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국토 삼천리를 되살린 인물"이라는 극찬과 "'완당평전'에만 해도 오류가 200군데가 넘을 정도로 유명세 만큼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학자"라는 혹평은 '학자 유홍준'의 면모일 뿐이다.
민청학련 구속자 출신답게 진보진영 인사들과 교분이 두텁고 지난 2004년 문화재청장 임명당시 '코드인사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 유 청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물론 재벌가와도 사이가 돈독한 편이다.
대선 당시에는 '유 청장이 한나라당 쪽에 줄을 대고 재임 운동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여하튼 '입담 좋은 마당발'이라는 평가에는 이론이 없는 인물이다.
환호와 비난이 교차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
유 청장은 지난 2003년 차관급으로 격상된 국립박물관장직을 희망했었고 임명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장은 대한민국 정부나 문화계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가 아니기에 사회적 지명도나 정치력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선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학계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와중에 "유홍준은 전서와 예서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다", "대중성은 높을지 몰라도 품격도 떨어지는 인물이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 청장은 2004년 9월 차관급으로 격상된 문화재청장에 임명됐다. 그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언젠가 유홍준 카드를 써먹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고 전문가 집단과 시민단체들도 국립박물관장 거론 때와는 달리 "대중성이 높은 유홍준 교수가 관료주의에 빠진 문화재청을 혁신할 적임자"라고 한목소리로 환영했다.
이 와중에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장, 김용배 예술의전당사장, 이영욱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등이 모두 유 청장의 학과 동문이라는 사실도 화제에 올랐다.
유 청장의 임명과 함께 문화재청은 확실히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광화문 복원, 서울 성곽 복원, 청와대 인근 개방, 여러 문화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덕수궁 경내 파티, 왕릉 취사 사건 등 자잘한 물의도 끊이지 않았다. 광화문 복원 과정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정조의 어필을 집자한 현판을 달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가 한나라당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유 청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개혁, 수도이전 추진, 학계의견 중시 등을 이유로 "정조와 닮으셨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 광화문 복원이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됐던 것.
사소하다며 사소할 수 있는 이런 문제 외에 유 청장은 2005년 6월 낙산사 전소 사건, 2006년 10월 복원된 낙산사 동종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사건 등으로 인해서도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았지만 살아남았다.
또한 정부조직개편 과정에서도 유 청장은 대운하사업과 연결시켜 문화재청의 권한을 확대시키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에는 대운하사업 시 문화재 발굴요원 확보를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을 문화재청 휘하로 편입시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유 청장은 현 정부 임기를 불과 2주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숭례문 화재로 인해 불명예 퇴진의 상황에 처했다.
유홍준은 누구인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미술사학 대학원,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대학 재학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년간 복역했다. 이로 인해 이해찬 전 총리, 정동영 전 장관 등과도 교분이 오래됐다. 미술잡지 <공간>과 <계간 미술>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영남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을 거쳤고 현재 명지대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조선시대 화론연구>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 <화인열전 상,하>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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