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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민주주의를 빼앗는 불평등은 끔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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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민주주의를 빼앗는 불평등은 끔찍하죠!"

[2015 노벨상 읽기] 앵거스 디턴은 이렇게 말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2015년 노벨 경제학상은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에게 돌아갔다. 노벨위원회는 그의 수상 이유로 특정 시점의 소비에 대한 측정, 시간에 걸친 소비 행태에 대한 실증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빈곤과 후생 등에 관한 뛰어난 연구 업적 등을 들었다. (☞관련 자료 : ANGUS DEATON : CONSUMPTION, POVERTY AND WELFARE)

그는 보다 유연한 가정에 기초하여 가격과 소득을 변수로 소비를 측정하는 '준이상적' 수요 체계(AIDS : almost ideal demand system)를 개발했다. 또 그는 항상 소득 이론이나 생애 주기 이론 등 최적화 행동에 기초한 소비 이론이 현실의 집계 데이터와 맞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소위 이 '디턴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미시적인 데이터를 사용해야 한다는 통찰을 제시했다. 디턴의 연구는 이후 금융 제약과 가구의 개별적인 특징 등을 고려한 소비의 이론과 실증 연구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는 또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와 함께 다양한 차원의 후생에 관한 경제학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세계은행과의 협력과 논쟁을 통해 빈곤의 측정을 둘러싼 논의를 발전시켰고, 건강에 대한 경제학적 이해를 발전시켰으며, 삶의 만족도 등 행복에 관한 실증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의 연구는 철저히 데이터에 기초하여 기존의 이론을 검증하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여, 이론과 현실의 간격을 좁혔다고 할 수 있다. 또 스스로 발전시킨 서베이 자료에 기초하여 미시 경제학과 거시 경제학에 다리를 놓고, 주로 거대 이론에 집중하던 발전 경제학의 발전에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련 자료 : Angus Deaton's Publications)

디턴에 대한 무지, 오해 혹은 왜곡?

이와 같은 많은 연구 업적을 지닌 그이지만, '디턴'이라는 이름이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작년 가을일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글항아리 펴냄)이 한국에 번역 출판되었을 때, 한 경제 신문이 디턴의 <위대한 탈출>(최윤희·이현정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을 출판하며 그를 대항마로 내세워 피케티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디턴이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하는' 동력이라고 주장했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올해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자 한국의 여러 언론은 다시금 피케티와 디턴을 대립시키며, 심지어 노벨상이 불평등보다 성장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이들은 불평등보다 성장이 더 중요하며 성장을 위해 불평등이 필요하다는 디턴의 주장을 다시 부각시켰다.

그러나 디턴이 피케티와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 이러한 보도는 상당 부분은 무지나 오해의 소산이 아니라면 의도적 왜곡의 결과로 보인다. 이미 디턴의 책을 꼼꼼히 읽어본 여러 사람은 디턴의 주장이 잘못 소개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몇몇 언론은 노벨상 수상 이후 디턴에 관한 해외의 보도를 인용하며 디턴과 피케티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라고 지적했다. (☞관련 자료 : 위대한 탈출)

이러한 논란은 작년 한국경제신문이 디턴의 책을 피케티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 선전할 때 예고된 것이었다. 이들은 책의 부제도 원서의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을 한글판에서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로 바꾸었다. 최근에는 이 책의 한글판이 장과 절의 제목도 자의적으로 바꾸었고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서론의 상당 부분을 아예 빠뜨리고 미국의 불평등을 비판하는 5장의 주요 부분들을 왜곡하는 등 번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었다. 그러자 이 신문은 번역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계와 보수파를 대변하여 어떻게든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억누르고자 했겠지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주장마저 잘못 알려지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관련 자료 : 한경BP는 어떻게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왜곡했나, '위대한 왜곡'?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번역에 관하여)

디턴과 불평등 : "위대한 탈출"

그렇다면, 과연 불평등에 관한 디턴의 진짜 생각은 무엇일까. 그는 개발도상국의 빈곤과 후생에 관한 수많은 연구를 했지만, 직접적으로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전쟁 포로의 탈출을 다룬 영화의 제목을 따온 <위대한 탈출>의 주된 관심도 성장을 통해 인류가 질병과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역사였다.

이 책은 먼저 질병의 극복과 수명의 연장 등 건강에서 나타난 역사적 진보에 관해 상세히 서술한다. 이와 함께 미국의 불평등과 빈곤, 세계화와 함께 나타난 개발도상국의 성장과 빈곤 탈출, 그리고 개발도상국 원조의 문제점 등을 이야기한다.

<위대한 탈출>은 어떻게 보면 논지가 매우 명확하지는 않은 책이며, 특히 불평등의 문제나 불평등과 성장과의 관계를 논의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불평등은 성장이나 진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이기에 디턴은 이 책에서 불평등에 관한 일반적인 수준의 논의를 제시한다. 한계가 많겠지만 불평등과 직접 관련된 구절에 기초하여 디턴의 생각을 유추해 보자. 그는 책을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쓰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서문과 서론의 여러 구절들은 한글판 번역에는 빠져 있다. 페이지는 영문판의 페이지이다.)

"불평등은 흔히 진보의 결과이다. 모든 이가 동시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이가 깨끗한 물, 백신, 혹은 심장마비를 예방하는 신약 등 생명을 구하는 최신의 수단들을 즉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평등은 또한 진보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인도의 아이들은 교육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보고 그들도 학교에 간다. 그러나 만약 승자들이 다른 이들의 따라잡기를 가로막고, 그들 뒤의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면 불평등은 나쁠 수 있다." (p. 1)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흔히 진보와 성장의 산물이다. 빈곤에서 먼저 탈출한 자들과 남겨진 자들 사이에 불평등이 나타나고, 일부 국가들의 빠른 성장으로 국가 간의 불평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정치를 장악하는 나쁜 불평등에 관해서도 논의하지만, 장기적인 빈곤 탈출의 관점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성장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우리가 이 탈출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부제, '불평등의 기원'은 탈출하지 못한 전쟁 포로들에 관한 생각에서 나왔다. (…). 우리는 그들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 결국 탈출하지 못한 전쟁 포로들의 수가 탈출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p. 3)

한편, 그가 보기에 불평등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복잡하다. 먼저 성장 과정에서 "불평등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길을 보여주고 따라잡기의 유인을 제공하여 도움이 될 수 있다."(p. xiii). "(성장이 만들어낸) 격차는 생산적일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은 따라잡기 그리고 이득을 소수에서 많은 이로 퍼뜨리는 기회와 유인 모두를 창출한다."(p. 215) 불평등은 사람들이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열심히 일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순기능이 있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의 책은 여러 곳에서 심한 불평등은 나쁜 것이라 강조한다. "빈곤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탈출로를 봉쇄하고 그들의 지위를 지키는 경우 불평등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p. xiii). 그는 특히 미국에 관한 장에서는 소득 분배와 불평등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최상위 소득에 관한 피케티의 연구를 인용하며 소득의 심각한 집중이 부자들의 정치적 지배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실제로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와 관련된 부자 이해 집단의 정치적 로비를 비판하며, "상위소득의 급속한 증가가 돈으로 인한 정치 과정을 통해 자기 강화적이 될 수 있다. 규칙들이 공공의 이해가 아니라 부자의 이해를 위해 만들어지고, 이들은 그 규칙을 더 부자가 되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다"(p. 212)고 강조한다. 즉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인 정치적 평등은 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위협받으며,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할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커진다"(p. 213)는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불평등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때로는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도움이 되고, 때로는 심각한 불평등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진보를 촉진할 수도 가로막을 수도 있다."(p. 11) "성장, 불평등 그리고 따라잡기는 동전의 밝은 면이다. 그러나 어두운 면은 그 과정이 납치당해서, 따라잡기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다."(p. 215) 특히 그는 과거의 위대한 탈출에도 불구하고, 이제 심각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해치고 성장을 가로막아 탈출의 행렬을 가로막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결론의 아래 구절은 한국 사회에도 울림이 크다.

"부의 엄청난 집중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를 질식시켜 민주주의와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런 불평등은 이전에 탈출한 자들이 그들 뒤의 탈출로를 봉쇄하도록 부추긴다." (p. 327)

좋은 불평등 vs. 나쁜 불평등

불평등에 관한 그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그의 몇몇 인터뷰 기사들을 살펴보자.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디턴은 앞서 살펴본 그의 입장을 다시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성장과 민주주의를 해치고 불평등을 더욱 강화시키는,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수준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부자에 대한 증세와 최저 임금의 인상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불평등에 대한 우려에 관한 주된 기준은 그것이 진보의 이득을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만들어, 결국 모든 이들이 잘 살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그 이득이 소수의 특권층에 집중되고 유지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바는 소득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최상류층들이 그들의 부를 정치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데 사용하여, 나머지 모두가 손해를 본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관련 기사 : Inequality and Rent-seeking : An Interview With Angus Deaton)

"그리고 불평등은 결국 더 가난한 사람들도 탈출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입니다. 불평등은 성공의 척도이고 이러한 유인들을 억누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경제의 작동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민주주의와 공공재의 공급을 침해하죠." (☞관련 기사 : The British Nobel prize winner aiming to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불평등의) 밝은 면은, 만약 학교에 가는 일의 수익률이 높아지면, 학교에 가는 유인이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더 잘 살게 된다는 것이죠. 그건 훌륭한 일입니다. (…) 그러나 정말 어두운 면은 소득 불평등이 극심하면 (…) 엄청난 부자들은 관심이 없는 공적인 의료나 공교육 등 공공재의 제공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 기사 : Five minutes with Angus Deaton (Part 1) : "If the rich can write the rules then we have a real problem")

이와 같은 견해는 사실 피케티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최근의 심각한 불평등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많은 경제학자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중 누구도 불평등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 이야기하거나 무조건적인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어느 정도까지는 쓸모가 있지만, 너무 심각해지면 문제입니다. 성장을 저해할 수 있고 사회 이동성을 해치며 제도를 무너뜨리죠. 불평등이 아닌 극심한 불평등이 문제입니다."

2014년 9월 서울의 강연회에서 디턴의 주장과 자신의 주장은 배치되지 않는다고 강조한 피케티의 말이다.

다만 디턴은 빈곤 탈출의 역사와 개발도상국의 현실에 더욱 주목했기에 성장을 강조했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면도 원론적으로 지적했을 뿐이다. 반면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동학에 기초하여 심각해지고 있는 선진국의 불평등 문제를 분석했기에, 이들의 연구는 결코 반대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피케티의 연구에 관해 수많은 비판과 논쟁이 있지만, 디턴이 그의 중요한 비판가로 이야기되었던 곳은 아마도 한국뿐일 것이다.

물론 유인을 제공하고 경제에 도움이 되는 좋은 불평등과 민주주의와 성장을 가로막는 나쁜 불평등을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쁜 불평등을 억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크다. 특히 나쁜 불평등으로 인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회 구조에서는 좋은 불평등의 순기능조차 약화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의 주장대로 불평등이 그 정도와 작동 방식에 따라 경제에 다른 효과를 미친다면 우리는 현재 한국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즉 현재의 불평등이 과연 바람직한 수준인지 아니면 과도한지, 그리고 그것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유인을 자극하는지 아니면 불공정한 지대 추구와 정치의 장악으로 이어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지 말이다. 청년들이 빈곤 탈출을 포기하고 대신 나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우리 사회에서 그 대답은 어느 쪽일까?

세계는 진보하는가

디턴은 미국의 현실에 관해 크게 우려하지만, 장기적이고 세계적 관점에서는 조심스럽지만 낙관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아마도 그의 말대로,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탄광촌에서 자란 아버지 아래 태어나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학자로 미국에서 성공한 그의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 많은 개발도상국의 시민들이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수명이 늘어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마침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세계은행은 2011년 구매력 평가 달러 기준 1일 1.9달러의 새로운 세계적 빈곤선을 발표하며, 2012년 현재 절대적 빈곤 인구가 9억200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12%로 20년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 수치는 2015년에는 약 7억 명으로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 인구의 10% 미만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관련 기사 : World Bank Forecasts Global Poverty to Fall Below 10% for First Time; Major Hurdles Remain in Goal to End Poverty by 2030)

▲ 극심한 빈곤(extreme poverty) 상태에 있는 전 세계의 인구 수. ⓒWorld Bank

이는 물론 중국과 인도 등 인구 대국의 고도성장으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빈곤층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개발도상국 시민들의 극심한 빈곤으로부터의 성공적 탈출을 언급하며 하버드 대학교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피케티의 주장은 선진국에만 국한된 것이라며, '불평등 문제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관련 기사 : Where Is the Inequality Problem?)

그러나 낙관보다 비관, 희망보다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디턴도 지적하듯 고도성장과 함께 중국 내의 소득 불평등은 급속히 심화되어 이제 미국보다도 높아졌고,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특히 다른 지역과 달리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극심한 빈곤 인구는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선진국 내의 불평등과 상위층의 소득 집중은 더욱 심해졌고 이제 불평등과 저성장의 악순환이 우려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 간이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을 대상으로 계산한 불평등은 1989년 이후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소득 서베이 자료들을 사용하여 뉴욕시립대학교의 브란코 밀라노비치 교수는 전 세계 시민들 사이의 지니계수는 2008년 현재 0.705로 엄청나게 높은데 1988년 0.722보다 조금 낮아졌을 뿐이라고 보고한다. 또 그에 따르면 숨겨진 상위 1%의 소득을 고려하면 불평등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관련 자료 :
Global Income Distribution: From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o the Great Recession)

물론 2008년 이후에도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소득 불평등은 조금 더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불평등 자체가 성장에 미치는 악영향과 신흥국을 필두로 한 세계 경제의 침체 가능성을 고려하면, 평등한 세계를 위해서는 갈 길이 아직 멀다고 할 수 있다.

가난에 빠진 세계

더욱 중요한 점은 멀리 개발도상국 시민들의 빈곤 탈출 소식이 격차가 심해지고 살림살이가 힘겨워지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서민들에게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발도상국이 아닌 나라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빠져 고통을 받고 있다.

각국의 빈곤은 보통 최저 생계비 이하로 측정되는 절대적 빈곤이나 중위 소득의 절반 이하로 정의되는 상대적 빈곤으로 측정된다. 여러 나라들에서 이 빈곤 인구의 비중이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고 있어서 '위대한 탈출'의 행렬이 멈추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 빈곤율은 미국에서는 최근 더욱 높아졌고 한국에서도 외환 위기 이후 급속히 높아진 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상대적 빈곤도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 미국의 절대적 빈곤 인구 수와 절대적 빈곤율 : 1959-2014. ⓒcensus.gov

▲ 한국의 절대적, 상대적 빈곤율.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결국 개발도상국의 많은 이들이 극심한 빈곤에서는 탈출하고 있지만, 전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평등과 가난에 갇혀 있고 이를 탈출하기가 힘에 겨운 상황이다. 이는 바로 디턴이 우려하는 '부자들이 규칙을 쓰는' 세상과도 관련이 작지 않을 것이다. 그의 걱정대로 과도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성장에 악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람들의 탈출로를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디턴의 주장마저 왜곡되는 한국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의 위대한 탈출을 위해

<위대한 탈출>의 모티브가 된 영화 <대탈주>는 잡혀 와도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자유를 향한 전쟁 포로들의 불굴의 의지를 감동적으로 그린다. 그러나 영화에서 대탈주는 대부분 실패했고 그 결말은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 사람들이 위대한 탈출을 계속하고 성공하려면, 남겨진 이들과 탈출한 이들이 힘을 모아 탈출로를 넓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아예 수용소의 문을 열어젖히고 담을 무너뜨리는 사회 구조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2014년 한국에서도 나타났던 피케티 열풍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열망한 것이었다. 올해 디턴의 노벨상 수상도 불평등과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생산적이고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그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좌파들은 불평등을 비난하고 우파는 불평등을 우려하는 이들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불평등에 관해 진지한 논의가 없었습니다. 나는 불평등이 좋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노력에 대한 보상의 일부이고, 우리 삶의 진보를 촉진하는 새로운 혁신과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의 일부죠. 그러나 엄청나게 부자가 된 이들이 우리 모두로부터 민주주의나 공립학교, 공적 의료 체계 등과 같이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가려 한다면 불평등은 끔찍한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불평등이 바로 '양날의 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에 관해 거대한 공개적 논의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 노벨상이 그것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정말로 기쁠 것입니다." (☞관련 기사 : Nobel laureate hopes prize will spur more debate on ineq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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