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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다스림(修己)'이 모든 것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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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다스림(修己)'이 모든 것의 근본

[탁오서당] <명등도고록> 제5장

용건의 말이다.

"<대학> '평천하'(平天下)장은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해선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응당 어떻게 해야 백성들 사이에 효심이 일어나고 공경심이 발흥되며 배반하지 않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다만 노인을 노인 대접해주고 어른을 어른으로 인정하며 외로운 이들을 어떻게 구휼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이는 누구라도 세상을 안정시키고 싶다면 오직 자기 자신을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자비롭게 만들라는 것이지요. 오로지 한 길로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 것만이 바로 평천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치국'(治國)을 말하면서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마땅한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임금을 섬겨야 온당한지, 어떻게 어른을 섬겨야 하는지, 군중을 어떻게 부려야 할지도 말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다만 효와 공경과 자애로움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싶다면 오직 그 자신이 효와 공경과 자애로움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齊家)장에 이르러서도 어떻게 해야 가정이 가지런해진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해야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게 되며,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게 되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답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단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식 허물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묘목의 성장을 알아채지 못한다'1)고만 말했습니다.


만약 좋아하면서도 단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장점을 간파할 수 있어 지나치게 편애하지 않고 탐욕부리지 않는다면 제 스스로 편벽됨을 제거할 수 있으니, 저절로 몸이 닦아지면서 동시에 집안은 가지런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든 집안을 잘 다스리고 싶다면 그 방법은 오로지 자기 몸을 사랑·미움·외경·동정심·게으름에 치우치지 않게 함으로써 효성·우애·자비로움이라는 나의 본성에 순종하면 그만일 뿐이지요. 오직 한 길로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 그 자체가 바로 제가임을 또 알 수가 있습니다.

'수신'(修身)장에 이르러서도 몸을 닦는 방법에 대해선 달리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분노·즐거움·두려움·근심 같은 몇 가지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따름이지요. 분노가 없으면 저절로 천박한 미움과 오만한 게으름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좋아함에 집착이 없다면 사랑에도 물론 편향이 없게 되지요. 두려움이 없다면 외경에도 치우침이 없을 것이고, 근심이 없다면 연민에도 당연히 편벽됨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몸이 절로 닦이고 집안도 저절로 가지런해지는데, 그것은 제가의 도리로써 내 몸을 닦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가정을 떠나서는 몸을 닦는 방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수신의 도리로써 내 마음을 바로잡으니, 이 몸을 떠나선 마음을 반듯하게 할 방법이 또 따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자로부터 공후(公侯)와 경대부(卿大夫)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와 천하를 위임받고 있으니, 그 근본은 수신에 있는 것이 옳겠지요. 하지만 일반 평민의 경우에 이르면 그 외로운 형세가 제 한 몸뚱이와 일개 가정뿐이니, 그에게 나라와 천하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통틀어서 '일괄적으로(壹是)'라고 말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이미 '일괄해서'라고 말했으므로 평민과 천자는 똑같이 동등합니다. 온 세상을 통틀어 근본을 안 닦아도 되는 이가 하나도 없고, 그 근본을 먼저 세움이 당치 않은 이가 또 한 사람도 없는 거지요. 저는 이를 두고 의구심을 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천하를 둘러보면 평민인 자들은 자기비하가 너무나 심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다 보니 제 스스로 나는 근본을 단정히 할 책임이 없다고 지껄이며 그 몸이 편벽에 빠져도 돌아보질 않는군요. 천자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자신을 너무 높이 추켜세웁니다. 과시가 지나치다 보니 자기는 통제하고 조종하는 권한을 쥐었다고 으스대며 평민들을 땅강아지나 개미처럼 깔보고 구휼하지도 않습니다. 천자조차도 수신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마당인데, 하물며 일반 평민이야 나위가 있겠습니까?"

질문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답했다.

"천자에게는 치국과 평천하의 책임이 있으니, 정녕 수신제가를 근본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평민들 같으면 비록 치국·평천하의 책임은 없다지만 또 저마다 가정이 있고 각자 몸뚱이가 있으니 어떻게 수신하여 집안을 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만약 집안이 가지런하지 못하다면 재앙과 실패가 당장에 들이닥쳐 제 몸뚱이조차 보전할 수 없고 가정을 지키지 못할 형편으로 전락하니, 또 어떻게 수신을 근본으로 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제가는 수신으로부터 관찰되는데, 천자든 평민이든 누구나 똑같아 구별이 없다. 이로부터 추론하건대 치국과 평천하는 단지 수신을 잘하는 데서 결판날 뿐으로, 치국·평천하의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용건이 다시 말했다.

"기왕지사 말씀과 같다면 평천하는 그저 노인을 노인 대접하고 어른을 어른 대접하며 외로운 이들을 구휼함으로써 효심과 공경과 자애라는 세 가지 덕목에 진력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왜 굳이 또 한편으로 이재(理財)2)를 말하고 다시 용인(用人)3)을 이야기해 허다한 행정사무를 보태는 것인지요?"

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자네는 그저 '평천하장'(平天下章)이 또 용인을 말하고 다시금 이재까지 언급한 줄만 알지 정치는 사람에게 달린 줄을 모르는군. 사람을 쓰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지라, 용인 역시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네. 재정을 증식하는 방도가 있어 재물이 항상 풍족하더라도 이재 역시 수신의 큰 도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 한 가지씩 차례대로 이야기하면 되겠나?

우선은 닭과 돼지를 길러서 생길 이익을 살피지 않고, 소와 양을 키우지 않으며,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을 신하를 두지 말라고 하였네. 오직 인(仁)을 좋아하고 의로움(義)을 사랑하며 백성과 더불어 기쁨과 아픔을 함께한다면 곳간은 절로 채워진다 하였지. 그러면 거기다 대고 이재(理財)라는 이름을 붙여도 실제로는 공공성에 입각한 이재가 되고, 명목상 재화의 생산이라 부르더라도 사실은 재물을 뿌려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될 뿐이네4).

이렇게 하면 이재가 바로 수신하는 방도가 되니, 어떻게 사고가 발생할 수 있겠나? 성실하여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마음이 너그러워 다른 이를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지. 다른 사람에게 재주가 있으면 그 재주가 자기 것인 양 기뻐하고, 남이 준수하고 총명하면 진정으로 그를 좋아할 줄도 알아야 한다네. 이를 두고 용인(用人)이라 부르지만 기실은 감히 자기만 옳다고 내세우지 않음이고, 명목상으로는 인재 선발이라 불러도 그 실상은 남들이 좋아하는 바를 자기도 좋아하는 것일 따름이라네5). 이렇게만 한다면 용인 역시 수신의 방도가 되니, 어디서 또 재앙이 생겨나겠는가? 그래서 '누구나 똑같이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일세."

▲ 복건성 천주시 서호(西湖) 공원에 위치한 이지의 동상. ⓒ김혜경

해설

이번 장 역시 앞의 <명등도고록> 제4장을 이어 계속해서 '수신'(修身)의 문제를 탐구한다. 그러나 달리 해설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유용건(유동성의 조카)과 이지의 대화는 수신과 통치의 요체를 세세히 짚어가며 유가의 정치철학인 <대학>의 성격까지도 상세하게 일러준다. 치국평천하 같은 통치행위조차 개인의 수신에 성패가 달렸음을 강조하는데, 우리에게는 어쩐지 낯선 듯 익숙한 담론이다.


유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이라는 난세를 배경으로 출현한 사상체계였다. 여타 제자백가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골몰했는데, 그런 고심의 결론은 결국 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문제의 시발이자 근원인 인간을 교육하는 방식을 통해 근본적 해결을 꾀하는 사상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인본주의(人本主義)는 유가사상의 핵심인 동시에 그 이상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였다.


논설의 핵심은 수양을 통해 인간의 도덕성을 최대로 발현시킨다는 '수신성인'(修身成仁)이고, 그 방법은 자신을 돌이켜보아 스스로를 교정하라는 '반궁자성'(反躬自省)이다. 그리고 이지는 이런 수신의 도리에 입각해 펼쳐지는 행사라면, 그 내용이 수신제가든 아니면 치국평천하 과정 중의 이재나 용인이든 간에 매사가 이치에 합당하고 세상이 반기는 유익한 행위가 된다고 설파한다.

필자는 지난주에 중국 무한(武漢)대학 철학원(哲學院)에서 개최한 "명·청 시대 중국 사회의 지식과 사상적 시야"(明淸時期中國社會的知識與思想視野)라는 다소 거창한 타이틀의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시점이 명·청이니 아무래도 유학에 관한 발표가 많았는데, 연구주제는 이지·왕선산(王船山)·방이지(方以智)·대진(戴震) 등 시대사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사상을 발휘했다고 일컬어지는 유학자 관련 내용이 대다수였다. 회의 기간 동안 서로 배우려는 열기는 뜨거웠고, 종래 관성적으로 동원되기도 하던 마르크스·레닌주의(馬列主義)나 공산당식 교조적 표현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유학은 더 이상 부차적 소용 때문에 동원되는 아류철학이 아니라 주류 그 자체였다.

▲ 복건성 천주시에 있는 이지고거(李贄故居) 입구. ⓒ김혜경

학회가 진행되는 동안 사용된 경비는 풍족했다. 시진핑의 부정부패 척결에 부응하느라 식사의 질은 비록 예전보다 못했지만 대신 다른 지출이 넉넉했다. 독일에서 온 철학과 교수에게 중국인의 후한 인심과 학문을 대접하는 미덕에 대해 상찬했더니, 뜻밖에도 그것이 바로 공산당이 지식인을 길들이는 방식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럴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며 부리는 호기의 한 단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교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다른 데보다 대학에 씀씀이가 큰 것이 설사 지식인을 수족으로 길들이려는 공산당의 방편일지라도 그것은 학문의 가치와는 별개인 것이다. 정말 괜찮은 학자라면 자신을 그렇게 쉽게 내다 팔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중국이 자기네 미래를 설계하는 두뇌들에 대한 소소한 투자라고 보아도 좋을 만한 씀씀이였다. 굳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삐딱하게 볼 필요가 없는 노릇이었다.

용인을 위해 푼돈으로 인심 쓴다는 의구심 때문에 저 독일인 교수는 그리 말했을 터였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 역시 도덕성을 의심받으면 저런 소리나 듣게 된다. 하지만 인사고 재정이고 간에 어디서도 자율과 재량의 덕목을 실감하기 어려운 한국의 대학사회에 속한 내 눈에는, 적어도 중국 공산당의 용인술과 씀씀이가 우리에 비해 훨씬 통 크고 깊이 있는 계산으로 보였다.

수신으로 일컬어지는 인성의 도야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또 언제 어디서나 요구되는 덕목이다.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상태야말로 모든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틀어쥔 열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저기 할 것 없이 민낯을 드러내기가 도무지 부끄러운 작금의 우리 현실에선 수신은 그저 생뚱맞고 낯설기만 한 어휘일 뿐이다.

▲ 복건성 천주시 이지의 고향집(李贄故居)에 안치된 이지 흉상. ⓒ김혜경


각주

1) <대학> 제8장. "이른바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그 몸을 닦는 데 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친애하는 바에 편향이 있거나, 경멸하고 미워하는 바에 편향이 있고, 외경하는 바에 편향이 있으며, 불쌍히 여기는 바에 편향이 있고, 오만하고 게으른 바에 편향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지만 단점을 알고 미워하더라도 장점을 파악하는 자는 세상에 드물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식의 결점을 알 수 없고, 자기 집 묘목이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자기 몸을 닦지 않으면 그 집안도 가지런히 할 수 없음을 일컫는다."(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 故諺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之碩.' 此謂身不修不可以齊其家.)

2) <대학> 제11장의 다음 내용을 가리킨다. "국가재정의 증식에는 바른 도가 있다. 생산자의 숫자는 많고 소비하는 자는 적게 하며, 생산자는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고 세금을 쓰는 일은 되도록 천천히 한다. 그러면 재물이 항상 풍족할 것이다. 어진 사람은 재물 덕분에 자신을 드날리는데, 어질지 못한 이는 자기 몸을 망쳐 재물을 모은다. 군주가 어질면 의로움을 좋아하지 않는 백성이 없게 되고, 의롭게 일을 하는데 그 끝맺음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지 않으며, 국고에 축적된 재화가 그 나라와 백성의 재물이 아닌 경우도 생기지 않는다."(生財有大道. 生之者衆, 食之者寡, 爲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3) 역시 <대학>의 같은 장에 나오는 내용. "군주가 어진 이를 발견하고도 등용할 줄 모르고, 설사 등용했더라도 그를 앞장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태만이다. 착하지 못한 자를 보고도 물리칠 줄 모르고, 물리친 다음에도 더 멀리 내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의 잘못이다."(見賢而不能舉, 舉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이 구절의 '명'(命) 자에 대해 동한의 정현(鄭玄)은 '만'(慢)의 오자로 여겼다. 여기서도 그의 해석에 따랐다.

4) 같은 장에 나오는 노나라 대부 맹헌자(孟獻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두마차를 탈 수 있는 사대부 집안에선 닭과 돼지를 키워 생길 수 있는 이익을 따지면 안 된다. 제사에서 얼음을 쓸 수 있는 경대부 집안에선 소나 양을 키워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 수레를 백 대나 가진 제후의 집에서는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가신을 키우면 안 된다. 세금을 무겁게 걷는 신하를 둘 바에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편이 낫다."(畜馬乘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

5) 같은 장에 보이는 <상서> '진서'(秦誓)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만약 다음과 같은 대신이 있다고 치자. 성실하지만 특별한 재주가 없고, 그 마음은 너그러워 남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다. 남에게 능력이 있으면 자기에게 있는 양 기뻐하고, 남이 지혜와 덕을 겸비했다면 진심으로 그를 좋아해 말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도 그를 용납한다. 이런 인물을 기용하면 내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이익까지도 생겨나리라!"(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彥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實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尚亦有利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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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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