은 김포시 대곶면의 수안산(燧安山)에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수안산의 이름은 정상에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있어 붙여졌으며, 그래서 수안산성(守安山城)을 수안산성(燧安山城)이라고도 씁니다.
수안산성은 강화도와 마주보며 육지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산성의 둘레는 578.5m, 성벽은 남쪽에만 일부 남아있고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외부에 돌을 쌓는 축조방법을 썼습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신라가 진흥왕(眞興王) 때 한강 하류 지역을 장악하고 쌓은 성으로 추정되며 성 안에는 4개소의 건물지(建物址), 그리고 문지(門址)와 치성지(雉城址)로 추정되는 시설물이 남아 있습니다.
수안산(守安山) 봉수대는 조선시대 김포에 설치했던 5개의 봉수 중의 하나로서 바다 건너 강화도의 대모산(大母山)에서 받은 경보(警報)를 월곶면의 남산(南山), 대곶면의 수안산(守安山), 검단면의 백석산(白石山), 김포1동의 냉정산(冷亭山), 양천의 개화산(開花山)등 5개소의 봉수대를 연결하면서 서울의 목멱산 경봉수(京烽燧)에 전달했는데 당시 이곳에 주둔하던 봉수군은 103명으로 그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덕포진(德浦鎭)은 강화만(江華灣)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에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軍營)으로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서구열강과 치열하게 싸웠던 격전지로, 지금은 포대(砲臺)와 파수대(把守臺)가 복원되어 있으며 그 끄트머리에 고려시대 뱃사공인 손돌(孫乭)의 묘가 있습니다.
뱃사공 손돌의 죽음
손돌은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입니다.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려 하자 손돌은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워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으며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로 이곳 험한 물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石築路)는 김포 성동리와 강화군 갑곶리 사이를 배편으로 연결하던 나루터이며 갑곶이라는 명칭은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당하여 강화도로 몽진할 때 이곳이 대안(對岸)과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곳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인조가 건넜던 곳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수어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격전을 치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다가 조선 초기 박신(朴信)에 의하여 최초로 석축로가 축조되어 일제 강점기 때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어 오다가 1920년경에 김포 성동리와 강화 선정리에 새로운 나루터가 신설되면서 옛 나루터는 폐쇄되었습니다. 해방 후 옛 나루터 부근에 선박으로 자동차를 나르는 나루터로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된 후 두 나루터는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애잔한 애기봉 전설
조강(祖江)을 굽어보며 서부전선 최전방에 솟아 있는 애기봉(愛妓峰)은 군부대가 상주하는 방어기지로, 최근에는 등탑의 철거문제로 남북이 긴장국면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이름에 깃들어 있는 전설은 애잔하기만 합니다.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기생 애기(愛妓)는 북쪽 오랑캐의 침략으로 감사를 따라 한양으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개풍군에 이르러 감사는 오랑캐에게 잡혀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했으나 소식은 오지 않고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 정상에 올라 임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했는데 애기의 유언대로 쑥갓머리산 정상에 묻어주고 그때부터 애기봉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김포는 역사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鼎立)하고 있었을 때 삼국의 각축장이었고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검포(黔浦)’라는 지명으로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신라 때 김포(金浦)로 고쳐 썼는데 아마 그때 신라는 김(金)씨 왕이 통치하던 시기라서 지명에 ‘김’자를 사용한 것이리라 조심스럽게 추정해 봅니다.
신라 경덕왕 원년에는 한주(漢州)에 속한 김포반도를 김포현, 분진현, 동성현, 수성현, 공암현으로 나누었고 고려 성종 때에는 관내도(關內道. 지금의 경기, 황해지역), 현종 9년(1018)에는 수주(樹州 부평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82)에 김포가 분리되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신종 원년(1198)에 어태(御胎)를 이곳에 묻은 뒤 현령(懸鈴)을 두었습니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에 양천현을 합병하여 금양현(金陽懸)으로 했으며 다시 분리하여 양천은 금천(衿川. 지금의 시흥), 김포는 부평부에 속했으며 인조 10년(1632) 북성산(北城山)에 장릉(章陵)을 모신 후 김포현을 군으로 승격시켰고, 고종 32년(1895)에 인천부에 속하는 군이 되었습니다.
통진, 월곶 일대에 있었던 평회압(平淮押)현은 신라 경덕왕 때는 분진현으로 고쳐 장제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 통진현으로 고친 다음 공양왕 3년(1391)에 동성, 수안 두 현을 합병하여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숙종 20년(1694)에 통진부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32년 다시 통진군이 되었습니다.
옛 동자홀현과 수이홀현은 경덕왕 때 각각 동성현, 수성현으로 개명된 뒤 고려 초 수성현은 수안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 통진현에 병합되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양천 땅의 옛 고을 제차파의현은 경덕왕 때 공암현으로 되었고, 고려 현종9년(1018)에 수주에 속했다가 충선왕 2년(1310) 다시 양천으로 회복되어 현령을 두었으며 조선 태종 14년 김포에 합쳐서 금양현이라 했다가 고종 32년에 비로소 군으로 승격하여 인천부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포, 통진, 양천군이 '김포군'으로 통합되었다가 양천군은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처럼 김포지역에는 김포와 통진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김포의 읍치구역에는 김포향교(金浦鄕校)가 유일하게 남아있는데 고려 인종 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으며 1960년대 와서 여러 차례 보수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이고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후기 소설위(小設位)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재실(齋室)과 출입구 구실을 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습니다.
인조 생부 원종(元宗)의 장릉(章陵)
김포의 읍치구역 뒤편으로 조성된 장릉(章陵)은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비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의 능으로,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으로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가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승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으며 1627년 김포현의 성산으로 천장했고, 1632년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원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습니다.
인헌왕후는 아들(인조)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啓雲宮)이라 했으며 1626년 49세로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했으며 이곳으로 다시 천장하면서 원호(園號)를 흥경원이라 합쳐 불렀습니다.
통진의 읍치구역에는 이청(吏廳)과 향교가 전해지고 있는데 통진이청(通津吏廳)은 조선시대 통진부의 이청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869년에 부사 백낙선(白樂善)이 중수했고 3·1운동 당시에는 주재소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경기도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관아건축인 평택의 팽성객사, 안성의 안성객사, 양주의 양주관아지와 함께 경기도 관아건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통진향교(通津鄕校)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고 일제 강점기에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그 기능을 되찾았습니다. 건물 배치는 정문인 풍화루(風化樓)를 지나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가 있으며 뒤쪽에 배향공간인 대성전을 둔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으로 17세기 말의 건축물로 추정되며 경기도의 향교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우저서원(牛渚書院)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인조26년(1648)에 창건되어 숙종 원년(1675)에 사액(賜額)되었으며 중봉의 구저지(舊邸地)에 세워진 목조 단층 와즙(瓦葺)건물로 본당, 외삼문, 비각, 내삼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임진4충신(壬辰四忠臣) 조헌의 출생지
조헌은 본관이 백천(白川), 아호(雅號)는 중봉(重峯), 자(字)는 여식(汝式), 시호(詩號)는 문열(文烈)이고 중종 39년(1544)에 김포시 감정동에 출생하여 선조25년(1592)에 순절(殉節)하였는데 관직(官職)은 보은현감이며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증직(贈職)하였습니다
선조5년(1586)에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서 상소하여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程文)을 세워 표충(表忠)할 것을 청하였으며 선조19년(1586)에는 공주제독(公州提督)으로 있으며 다시 상소를 올려 율곡(栗谷) 선생을 변호하고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통박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내려갔습니다.
선조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였고 홍성으로 옮겨가 의병을 모집하여 승장(僧將) 영규(靈圭)의 군사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며 다시 영규와 함께 전주에 내려가 700명의 의사를 얻어 금산으로 향하던 중 금산 10리 밖에 이르러 역습해 오는 적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조헌, 영규 이하 700의사가 모두 순절하였는데 그곳에는 지금 ‘700의총(義塚)’의 무덤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헌은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壬辰四忠臣)으로 일컬어집니다.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는 마을에는 동쪽으로 흘러 한강 본류에 이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아 나룻배나 어선들이 접안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습니다.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나루터[甘岩浦]'라 부르는데 중봉 대감이 노닐던 곳이라 ‘대감바위’라 부르던 것이 감바위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조정은 당쟁에 휩싸여 왜의 침략에 대응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중봉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하여 이곳 감바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장차 닥쳐올 왜구의 침략에 분개하고,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대신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근심어린 심정을 시조로 남겼습니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沙工)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양성지, 이목, 장만의 발자취
대포서원(大浦書院)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양성지(梁誠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우(祠宇)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송파(松坡)이며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이후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했고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동국지도(東國地圖)> 등을 찬진(撰進)했습니다.
또한 세조 9년(1463)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케 했고 10조의 상소문을 올려 학문 발전을 꾀하도록 했으며 예종1년(1469)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홍문관제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며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성종2년(1471) 좌리공신3등으로 남원군에 봉해진 후 대사헌(大司憲), 성종12년(1481) 홍문관 대제학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습니다.
정조15년(1791)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그 제안자인 양성지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서원 건립을 하명하여, 출생지에 월곡서원(月谷書院)이 창건되었으며 만년(晩年)을 지낸 통진(通津)에 서원 건립을 주선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고 1973년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 밑에 사우를 창건하였는데 그곳 지명(地名)을 따서 대포서원(大浦書院)이라 했습니다. 양성지의 묘(墓)는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중종 때 김안국(金安國)이 짓고 이조참의 김희수(金希壽)가 썼습니다.
한재당(寒齋堂)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28세의 나이로 화를 입은 한재(寒齋) 이목(李穆)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1849년에 건립된 구사당과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이 있으나 신사당 건립으로 구사당은 담장만 남아있으며 신 사당에는 숙종 43년(1717)과 경종 2년(1722)에 추증한 교지가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목은 성종2년(1471)에 출생하여 일찍이 점필제(點畢齊)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연산군 1년(149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澮)를 겸했다가 연안도 평사로 나갔다가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으나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의 시를 짓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목은 다산 정약용보다 291년, <동다송(東茶頌)>을 쓴 초의선사보다는 315년 먼저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장시(1,332자)인 <다부(茶賦)>를 1495년(24세)에 저술하였으며 그래서 그를 ‘다부(茶父)’ 또는 ‘다선(茶仙)’이라 추앙하고 해마다 한재당에서 헌다례(獻茶禮)를 지내고 있습니다.
<다부>에는 차를 마셔서 생기는 좋은 점을 오공(五功), 육덕(六德), 칠수(七修)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차의 다섯 가지 공[五功]은 첫째, 독서에 열중할 때 목마름을 달래주고 둘째, 마른 창자와 답답한 가슴의 울적함을 달래주며 셋째, 손님과 주인 사이에 다정한 정담을 나누게 해 주며 넷째, 뱃속의 중독에 대한 해독으로 소화가 잘 되게 하며 다섯째, 숙취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차의 여섯 가지 덕[六德]은 첫째, 오래 살게 하며 둘째, 병을 낫게 하며 셋째, 기운을 맑게 하며 넷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다섯째, 선인이 되게 하며 여섯째, 예의를 바르게 합니다.
차의 일곱 가지 효능[七修]은 한 잔을 마시니 마른 창자가 씻겨 내리고, 두 잔을 마시니 마음과 혼이 상쾌해지며, 세 잔을 마시니 두통이 사라지고, 넉 잔을 마시니 웅장하고 큰 마음이 근심과 울분을 날려버리며, 다섯 잔을 마시니 색마가 도망가고 탐욕이 사라지고, 여섯 잔을 마시니 해와 달이 방촌에 돌며, 일곱 잔을 반도 비우기 전에 울금향이 옷깃에서 베어난다고 하였습니다.
통진 출신인 장만(張晩)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선조 24년(1591)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형조와 예조 좌랑, 지평, 봉산군수, 도승지를 지내고 두 차례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고, 선조 40년(1607) 함경도 관찰사로 만주족의 침입을 경고하고 그 방어책을 상소했으며 이어 평안도 병마절도사, 호소참관, 지중추부사를 역임했습니다.
그 뒤 체찰 부사가 되어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대 후금정책(後金政策)을 협의했고, 광해군 14년(1622) 병조판서로 대북(大北)의 난정을 거론,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고향에 은거했다가 인조반정 후 팔도도원수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진무공신 1등에 보국숭록대부와 옥성부원군에 오르게 되었으나 인조 5년(1627), 병조판서로 정묘호란을 막지 못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이전에 세운 공로로 용서를 받고 복관되었으며 영의정을 추증하고 통진 향사에 제향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하고 방한 차림, 방한모, 장갑, 스틱, 아이젠, 스패츠,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9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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