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 성(福建省) 취앤저우(泉州)는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자 한때 중국 최대의 대외 무역항으로'동방제일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취앤저우의 찬란한 역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의 취앤저우는 국제 도시 상하이나 광저우 등과 비교할 때 턱없이 초라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기업의 투자 진출 또한 크게 왕성하지 않은 지역이다. 푸젠 성에서는 오히려 샤먼(夏門)이 훨씬 더 알려져 있다. 취앤저우가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다는 사실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해상 실크로드보다는 시안(西安)을 기점으로 하는 육상 실크로드가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맥과 황량한 사막을 건너는 이 육상 교통로를 통해 중국과 서방은 끊임없이 교류했다.
또 이 유일한 동서양 간 교통로를 보다 멀리까지 지배하기 위해서 중국의 각 왕조는 무진 애를 썼다. 그러하니 우리의 기억 속에는 자연스럽게 육상 실크로드만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송나라 때 이후부터는 육상 실크로드는 지고 해상 실크로드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송나라 때에 와서 해상 실크로드가 동서양 간 무역의 중심 교통로가 되었을까? 서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 약화와 해상 항해술의 발달을 꼽을 수 있겠다. 사실 육상 비단길은 높고 험준한 산맥과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 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망망한 모래사막에서는 해를 보고 방향을 정하고 흩어진 사람의 뼈를 보고 행로를 찾았다고 한다.
당나라 말기 서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자 그렇지 않아도 험난하기 짝이 없는 이 교통로가 치안까지도 불안하게 되었다. 자연히 캐라반이라고 불리는 대상(隊商)들의 이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당나라 말기 조선 기술이나 항해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해상의 수송 능력이 육상에서 낙타의 수송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연히 해상 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동서양 간 교역의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취앤저우(泉州)
해상 실크로드가 정착되자 인도인, 페르시아인, 아랍인을 비롯한 이슬람계 상인들이 물밀 듯이 중국으로 몰려갔고, 중국의 상인들도 큰 상선을 운항해서 인도양이나 페르시아로 진출해서 활발하게 동서무역을 전개했다. 이 당시 광저우에 들어 온 외국 상선이 연간 약 40척에 달했다는 보고서를 통해서도, 또한 지금까지도 광저우와 취앤저우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흔적을 가지고도 당시 해상 실크로드의 활약상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은 특히 송나라 때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항구 또한 취앤저우가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원나라 때에 가서는 광저우를 밀어내고 중국 최대의 대외 무역항이 되었다. 지금의 면모로 보면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는 취앤저우를 사치품, 고가의 보석, 엄청나게 큰 진주를 가득 실은 인도 선박이 연속해서 들어오는 항구로 소개했다. 심지어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더불어 중국의 취앤저우 항구가 세계 최대의 두 항구 중 하나라고 전했을 정도로 취앤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큰 항구로 자리매김했다. 또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기점으로서 역할 했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당시 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금, 은, 동전, 도자기와 견직물이 위주였다. 또 서방으로부터의 수입품은 향료, 주옥, 상아, 물소 뿔과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동안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던 비단 외에도 도자기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송대는 땔감과 유약의 발달로 인해 도자기의 발전이 비약적이었다. 지금도 송대의 도자기는 그 값이 천문학적 숫자이다.
송대의 도자기는 아시아는 물론 서방에까지 널리 이름난 인기 상품이었다. 1970년대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진 도자기들도 송대 도자기다. 심지어 동아프리카에서도 송대의 도자기가 발견된다 하니 그 교역 범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상 실크로드가 송대의 도자기를 세계의 도자기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해상 실크로드를 '도자기의 길'이라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 중심적 사고의 반성
우리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실크로드의 기점과 중심을 중국의 어느 지역으로만 생각한다. 동방의 중심을 중국으로 생각하니 동서양 간 교류의 중심과 동양 쪽 기점 역시 자연스럽게 중국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서 행해진 동서양 간 교역 활동을 짚어본다면, 한반도가 당시 육상, 해상 실크로드의 동일선상에 위치했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는 대단히 개방적인 나라였고 실제 실크로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서방에 진출했던 흔적을 여럿 갖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박물관에는 당시 대상(隊商)들 모습을 그린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에는 당시 신라인의 복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신라인이 실크로드를 통과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물론 다양한 방증의 자료가 더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실크로드의 기점이 중국의 시안이 아니라 한반도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에 설득력을 더한다.
육상 실크로드뿐이 아니다. 해상 실크로드 역시 중국에서 시작해 서방으로 통한 것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기점이라고 소개되는 중국 푸젠성의 취앤저우 일대, 중국의 남동쪽 해안 상업 도시에서는 고려 관련 명칭이 들어간 지명이나 사적, 상품 및 성씨들이 다수 존재한다. 비록 문헌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해양 강대국으로서의 고려를 인식하는데 제한적이긴 하나, 고려 역시 동서양 간 해상교류의 대열에 주도적으로 합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증거들이 더욱 보강된다면 육상이든 해상이든 실크로드의 기점을 한반도까지 끌고 오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동서양 간 교류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주도적 위치를 찾아주자는 것이다. 최근 러시아, 중국, 한반도가 참여하는 현대판 실크로드의 구축이 구체화되고 있다.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주도적 참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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