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병신년(丙申年)을 맞습니다. 모두 다복하시고 특히 이웃과 복 많이 나누십시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역사지리전문가)는 2016년 1월, 제46강으로 서울 도심에 새겨진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 전까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섭니다. 이번 답사는 그동안 산을 오르내리느라 고생 많았던 서울학교 학생들에게 평지, 그것도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동네 한 바퀴 돌아보는, 부담 없는 코스로 잡았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제46강은 2016년 1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세종로 교보빌딩 정문 옆 에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세종로)-황토현-성공회성당-원구단-덕수궁-정동교회-배재학당-정릉터-손탁호텔-중명전-이화학당-러시아공사관터-상림원터-흥천사터-돈의문터-경교장-점심식사 겸 뒤풀이(한옥집)-서지터-영천시장-독립문-모화관-서대문역사공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의 유적들>에 대해 들어봅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탄생
19세기 말엽 조선은 안동김씨 45년, 풍양조씨 15년의 60년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왕권은 그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는 한편, 백성들의 피폐한 삶이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어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는 정치상황에 놓입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였고, 서구열강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행사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 5백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事大]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킵니다. 그로써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실패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인 건양(建陽)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립니다. 이후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조선침략이 힘들어진 일본이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면서 고종은 그동안 머물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을 과감히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합니다.
1년 정도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합니다. 그런 다음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圓丘壇)을 세우는 한편, 1897년 10월 12일 그곳에서 황제즉위식을 올려 드디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열강에게 핍박받는 국제정치적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열강은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영토에서 자국의 이권을 관철시키려는 여러가지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더욱이 대한제국의 법궁(法宮)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사관 또는 선교사들의 숙소와 교회로 잘려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아예 경운궁을 복원이 어렵도록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칭제건원의 황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때 경운궁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장도 살펴보고 해방공간에서 분단이 아닌 자주독립의 노선을 걸었던 백범 선생께서 환국 이후 거처하다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경교장(京橋莊)과 수많은 독립투사를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교수형에 처한 서대문형무소까지 발걸음이 이어질 것입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圓丘壇)을 만듭니다. 그곳에서 1897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했습니다.
원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이르며, 천단(天壇), 원단(圓壇)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였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成宗) 때부터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世祖)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시대 말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비로소 천자로서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어 원구단이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둥근 모양의 원구단과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는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 그리고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세웠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원구단에 경성철도호텔을 지어 그 원형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호텔은 지금까지 ‘조선호텔’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는데 원구단은 없어지고 황궁우와 정문인 삼문(三門), 그리고 석고단이 호텔 한 귀퉁이에 옹색하게 서 있습니다.
또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耆老所)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있는 비전(碑殿)이 그것입니다. 비(碑)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로 황태자 순종(純宗)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壬寅年 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지 40년이 되며 보령(寶齡)은 망육순(望六旬)이 되어 영수각(靈壽閣.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에 참배하고 기로소(耆老所)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칭송비 둘레에는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保護閣)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기념비전(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습니다. 보통 비각(碑閣)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殿)’자를 사용한 것이 특색입니다. 기념비전 앞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를 세우고 조선의 도로 기점(起點)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조선일보사 앞으로 옮겨 있습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蒙塵)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기거한 임시 거처입니다. 도성에 돌아와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자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는 성종의 손자인 계림군(桂林君)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 편입해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時御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조판서 이항복이 그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길가까지 넓히고 동족과 서쪽에 목책을 세운 뒤 문을 내어 다시 담장을 둘러치고 북쪽에 별전(別殿)을 새로 영건(營建)하여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때부터 이곳을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으로 불렸으며, 선조는 행궁에서 16년간 지낸 후 승하하고 뒤를 이은 광해군은 그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지은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경운궁으로 유폐되었을 때에는 ‘서궁(西宮)’이라 불렀습니다.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反政)에 성공한 인조가 그곳에서 등극하고 바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선조가 거처하던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한 땅을 본디 주인에게 돌려주어 초라한 규모로 전락한 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을 머물면서 경운궁에 많은 전각을 다시 짓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다시 궁궐로서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강력하게 퇴임 요구를 하자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줍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운궁이 덕수궁 된 사연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전환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 경운궁의 일부가 훼손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열강의 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성공회성당, 구세군 본관 등 종교시설과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개화기의 교육시설이 그것입니다.
그 지역을 특히 정동이라고 하는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태조가 즉위한 후에 신의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태조가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하여 왕후가 죽자 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가까운 곳에 왕비의 영혼을 달래줄 흥천사(興天寺)라는 사찰을 170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 묘를 도성 밖 외진 곳인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으며 방치하여 일반인의 묘와 다름이 없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묘를 옮기니 흥천사도 함께 옮겼는데 170여 칸에 이르는 사찰 목재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의 부속건물들을 짓는데 사용됐습니다. 흥천사 동종은 영조 때 경복궁 광화문에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창경궁으로 옮겨진 뒤 고종 때 덕수궁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흥천사터는 옛 경기여고 자리와 덕수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됩니다.
왕후의 묘에 세워졌던 석물(石物)들도 훼손되어 병풍석(屛風石)은 광교를 중건하는 석재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땅에 묻었다고 하니 정릉 자리인 미국대사관저가 옮겨졌을 때 그곳을 파보면 석물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덕왕후의 묘는 옮겨갔으나 그 이후로 그 지역을 정릉이 있던 곳이라 ‘정동’이라 불렀으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대사관저와 옛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중명전(重明殿)이라 불리는 멋진 근대식 건물 하나가 골목 안 깊숙이 숨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입니다. 본디 그 자리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 터에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할 때 주변 땅을 경운궁 권역에 포함시키고 궁궐도서관인 중명전을 세운 것입니다.
고종은 중명전을 짓고 도서관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외국 사신도 알현하고 때로는 연회장으로도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한 헤이그밀사를 파견하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소실이면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한 사교계의 여왕 배정자(裵貞子)가 한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에는 서대문 사거리로 넘어가는 얕은 고갯마루가 있는데 그곳이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敦義門) 자리입니다. 도성 서쪽 대문은 처음에는 운종가와 일직선상에 있는 지금의 서울교육청 어름에 ‘서전문(西箭門)’이란 이름으로 서 있었습니다만 지대가 높아 백성이 다니기에 불편하여 약간 아래로 내려온 곳에다가 새로 문을 내고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의문은 새로 낸 문이라고 새문(新門)이라고도 불렀고 지금은 새문안교회 또는 신문로(新門路) 등 교회와 도로 이름에 명칭이 남아있습니다.
돈의문터 바로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께서 살았던 경교장이 강북삼성병원에 파묻혀 왜소하게 남아있습니다. 경교장은 원래 금광업자 최창학의 소유였으나 친일행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습니다. 백범 선생은 그곳에서 반탁운동과 통일운동을 주도하다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을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거처가 공교롭게도 서쪽과 북쪽과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백범은 서대문의 경교장(京敎莊)에서, 김규식은 삼청동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이승만은 동대문의 이화장(梨花莊)에서 길은 다르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서대문 골목 안에 있는 오래된 맛집인 ‘한옥집’에서 김치찜과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고 한양의 경치 좋은 다섯 곳 중의 하나로서 연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서지(西池)의 옛터인 금화초등학교을 지나 재래시장인 영천시장을 둘러보고 사대(事大)와 독립(獨立)이 공존하는 독립문공원을 지나 독립투사와 민주인사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던 서대문형무소를 천천히 둘러볼 예정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보온 차림, 방한모, 장갑,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참가비는 5만5천원입니다(강의비, 관람료,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현장에서는 참가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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