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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중립적이어야 할까?

[정치 기사 뒤집어 보기] 한국 정치 보도의 정파성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대학 등록금 인하를 촉구하는 시위가 크게 열렸다. 시위는 한두 차례로 그치지 않았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시위 장소인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다 오곤 했다. 2학기에는 한·미 FTA 반대 시위가 열려, 주제만 다를 뿐 1학기와 같은 방식으로 참여했다.

그곳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겉보기엔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 같던 사람도,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나름의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그런 생각을 들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괜히 '나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다." 문득 나도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에 한 번 치러지는 선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시민은 '정치(政治)'를 경험하지 못한다. 언론을 통해 구경할 뿐이다. 정치적인 것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데에는 정치의 책임만큼 언론의 책임도 크다. 시민들은 정치를 혐오하는 만큼, 정파적인 언론을 혐오한다. 이 글에서는 언론이 정파성을 갖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돌아보려고 한다.(☞ 관련 기사 : '정치 혐오' 유발자는 누구?)

우리 사회에는 언론이 특정 사안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래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기자 개인이든, 언론이든 완전한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자가 취재를 시작할 때 이미 기자의 문제의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언론은 또 이를 '편집'한다. 언론은 특정 시간에 발생한 여러 사건 중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선택해 보도한다. 결국 언론은 어떤 관점에 기대어 사건을 보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점은 언론의 정파성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정파성이 종종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여러 언론사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정파성에 따라 극단적인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잦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표한 '2014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신문사의 정치적 편파성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71.5%, 방송사의 정치적 편파성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66.7%에 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언론이 진영논리에 부합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근거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은 심각하다.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오래된 사진을 가져온다거나, 응답률이 낮은 여론조사를 남발해 입맛에 맞는 여론을 조성하기도 한다.

△ 채널A, 12년 전 사진을 '세월호 폭력집회' 사진으로(<미디어오늘> 5월 7일 자)
△ '응답률 18.8%' 중앙일보 여론조사···통진당 해산, 찬성 64% 반대 24%’(<경향신문> 2014년 12월 12일 자)

▲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을 보이는 언론은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채널A는 지난 5월 6일 세월호 집회의 폭력성을 강조하며 2003년 집회 사진을 사용한 바 있다. ⓒ채널A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은 지난달 7일 정치발전소 정치기사 모니터링팀과의 좌담회에서 한국 언론의 정파성이 자사 이기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라 설명했다.

"언론사 또한 기업이다. 그런데 기업의 논리가 정치적인 사안을 보도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특히 2000년대에 많아지고 있다. 자사 이기주의가 보도에 반영된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이것이 1980~90년대 언론과 2000년대 언론의 차이기도 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97년의 IMF사태를 겪으며 언론사 또한 경영의 위기를 겪게 만들었고, 2000년대 인터넷의 활성화는 언론 시장의 과당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언론사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적 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

언론사가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독자에게 기사를 팔거나, 독자를 팔아서 광고를 유치하는 것이다. 언론사의 바람직한 수익 창출 방법은 좋은 기사를 생산하는 것이다. 좋은 기사를 생산하면 독자들이 많아진다. 독자들이 많아지면 판매 수익과 광고 수익이 올라간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이와 같은 선순환을 이뤄내지 못했다. 한국의 언론은 좋은 기사를 팔기보다 무리하게 정파성을 팔아서 자사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사실과 사실 관계에 소홀한 기사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말하는 '정당-언론 병행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론이 정당과 밀접하게 공조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공조는 언론사가 독자들을 늘리기 위해 독자들의 정치적 성향을 기사 생산에 반영하고, 언론사 경영진이 편집에 영향을 끼치면서 고착된 것이다.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해 점점 더 선정적인 기사를 만들고, 기존의 독자들을 더욱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 편향된 기사를 쓰는 경쟁을 하다 보니, 진영논리에 의해 틀린 사실까지 보도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파성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 반(反)노조 정서를 가진 언론사가 일부 고소득 직군의 노조를 '귀족 노조'로 낙인찍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노조를 조직하고, 파업을 준비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정확한 사실과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시민들 사이의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갈등이 잦아진다.

△ 부동산·주식 팔아 임금 올려달라는 현대重 노조 (<국민일보> 10월 5일 자)
△ 청년일자리 뺏는 귀족노조 '고용세습' (<한국경제> 2월 11일 자)

이재경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저널리즘의 위기와 언론의 미래'(2004)에서 "우리사회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현실인식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희망이 될 것이고, 현실에 대한 논리적 토론도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

정치학자 사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대중의 권력을 사소한 문제들에 사용함으로써 이를 낭비하는 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을 왜곡하는 정파성 또한 대중의 관심사를 잘못된 곳에 집중하도록 해 이를 낭비한다.(☞ 관련 기사 : "김무성, 노동개혁은 흥정 대상 아냐" 속뜻은?)

이재경 교수는 '한국의 저널리즘과 사회갈등: 갈등유발형 저널리즘을 극복하려면'(2008)에서 정파성이 만연한 한국 언론의 부정적 관행을 '갈등유발형 저널리즘'으로 정의했다.

"객관적 현실을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도록 보도하는 일은 정상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보도행태가 거의 매일 유수한 신문과 방송에서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정파성이 나쁜 것은 아니다. 언론은 정파적이면서도 언론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다. 언론의 본분은 무엇인가? 현대 언론학의 대부 빌 코바치(Bill Kovach)와 톰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한국언론진흥재단 펴냄)에서 그 대답을 제시했다.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53쪽)
"저널리즘의 중심 목적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자치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12쪽)

언론의 제1원칙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관계를 철저히 검증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정당한 정파성과 정당하지 않은 정파성을 구분할 수 있다. 진실성을 지키는 한, 언론의 정파성은 정당하다.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언론이란 있을 수 없다.

안수찬 기자는 앞서 언급한 좌담회에서 신문의 정파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의 영역은 가능한 그대로 전달하되,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프레임이나 견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독자가 더욱 적극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독자들은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정리해서 받아들일지 결정해줄 비판적인 사고의 기준을 원하기 때문이다."

좋은 관점은 사안의 맥락과 이면을 보여준다. 사안을 보는 관점으로서, 적절한 정파성은 사실 관계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정파성은 수단이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언론 본연의 목적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정파성(수단)이 사실(목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론은 자신의 정파성을 오히려 투명하게 드러내고 독자가 판단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스스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진실만을 전달하고 있다고 내세우는 언론은 위험하다. 독자는 언론사들의 다양한 관점 사이에서 사안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 예능이 정부의 광고였어?(<시사IN> 9월 23일 자)
△ 정부 인터넷 광고, 보수 성향 매체에 몰렸다(<한겨레> 9월 29일 자)

<시사IN>의 기사는 고용노동부가 교묘한 수법으로 광고를 청부했음을 알린다. 예능 프로그램과 신문의 기사가 사실은 고용노동부의 정책 홍보였음을 드러냈다. 예능을 보고 기사를 읽는 독자는 한 기사당 몇천만 원씩, 한 해에 50~60억 원씩 고용노동부의 예산이 언론사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겨레>의 기사는 정부가 인터넷 매체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광고를 편향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처럼 실제로는 국민의 세금이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향적으로 분배되고 있다. 언론이나 기자 개인이 신념으로 가지는 자연스러운 정파성이 아니라 이처럼 정부나 기업의 광고에 매달리는 자사 이기주의에 의한 정치적 편향성은 위험하다. 정부의 정책 홍보성 기사를 내보내는 것 자체로도 잘못되었지만 독자에게 해당 기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투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점 또한 문제다.

정파성은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더 낫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애초에 공적인 개념이다. 언론 또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한국 언론이 정부와 기업의 광고를 얻기 위한 사적 이익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띄고, 이러한 편향이 사실까지 왜곡하는 상태는 크게 잘못됐다. 이처럼 불투명한 관행이 정치와 언론에 대한 불신, 정파성에 대한 불신을 키워왔다. 이제 언론이 기사 작성의 목적과 과정을 독자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올바른 정파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어 자유롭게 논의가 이루어질 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정치실험공동체 '정치발전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으로, 소위 '정치 후진국'이라 평가받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 혐오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할 수 있는 정치기사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좋은 정치 기사'를 판별하는 팀 나름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 지난 석 달 간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정치 보도가 △반정치주의를 부추기지는 않는지, △정치적 갈등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그리지는 않는지, △의회 민주주의의 역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진 않는지, △정치권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편견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등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은 지난 세 달 간의 세미나를 통해 얻은 문제의식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져 보려 합니다. 총 10회에 걸친 '정치 기사 뒤집어 보기' 연재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정치와 시민의 삶을 가깝게 만드는 정치 기사가 많아지길 기대하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정치발전소 홈페이지 http://politicalpowerplan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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