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의 열여덟 번째 강의는 21(토)∼22(일)일, 1박2일로,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경주 일대의 폐사지입니다. 경주는 폐사지학교가 개교 한 후 매년 가을이면 찾는 곳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지만, 1박2일의 짧은 일정이라면 10년을 다녀도 골골샅샅 박혀있는 절터들을 다 찾지 못할 것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번에는 경주의 가장 남쪽 울산과 경계를 이룬 곳에 있는 원원사지부터 시작합니다. 첫째 날, 울산에서 불국사로 출가를 하던 하러 줄을 이은 사람들이 지금의 외동읍 모화리에 다다라 삭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태웠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모화(毛火)입니다.
둘째 날은 경주 남산의 남쪽 자락을 답사합니다. 열암곡 석불좌상과 넘어져 거꾸로 누워있는 마애불이 있는 새갓골부터 시작하여 무너진 탑과 부서진 석불이 흩어져 있는 양조암골을 돌아 내려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경주 사람들의 발길도 뜸한 마애열반상, 곧 와불(臥佛)이 새겨져 있는 바위를 찾아 나섭니다. 마애열반상은 아직 나라 안에서 율동의 마애열반상 외에는 발견된 보고가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이번 답사의 전체 일정에 어려운 등산은 없고 완만한 코스이니 가벼운 산행 차림으로 오세요^^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원원사지]
원원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확실히 밝힐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권5 <명랑(明朗) 신인조(神印條)>에 보면, “신라의 서울 남동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절은 안혜(安惠) 등 4대덕(大德 : 安惠·朗融·廣德·大緣)이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웠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터에 남아 있는 동·서의 3층석탑은 그 상층 기단과 초층 탑신에 조각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의 것으로는 추정할 수 없고, 역시 8세기 중엽 이후의 조성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원사 창건에 대한 설화와 탑의 양식 사이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절터는 모화리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조잡하게 다듬은 직사각형 석재를 높이 쌓고, 그 중앙에 돌계단을 둔 대지가 있다. 이 대지의 동·서쪽에 앞서 말한 3층석탑이 있으나, 그 부근에 다른 건물터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절터 동쪽 계곡에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3기(基)가 있고 서쪽 계곡에도 부도가 있지만 모두가 고려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석탑은 깨지고 무너져 있었으나 1933년에 복원하였고, 현재 노반(露盤) 이하는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이 두 석탑은 2중기단으로 조성된 3층석탑으로, 기단(基壇)에는 각각 2개의 탱주(撑柱)가 있고, 옥개석(屋蓋石) 받침 역시 5단의 역(逆)계단식 받침을 갖추고 있어 신라 양식에 따른 기본 형태를 취한 탑이다. 기단 상층에는 3구(區)의 돌면에 각각 3구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부조(浮彫)하였는데,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은 12지신상으로서는 비교적 희귀한 모습을 갖추었다. 이 조각의 수법은 신라의 예술 최성기의 제작이라고 보는 석굴암 본존 또는 그 주위의 보살이나 사천왕상에 비하여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절터의 가람 배치 양식은 동과 서에 두 석탑을 세우고 북쪽에 광장이 있는 점으로 보아 쌍탑 가람이었을 것이다.
[영지와 무영탑]
석가탑을 조성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남편 일이 하루 빨리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하였다.
[경주시 백운계 양조암골]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한 양조암골은 백운계에 있다. 백운계는 흔히 말하는 남산의 남쪽 자락이며 백운계를 거슬러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고위산으로 향할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른쪽으로 열암곡(새갓골), 양조암골 그리고 침식골이 차례로 있으며 그 마지막에 백운암이 있다. 이 세 골짜기에 있는 부처님은 모두 불두를 잃어버렸거나 파불이어서 순례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새갓골 석불좌상은 2005년 10월 23일, 경주남산연구소의 임희숙 씨가 불두를 되찾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조암골에는 모두 네 곳의 절터가 있으며 파불이 있는 곳은 1사지로 양조암골의 초입에 해당한다. 남향인 절터 앞으로 계류가 흐르며 입구는 시누대숲이 우거져 있다. 법당 자리였음직한 곳에는 민묘가 들어섰으며 그 언저리에 사각형의 연화문 대좌 편과 광배 편이 있다. 불상은 채 3m가 되지 않는 축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법신은 세 토막이 났다. 불두는 찾을 수 없으며 허리쯤에서 또 한 번 깨졌다. 상체는 두툼한 가슴과 오른팔의 옷 주름 흔적은 있으나 나머지는 알아볼 수 없으며 하반신은 오른쪽 무릎이 깨진 것 말고는 양호하게 남아 있다. 왼쪽 무릎 위나 등을 감싸고 있는 법의의 조각 그리고 광배의 화염문이나 연화문의 조각으로 미루어 당당한 모습의 부처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상은 좌상이며 왼손 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파불이 된 시기는 가늠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짐작컨대 조선시대의 척불을 피해 나왔다면 일제강점기에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고 추정할 뿐이다. 조성 시기는 대략 나말여초 즈음으로 본다.
[경주시 율동 사당골 마애열반상]
나라 안에서 유일한 마애열반상은 1998년 여름, 태풍 예니가 지나가면서 쓸려나간 계곡 덕분에 현신했다. 그 후 1999년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7~8m 가량의 큰 바위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다. 열반상이 새겨진 면은 북면이며 마치 불전처럼 움푹 파인 면에 오른쪽 어깨를 땅으로 향한 채 누워 계신다. 육계로부터 발까지의 길이는 대략 170cm에 이르지만 특이한 것은 완전한 불두 그리고 왼손과 두발을 선각으로 새겼을 뿐 광배나 두광이 없다. 더구나 불두로부터 손에 이르는 몸이 조각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손에서 발까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불두를 새기고 훌쩍 건너 뛰어 중간쯤에 복부로 향한 왼손을 새겼다. 다시 손 아래 공간은 밋밋하게 두고 두 발을 새겼다는 것이다. 이렇듯 마애열반상이 보고된 것도 처음이려니와 조각수법 또한 나라 안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불두와 손 그리고 다시 발에 이르는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채색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황수영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열반상 곁에 있는 명문은 30자 가까이 되지만 ‘무술년(戊戌年) 법태법사(法泰法師)’라는 글자만 판독될 뿐 전체 내용은 파악이 힘들다. 더구나 명문 위로 바위의 동면에 불두가 남아 있어 열반상과 불두 중 어느 것에 대한 명문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불두의 길이는 대략 40cm에 이르고 귀는 양쪽 모두 얼굴과 거의 맞닿은 형태로 새겨져 있다.
무술명월성율동마애상(戊戌銘月城栗洞磨崖像)
판독자 : 허흥식 오영선 허흥식(연구팀수정)
戊戌銘月城栗洞磨崖像」
戊年□□日大」
戊戌年」
法泰法師□□□」
同之旀不小若□ 王大」
王六百」
(내용 불명)
무술년(戊戌年)
법태법사(法泰法師)
(이하 내용 불명)
2015년 11월 폐사지학교 제18강 <경주특집3>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21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8강 여는 모임
-경주 도착, 점심식사(경주한정식)
-모화리 도착
-원원사지 도착
-영지석불좌상 도착
-식당 도착, 저녁식사 겸 뒤풀이(돼지불고기쌈밥)
-숙소 도착(펜션남산, 다인실)
<11월 22일 일요일>
07:00 숙소 출발
-아침식사(순두부백반)
-노곡2리 마을회관 도착
남산 새갓골 열암골석불좌상 및 마애여래입상
남산 양조암골 폐사지
남산 침식골 석불좌상
-점심식사
-율동리 마애열반상 도착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산행복/배낭/등산화/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1월 폐사지학교 참가비는 24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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