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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의병장 조헌, 학자 송시열, 시인 정지용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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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제 성왕, 의병장 조헌, 학자 송시열, 시인 정지용을 만나다

12월 고을학교 <송년특집-옥천고을>

올해 마지막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12월, 제26강으로 <송년특집-옥천고을>을 준비합니다. 백제 성왕의 억울한 죽음의 현장이며 임진왜란의 명장 중봉 조헌,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서정시인 정지용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옥천고을을 찾아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을 다져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옥천의 비경, 부소무니 마을 앞의 부소담악 Ⓒ옥천군

고을학교 제26강은 12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옥천IC-이지당-옥천구읍(옥주사마소/죽향초등학교구교사/죽향리3층석탑/정지용생가/정지용문학관/옥천향교/척화비)-조헌유적지(후율당/중봉묘소/신도비/표충사/가산사)-점심식사 겸 뒤풀이-덕양서당-독락정-경율당-창주서원묘정비-송우암유허비-부소담악-서울의 순입니다.

▲<옥천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6강 답사지인 옥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삼국시대에 고시산군(古尸山郡),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

옥천은 북쪽에 대청호가 자리잡고, 동쪽은 백두대간의 화령재에서 지맥이 뻗어 나와 마니봉, 월리봉, 대성산이 능선을 이루며 동남쪽으로는 금강 상류가 바위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嵌入曲流] 북서쪽으로 흐릅니다. 동쪽으로 경북 상주시, 서쪽으로 대전광역시, 남쪽으로는 영동군, 북쪽으로 보은군에 맞닿아 있으며 경부고속도와 철도가 군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옥천은 삼국시대에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관성(管城)으로 고쳐 불렀고, 고려 현종 때는 경산부(京山府=星州)에 속했다가 인종 때 다시 현령(縣令)을 두었답니다. 명종 때(1183년)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洪彦)을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호를 폐지하였으며 충선왕 때(1313년)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시켜 경산부에 속해 있었던 이산(利山), 안읍(安邑), 양산(陽山)의 3현을 관리토록 하였습니다.

조선 태종(1413년) 때에는 지명을 옥천(沃川)으로 고치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편입시켰으며 고종 때(1895년) 전국적인 행정정비에 따라 군(郡)이 되어 12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7년에는 내남면을 옥천면으로 고치고 1949년 옥천면을 읍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옥천 지역은 최초의 고시산군(古尸山郡)이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고학적으로 산성과 고분이 많았던 곳입니다. 비록 정상적으로 발굴 조사된 자료가 없어서 단정 짓기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동안 수집된 유물을 보면 5세기말 정도부터는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신라적 성격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옥주(沃州)라 불리던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항아리[小壺], 큰 항아리[長胴甕], 편병(扁甁) 등의 토기문화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청자(靑瓷)라는 새로운 도자기문화를 꽃피운 시기로 용암사(龍岩寺)3층석탑이나 마애불, 두암리3층석탑 등에서 불교문화의 단편을 엿볼 수 있으나 전적(典籍)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옥천향교(沃川鄕校), 청산향교(靑山鄕校)와 같은 관아건물과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유허(遺墟)를 비롯하여 창주서원묘정비(創洲書院廟庭碑), 이지당(二止堂), 양신정(養神亭), 사마소(司馬所) 등과 같은 유학 관련 건물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옥천 지역은 삼국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삼국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특히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그때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성산성과 관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성산성(已城山城)은 최근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은 중심 토루(土壘)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흙을 덧붙여 올려 축성한 토축(土築)이며 일부 외벽은 석축(石築)으로 개축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선무늬[線文]기와’ 조각, ‘굽다리접시[高杯]’ 조각 등 5세기의 신라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40m이고 면적은 5만9천160㎡이며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로 남쪽에는 전망대를 조성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번 발굴조사의 결과 이성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개축굴산성(改築屈山城)’의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으며 신라의 북방 진출과 삼국통일의 교두보였던 ‘보은 삼년산성’과 그 이후 대부분의 산성들이 석성으로 축조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전의 토성 축조방법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밝혀줄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성산성에서는 옥천과 보은을 경계 지으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보청천(報靑川)을 조망할 수 있고 보은으로 향하는 대로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영동을 거쳐 황간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지형적인 특성을 지닌 곳입니다. 보은 삼년산성이라는 든든한 배후를 업고 있으면서 동시에 백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에 백제 성왕이 이성산성 인근의 옥천 구진벌에서 신라 매복병에게 참수당한 것도 이와 같은 지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인 정지용 생가 Ⓒ옥천군

백제 성왕 죽음의 현장

관산성(管山城)은 백제성왕사절지(百濟聖王死節地)로 전해지고 있는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부근과 맞은편의 서북방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고리산성이라고도 부르는 환산성(環山城)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고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김무력(金武力), 고간(高干) 등이 거느린 신라군에 크게 패하여 성왕(聖王)은 전사하고 좌평 4인, 군졸 2만 960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나제동맹은 깨어졌고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유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옥천의 읍치구역에는 옥천향교,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 척화비(斥和碑)가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舊校舍)와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옥천의 읍치구역은 구읍(舊邑)이라고도 부르는데, 일찍부터 선진문물이 들어온 구읍은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철도경유지로서의 본래 계획을 이곳 사람들의 절대적인 반대로 옥천역이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고 상권 또한 옥천역 인근으로 이동하게 되자 상권은 쇠락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개발에 의한 문화유산의 파괴를 피해 구읍은 정겨운 전통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옥천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고, 1966년과 1974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2층 구조의 명륜당은 외삼문과 강당의 기능을 겸한 건물입니다. 하부는 누각 밑으로 사람들이 출입하게 되어 있고 상부는 좌우 양측에 온돌방을 두어 교관이 사용토록 하고 중앙에는 대청을 두어 교관이 유생을 교육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삼문은 특이하게 세 개의 문이 합쳐진 형식이 아니라 세 개의 문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별개의 문으로 세웠습니다.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 앞 좌우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옥천향교의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 뒤 공간에 세웠는데 경사지에 향교를 짓다 보니 지형을 따른 배치인 것으로 보이며 지금 동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직사가 들어섰고 서재인 홍도당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풍판이 있으며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하였으며 대성전 좌우측에는 동무, 서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옥주사마소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졌으며,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창고건물이었던 것을 고쳐서 사마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마소란 조선 중기 지방에 있는 생원, 진사들의 협의기구로, 대개 사마시에 합격한 자가 50인 이상 되는 곳에 설치하였으며 이들의 친목 도모와 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 등으로 그 고장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세웠습니다.

옥주사마소에 전해지는 송시열(宋時烈)의 <중수기(重修記)>를 통하여 현종(顯宗) 15년(1674) 11월에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이후에도 고종(高宗) 30년(1893) 2월에 중수한 사실을 송근수(宋近洙)의 <중수기>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사마소 건물의 기단은 대리석을 다듬어서 가지런히 쌓아 올렸는데 석재 중에는 사찰에 세워지는 석탑의 부재들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근의 폐사지에서 옮겨와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봉(重峰) 조헌(趙憲. 1544~1592).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제사상가이자 의병장이었다.Ⓒ옥천군

정겨운 전통마을 모습 간직한 구읍(舊邑)

척회비가 있는 삼양사거리는 보은과 옥천, 금산을 잇는 37번국도와 대전과 옥천, 영동을 잇는 4번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할 것을 온 백성에게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 척화비는 원래 땅에 묻혔다가 후에 산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 남게 되었는데,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각 면이 많이 파손된 상태입니다. 멀리서 보면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아서 한국전쟁 때 적으로 오인하여 총알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전국에 있는 척화비는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이 비는 산기슭에 있는 관계로 철거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죽향초등학교는 시인 정지용과 육영수 여사의 모교로 유명한데, 교정 남쪽 담에 위치하고 있는 구교사(舊校舍)는 1926년에 신축된 지상 1층 규모의 일식 목조건물로 지붕은 함석을 사용하여 마감되었으며 1936년에 현 위치에 재건축되고 1977년, 1985년에 증축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현재 사용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커 문화재로 등록되어 활용, 보존되고 있습니다.

창주서원묘정비(滄州書院廟庭碑)는 창주서원 터에 남아 있는 비(碑)입니다. 창주서원은 조선 선조 12년(1579) 노진(盧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려는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던 고룡서원(古龍書院)이 숙종 8년(1682) ‘창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이같이 불리게 되었고,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그 비와 터만 현재 남아 있으며 비문은 서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썼습니다.

덕양서당(德陽書堂)은 인조(재위 1623∼1649)때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를 지낸 유식(庾軾)이 세운 서당으로 이 마을에서 태어난 유식은 왕자의 사부를 지내고 목천현감을 지낸 후 다시 고향 ‘덕실’로 돌아와 서원을 짓고 향리의 인재 양성에 힘쓴 인물입니다.

덕양서당과 이웃하고 있는 너와집의 민가는 달리 ‘능애집’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산골마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밭농사와 사냥을 하면서 지내는 산골은 짚이나 기와 같은 지붕을 얹을만한 재료가 마땅치 않아 통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다시 쐐기를 이용하여 쪼개어 나무판자를 만들고 그 나무판자를 기와처럼 지붕에 얹었답니다.

용문서당(龍門書堂)은 숙종 23년(1697)에 서사(書舍)인 옥천 경현당(景賢堂)과 재사(齋舍)인 용문영당(龍門影堂)을 지었으나 재사는 허물어져 없어졌고 서사인 경현당만 남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납도리집으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을 놓았는데 온돌방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습니다.

경율당(景栗堂)은 영조(英祖) 12년(1736) 경율(景栗) 전후회(全後會)가 지은 서당으로 자기의 호를 따서 경율당이라 하였는데 경율은 율곡(栗谷) 선생의 학덕을 숭모하여 ‘율’(栗)자를 즐겨 썼다고 합니다. 경율당은 후손들의 학문 연수와 인격 수양의 도량으로 활용하여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고, 용궁 전씨(龍宮全氏) 종중의 친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옥천 척화비 Ⓒ옥천군

유학자며 경제사상가며 의병장이었던 조헌

독락정(獨樂亭)은 안남면 연주리의 금강 가에 위치하느데 선조 40년(1607) 절충장군 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낸 주몽득(周夢得)이 세운 정자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역할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는 유생들의 학문연구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양신정(養神亭)은 인종 원년(1545)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와 있을 때 본인이 독서도 하고 글도 가르칠 수 있도록 금강 가에 있는 목담호수에 세운 것으로, 선조30년(1597) 병화(兵火)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12년(1620)에 다시 지었으나 현재의 정자는 순조28년(1828)에 또다시 지은 것입니다.

지붕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擁正30년乙酉)’라는 글이 있어 1730년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는 이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4면 모두 마루가 있어 전형적인 서당의 구조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지당(二止堂)은 중봉(衆峰) 조헌(趙憲) 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하였으나 그 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시전(詩傳)>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 이름 하였으며 그 후 퇴락한 것을 1901년에 옥천읍 옥각리의 금(琴)씨, 이(李)씨, 조(趙)씨, 안(安)씨 네 문종(文宗)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우리 유학의 도통을 계승한 유학자이며 경제사상가이자 의병장입니다. 김황에게 수학하고 성균관에 유학한 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과거급제 이후에는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종묘서령, 보은현감, 공주목 교수 겸 도독 등을 역임하였으며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고, 특히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스스로 부르기도 한 인물입니다.

송우암유허비(宋尤庵遺墟碑)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신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으로 비를 세운 시기는 정조 때로 추측됩니다.

우암(右菴) 송시열(宋時烈)은 그의 외가(外家)인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에서 출생하여 이 마을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자라며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8살 때부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 송이창(宋爾昌)으로부터 글을 배운 인연으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송준길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고 그 후 일생을 두고 송준길과 함께 학문과 정치 생활에 있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22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위고 아버지의 무덤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구룡리’를 떠나 예학(禮學)의 일인자인 거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고 김장생이 죽자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다시 학문을 연마하여 생원시 합격을 시작으로 많은 학문적 정치적 업적을 남겼으며 사후(死後) 우리나라 성현의 반열에 올라 전국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고찰 용암사와 가산사

옥천 지역의 고찰은 신라시대의 용암사와 가산사, 그리고 고려시대의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용암사(龍巖寺)는 장령산(長靈山) 북쪽 중턱에 있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년(541) 경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 가서 불도를 닦고 신라에 돌아와서 이곳에 용암사를 창건하고, 13년 후에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웅전 좌측 동북쪽에 언덕을 이루는 큰 바위 위에 마애불과 3층석탑 두 기가 세워져 있는데 마애불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 천년사직의 무상함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 이곳에 머물러 지내다가 떠나자 후에 그를 추모하던 자가 그를 그리며 조성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고려 중기 양식을 보이는 두 기의 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달리 대웅전 앞이 아니라 대웅전의 북쪽 낮은 봉우리에 서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탑은 전체적으로 같은 형태이지만 바깥쪽의 탑에 비해 안쪽의 탑은 약간 홀쭉한 편이고 상륜부가 조금씩 다릅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한 쌍탑입니다. 자연암반 위에 탑을 건립하면 그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데 2층 암반 위에 2층 기단으로 건립한 점,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다른 탑에 비해 높이가 두 배 정도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대웅전에 주불로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은 1880년 복장을 개봉하여 ‘순치 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조성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창건돼 임진왜란 때 기허 영규대사와 중봉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던 곳으로, 인조 2년에 중건되었으며 숙종 원년(1675년)에 조헌 선생을 비롯한 칠백의사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영규대사의 전공을 높이 기리면서 호국사찰로 지정되었습니다.

가산사 영정각은 숙종 21년(1695년)에 건립돼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두 의병장의 영정을 강제로 빼앗아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영정각 지붕 용마루 기와에서 ‘강희 33년 갑술 4월 망일(康熙 33年 甲戌 4月 望日…’이라는 연대가 쓰인 것으로 미루어 용마루에 쓰인 기와가 조선 숙종 20년(1694)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옥천읍 죽향리 탑산이골 마을은 옛 절터로 문헌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탑산이골이라는 지명과 현존하는 3층석탑을 통하여 폐사지(廢寺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터는 모두 주택지로 변하였고 사지에 남아 있던 3층석탑도 일제강점기 때 인근의 죽향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놓아 절터에는 현재 아무런 유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절터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기와 편과 토기 편이 수습되고 있고, 이 지역이 옛 읍치구역으로 관아(官衙)가 인근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에 옥천군의 중심적인 위치에 세워졌던 절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하고 따뜻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2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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