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기운으로 꽉 찬 1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는 제44강으로 8일(일) 당일로, 한양도읍의 주산인 백악(白岳, 북악)과 도성 안 풍광 좋은 삼청동천,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속살과 같은 그윽한 계곡인 백사실계곡[白石洞天]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제44강은 11월 8일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45-6(삼청동길 111-2)) 앞에서 모입니다. (총리공관 오시는 길 : 지하철 1호선은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서울프레스센터 방향으로 나와 서울프레스센터 앞에서 11번 마을버스를 타고 삼청동주민센터에서 하차, 건너편에서 조금 후진하십시오. 3호선은 경복궁역에서 동문쪽으로 나와 길 건너 법련사 앞에서 11번 마을버스를 타십시오.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풍문여고→정독도서관→삼청동길로 약 15분 걸어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리공관 앞-삼청동문 암각글씨-맹사성집터-북촌입구-숙정문-곡성-백악-창의문-무계정사 터-윤응렬별장-백사실계곡(백석동천 암각글씨/월암/별서터)-조지서터-장의사 당간지주-점심식사 겸 뒤풀이(할머니두부집)-이북5도청-탕춘대능선-암문-상명대학교-홍지문-오간수문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한양의 주산 백악과 삼청동천·백석동천>에 대해 들어봅니다.
한양도읍의 주산, 백악
백악(白岳)은 한양도읍(漢陽都邑)의 주산(主山)으로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달리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립니다.
백악(白岳)이라 함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시고 진국백(鎭國伯)에 봉하였기에 신사의 이름을 따라 백악으로 불렀습니다. 면악은 고려시대에 불리던 이름으로 남경(南京)을 설치하려고 궁궐터를 찾던 중 “삼각산의 면악 남쪽이 좋은 터”라는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면악 남쪽에 남경의 궁궐인 연흥전(延興殿)을 지은 것으로 보이며 그곳이 지금의 청와대 자리이고 면악은 바로 지금의 북악을 일컫는 것입니다.
공극산이라 함은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백악을 ‘북쪽 끝을 끼고 있다’라는 뜻으로 ‘공극(拱極)’이라 이름지어준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백악은 세 개의 수려한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악의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白雲洞天)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백악의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휘감아 흐르는 삼청동천(三淸洞天)이며 마지막으로 도성 밖인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흐르는 백석동천(白石洞天)입니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은 도성 안의 청계천으로 흘러들고 백석동천은 도성 밖 홍제천(弘濟川)으로 흘러듭니다.
도성 안의 경치 좋은 다섯 골짜기로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 백악의 동쪽과 서쪽에 삼청동천과 백운동천, 낙산의 서쪽 쌍계동천, 목멱산 북쪽의 청학동천을 일컫는데, 그중에서도 삼청동천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삼청(三淸)이란 이름은 도교(道敎)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을 모시는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졌다고도 하고 달리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는 사람 또한 맑아서[人淸]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삼청동천의 다른 이름으로 국무총리공관 건너편 바위에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숙종 8년(1682년)에 명필가인 김경문(金敬文)이 쓴 것으로 400여 년이나 되는 문화유산입니다만 지금은 아쉽게도 건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고 까치발을 하거나 발돋움하면 글씨의 윗부분만 조금 보일 뿐입니다.
수려한 골짜기를 일컬어 흔히 ‘동천(東天)’이라하고 달리 동천(洞川), 동문(同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같은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자연부락을 일러 동(洞)이라 부른데서 연유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동천에 하늘 천(天)자가 사용된 연유는 수려한 골짜기에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들도 하늘에서 그곳에 내려와 노닐었기에 그리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삼청동천에는 옥호정(玉壺亭)이라는 김유근의 별서(別墅)가 있었는데, 순조의 장인으로 외척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이 자기의 별서로 사용하다가 아들인 유근에게 물려준 것으로, 삼청동길의 서쪽 언덕 위, 현재 칠보사(七寶寺)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삼청동의 동쪽 골짜기와 서쪽 골짜기 사이에는 서촌(西村)의 다섯 사정(射亭)의 하나로 꼽히던 운룡정(雲龍亭)이라는 활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새겨진 ‘雲龍亭’이라는 세 글자로만 옛 자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서촌5사정이라 함은 삼청동의 운룡정을 비롯하여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太極亭이라고도 함)과 등과정(登科亭), 그리고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 風嘯亭이라고도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청풍계천(淸風溪川), 청계천의 발원지
백운동천은 백악의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으로 인왕산의 옥류동천과 물줄기가 합쳐져 청계천으로 흘러듭니다. 이곳에는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공부하던 성수침(成守琛)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이 처형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초막에서 두문불출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았다는 청송당(聽松堂) 옛터가 있었고, 그 흔적은 지금도 경기상고 북쪽 담장 아래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악 남쪽 기슭에 있는 육상궁(칠궁) 뒤쪽에서 경복고등학교 후문과 만나 골짜기를 이루는 곳에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이며 중종 때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숙청한 후 좌의정과 영의정에 오른 지정(止亭) 남곤(南袞)의 집이 넓은 바위 대은암(大隱岩)과 두 물줄기가 합쳐져 떨어지는 만리뢰(萬里瀨) 아래에 있었습니다. 계관시인(桂冠詩人)이던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유적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고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통해서 그 풍광을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은암과 만리뢰의 이름이 생겨난 연유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남곤은 벼슬이 정승에 오르자 새벽에 입궐하여 남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아져 남곤의 집에 자주 놀러온 박은이 함께 놀 수 없음을 빗대어 “바위를 주인이 모르니 꼭꼭 숨어 있기 때문이요 여울이 있다 해도 만 리 밖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굴욕의 항복을 한 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중국으로 인질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고 비통한 마음을 읊었던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主戰派)의 선봉인 김상헌(金尙憲)의 집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절의(節義)를 일컫는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歲淸風)’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백세청풍 네 글자만 남아 있고 그것도 개인집 마당 안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쪽의 계곡을 백세청풍에서 말미암은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은 한양도성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청계천(淸溪川)의 이름도 바로 이 계곡의 물줄기 이름인 ‘청풍계천’에서 따왔습니다.
삼청동천을 벗어나 동쪽 언덕 위에 올라서면 북촌(北村)의 정겨운 한옥들이 즐비하고 최근에는 대부분 리모델링한 조그만 박물관들이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볼거리를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을 북촌의 모습이라고 관광코스에 들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원래 한양의 북촌(北村)이라 함은 출사(出仕)한 사대부들이 사는 곳으로 그 사대부들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행랑채의 많은 칸(間)수의 집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집터로는 종로구청 자리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집터였고 헌법재판소 자리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 홍영식(洪英植)의 집터였으니 그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의 높은 산등성이에 들어선 작은 한옥들은 일본 강점기인 1930년대에 주택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한옥 형식을 갖춘 집단주택을 공급한 것입니다. 한옥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재는 현대적 건축자재가 섞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집단적인 주택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산줄기가 백성들이 궁궐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 궁궐에 딸린 정원인 유원이 있었던 자리였기
대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기구한 숙정문의 운명
이 언덕과 이어진 삼청공원을 지나 북쪽 능선을 오르면 비로소 백악의 품에 들게 되며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한양도성의 북대문(北大門)인 숙정문(肅靖門)으로, 원래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습니다.
숙정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태종 때 풍수학생 최양선이 창의문(彰義門)과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며 상소를 올려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과 숙청문을 폐쇄하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이후로 숙정문은 계속 닫혀 있었는데 다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시기에만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북쪽은 음(陰)과 수(水)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과 화(火)에 해당되기에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정문은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고 장마가 져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때는 남문인 숭례문을 열고 북문인 숙정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창의문은 인조 때부터 문이 열렸는데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반정 군인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를 등극시켰으므로 창의문은 그들의 개선문이기에 그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숙정문은 최양선의 상소가 없었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도성의 북문으로서 성 밖을 나서면 그 길이 한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이어져야 하는데 삼각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숙정문보다 훨씬 동쪽에는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곳에 혜화문(惠化門)이 있어 이 문을 이용하면 쉽게 경원가로를 오갈 수 있기에 숙정문은 만들 당시부터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문인 것입니다. 숙정문에서 창의문에 이르는 성곽 주위에는 태종 때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도 잘 자란 소나무가 많이 널려 있습니다.
백악의 정상에 이르기 전에 성곽은 북쪽으로 툭 불거져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데 많이 굽은 성이라고 해서 이곳을 ‘곡성(曲城)’이라 합니다. 인왕산에도 선바위 위편에 무악재 쪽으로 툭 불거져 나온 성곽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곡성이라 부릅니다. 이곳 곡성에서 북쪽을 조망해 보면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어떻게 한양도성으로 그 기운을 뻗쳐오는지 지세(地勢)를 잘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보현봉(普賢峰)과 문수봉(文殊峰) 사이에서 갈라지는데 문수봉에서 한줄기는 서쪽으로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을 지나 의상봉까지 북한산성을 이루며 뻗어가고, 또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수리봉을 지나 불광동 쪽으로 내려섭니다. 또 하나, 보현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는 국민대학교 뒤편의 형제봉을 지나 북악터널 위에 있는 보토현(補土峴)으로 내려섰다가 북악스카이웨이가 있는 구준봉(狗僔峰)을 넘어서 마침내 한양도성의 성곽과 만나 백악에 이르고 그 지세는 경복궁으로 이어집니다.
백악 정상에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로 위용을 뽐내는 바위가 있습니다.
청와대의 바로 뒤편이라서 많은 것이 자유롭지 않고 특히 사복을 입은 군인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념사진만 찍고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백악 정상에서 창의문까지 내려오는 길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놓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조금은 힘든 구간이나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그야말로 장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정면으로는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인왕산의 주능선이 서북쪽으로 길게 누워있고 그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이 하안 띠를 두른 듯이 백악 아래 창의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성 밖 오른쪽에는 경치 좋기로 이름난 자하문(紫霞門) 밖 세검정 일대가 문수봉에서 향로봉으로, 그리고 탕춘대(蕩春臺)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아래로 펼쳐져 있습니다. 창의문은 달리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는데 <실록(實錄)>에는 많은 곳에서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창의문 올라가는 기슭에 장의동(藏義洞)이 있어 장의동에 있는 문, 즉 장의문으로 쉽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창의문도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최양선의 건의에 따라 태종 시대부터 문이 폐쇄되었습니다만 인조반정 때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하여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했는데 이때 도끼 한 자루로 창의문을 열었습니다. 반정공신들에게는 창의문이 개선문과 같은 것이어서 이때부터 문은 열리고 특히 영조는 이곳에 들러 반정을 기리는 시를 짓고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창의문에 걸게 하니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 옆길로 인왕산에 오르는 골목길에 오르면 이곳에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개화파이면서 일제에 충성한 친일파 윤웅렬의 별장, 옛 오진암을 이건한 무계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현장
무계정사(武溪精舍)는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으로, 안평대군이 박팽년(朴彭年)과 꿈 속에 노닐던 도원(桃園)의 모습을 당대의 최고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한 것이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인데 꿈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보다가 이곳에 이르러 여기에 무계정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무계정사터는 ‘현진건 집터’ 안쪽에 ㄱ자 집으로 다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잡초에 묻혀 있으며 그 아래 동쪽 바위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암각글씨가 있습니다.
윤웅렬(尹雄烈)은 개화파로서 갑신정변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3일천하’로 끝나는 바람에 화순 능주로 유배갔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군부대신이 되었고 이어 ‘춘생문사건’으로 상해로 도망갔다가 몇 년 뒤 귀국하여 다시 법무대신이 되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는 등 친일파로 살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아들 윤치호(尹致昊)는 독립협회와 신민회를 통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대성학교의 교장도 지낸 바 있으나 1911년 ‘105인사건’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는 아버지가 걸어 왔듯이 친일 행각을 하게 됩니다.
이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집만 있었으나 상속받은 셋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1930년대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광채를 구비한 한옥을 증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주인은 윤씨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무계원(武溪園)은 조선말 서화가(書畵家)인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의 집이었던 오진암(梧珍庵)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오진암은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요정정치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으나 그곳에 호텔이 들어서면서 부암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는데 목재는 모두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고 기와만 오진암 것을 사용하였으며 지금은 회의와 세미나 장소로 임대를 해주고 있습니다.
창의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를 오르면 북악에서 서쪽으로 뻗친 산줄기를 만나게 되는데 이 능선이 백석동천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입니다. 최근에 이 산등성이에는 조그맣고 다양한 카페가 많이 들어섰고 지금도 길가 빈 터마다 경쟁적으로 카페 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백석동천은 달리 백사실(白沙室)계곡이라고도 합니다만 이러한 별칭 때문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유적지로 잘못 알져지기도 했습니다만 이항복과는 무관한 유적입니다. 유적지에 현재 남아있는 많은 주춧돌로 보아 1830년대에 지어진 600여 평의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서쪽 언덕 위에는 ‘월암(月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고 계곡의 상류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습니다.
별장이 지어진 시기와 규모 그리고 위치를 살펴보더라도 궁궐의 바로 뒤편에 이 정도 큰 규모의 별장을 짓는다는 것은 그 당시 세도정치를 하고 있던 안동 김씨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악을 중심으로 자하문 밖에 김흥근의 별장 삼계정(三溪亭), 삼청동천의 김유근의 별장 옥호정(玉壺亭)과 함께 백석동천의 별장 또한 안동 김씨의 별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미완의 성, 탕춘대성(蕩春臺城)
자하문은 창의문의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 밖’이라 함은 지금의 세검정,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일대를 말하며 이 능선이 내려서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세검정과 조지서터 그리고 탕춘대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오위영(五衛營)의 하나로 도성 밖 북쪽을 경비하는 총본부인 총융청(摠戎廳)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의 지명이 신영동(新營洞)인 것도 새로운 군영(新營)이 들어서서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는 백제와의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郞), 두 화랑을 기리기 위해 신라시대에 세워진 장의사(壯義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연산군(燕山君) 대에 이 절을 작파하고 놀이터로 만들고 그 이름도 ‘봄에 질펀하게 논다’는 뜻으로 탕춘대(蕩春臺)라 하였습니다.
장의사의 유적은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남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총융청(摠戎廳)이라는 새로운 군대가 이곳에 주둔했고 가까운 곳에는 군수품을 지원하기 위한 평창(平倉)이 들어섰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평창동(平倉洞)과 신영동(新營洞)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검정(洗劍亭)이라는 명칭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반정의 주역들이 칼을 씻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보다는 총융청(摠戎廳)이 이곳에 있었기에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쉬면서 칼을 씻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검(洗劍)’이란 단순한 칼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칼을 씻어 칼집에 넣어 둠으로 해서 더 이상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는데 이 계곡의 물이 너무 맑아 한번 사용한 한지의 먹물을 씻어내고 넓은 바위에서 말려서 다시 종이로 만들었던 곳입니다.
점심식사 겸 뒤풀이는 산꾼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맛집인 구기터널 입구 ‘할머니 두부집’에서 두부찌개와 콩비지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여 즐길 예정입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쌓다만 탕춘대성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탕춘대 능선을 걷고자 합니다.
북한산 향로봉(香爐峰)에서 인왕산으로 뻗어 있는 능선 상에는 허물어진 것 같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고 부릅니다. 탕춘대성은 숙종대(肅宗代)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다가 중단한 미완의 성(城)입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가 허술하여 서해로 침입한 적들이 한강의 난지도(蘭芝島) 어름에서 홍제천(弘濟川)을 따라 쳐들어오면 바로 한양도성의 북소문(北小門)인 문인 창의문(彰義門) 밖에 이르는 도성 방위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잇는 보조성(補助城)을 쌓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의 계획은 북한산성의 문수봉(文殊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인 향로봉에서 한양도성의 인왕산에 이르는 부분과 북한산성의 보현봉(普賢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인 형제봉에서 보토현(補土峴)을 지나 한양도성의 북악에 이르는 부분에 성을 쌓기로 하였으나 인왕산에 이르는 부분만 공사를 시작하였고 그것도 미완성의 상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탕춘대성은 쌓다만 성이지만 세 곳에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구기터널 위에 위치한 암문(暗門)이고 나머지 둘은 상명대학교 앞에 있는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성(城)을 쌓게 되면 사람이 왕래(往來)할 문(門)을 내야하고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물길도 내야 합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에서 사람이 다니는 공식적인 정문(正門)이고 암문은 비공식적인 비밀통로인데 정문은 누각이 있고 암문은 누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간수문은 물이 지나갈 길을 다섯 개의 홍예문(虹霓門)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오간수문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화, 등산복, 배낭),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그리고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세요(미지참시 백악 성곽지역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서울학교 참가비는 5만5천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현장에서는 참가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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