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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을 키운 아산고을과 왕실온천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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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충무공을 키운 아산고을과 왕실온천 온양

10월 고을학교

가을볕 따스한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24강으로, 충남 아산(牙山)고을을 찾아갑니다. 아산은 북쪽으로는 아산만 넘어 넓은 평야지대인 평택과, 서쪽으로는 삽교천 건너 당진과, 남쪽으로는 광덕산 아래 공주·예산과, 동쪽으로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철도를 경계로 천안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산의 역사유적들은 동쪽에는 배봉산 아래 온양읍치구역이, 서쪽에는 영인산 아래 아산읍치구역과 덕암산 아래 신창읍치구역이, 남쪽에는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이, 북쪽에는 월주산 아래 해평 윤씨 마을이 들어서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현충사 가는 길의 황금터널 ⓒ아산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4강은 10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온양읍치구역(온주아문/동헌/온양향교/읍내동당간지주)-온양행궁지역(신정비/어의정)-충무공유허(현충사/충무공묘)-파평윤씨가옥(윤보선생가/윤승구,윤제형,윤일선가옥)-점심식사 겸 뒤풀이-아산읍치구역(여민루/아산향교/공서곶창지)-신창읍치구역(신창향교/김육비/신창척화비)-외암마을(건재고택/외암리참판댁)-맹씨행단-서울의 순입니다.

▲아산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4강 답사지인 아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고을의 역사적인 근원은 온양

아산의 산줄기는 남쪽이 높고 동, 서, 북쪽이 낮은데 남쪽의 높은 산줄기는 태화산, 망경산, 광덕산으로 이어져 있고 다른 쪽은 작은 구릉이 발달해 있으며 작은 구릉들 자락에 여러 역사유적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산의 물줄기는 아산을 가로지르는 곡교천(曲橋川)이 동에서 서로 흐르면서 설화산에서 발원한 온양천(溫陽川)과 천안에서 흘러온 천안천(天安川)을 받아안고 흐르다 예산에서 발원한 삽교천(揷橋川)과 합류하여 아산만(牙山灣)에 흘러듭니다.

아산은 온양과 합쳐지면서 아산으로 불리고 있으나 고을의 역사적인 근원은 온양에 두고 있습니다.

온양은 대표적인 온천 지명으로 백제시대에는 탕정(湯井)이라 하였는데, 서기 18년(온조왕 36)에는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과 나누어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고 하며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671년(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681년(신문왕 1)에는 탕정군으로 격하시켜 웅주(熊州)에 예속시켰습니다.

927년(태조 10)에 고려 태조가 탕정군에 와서 유금필(庾黔弼)에게 명하여 성을 쌓았고 940년에 탕정군을 온수군(溫水郡)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후 1414년(태종 14)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고 개칭하였다가 1416년에 나누어서 온수라 하고 현감을 두었으며 1442년(세종 24)에는 왕이 온천을 와서 온양군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914년 온양, 아산, 신창의 3개 군을 통합하여 아산군을 설치하였고 1941년 아산군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6년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 분리되었다가 1995년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아산시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아산에는 온양, 아산, 신창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온양의 읍치구역에는 관아의 문루(門樓)인 온주아문(溫州衙門)과 동헌(東軒)이 남아 있습니다. 온주아문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은 온양이 신라 문무왕 3년(663)에 군 이름을 온주(溫州)라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며, 아문은 2층의 문루 건물로서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위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동헌은 아문에서 약 50m 북쪽에 있으며 조선시대 온양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1928년부터 일제의 주재소, 해방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에 맞춰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93년에 수리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문은 고종 8년(1871)에 중건된 건물이며 동헌은 여러 차례 변형되었으나 아문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건물로 <여지도서(輿地圖書)> 온양군 공해조에는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 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2동의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아산의 읍치구역에는 여민루(廬民樓)라는 아산 관아의 문루가 남아 있는데 동향한 낮은 기단 위에 4각 형의 주형 초석을 배열하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서 누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정면에 ‘여민루’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신창의 읍치구역에는 관아 등의 시설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읍치구역 안에 김육비와 척화비가 남아 있습니다.

김육비(金堉碑)는 조선 현종 원년에 김육이 대동법을 주창, 시행한 것을 송덕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김육은 1580년부터 1658년까지 활약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제정책에서 공물법을 폐지하고 미포로 대납하는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하여 효종 2년(1651)에는 충청도, 8년에는 전라도 연안지방에 이를 실시케 했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순치 17년’으로 보아 비석의 건립 연대는 조선 현종 원년인 1660년으로 추정됩니다.

신창척화비(新昌斥和碑)는 신창면 읍내리의 신창초등학교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충남에는 홍성과 이곳에만 있습니다. 척화비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병인, 신미양요를 겪자 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하면서 척양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서울 종로와 지방 각처에 세웠습니다.

▲맹씨행단.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초롱둘

온양향교·아산향교·신창향교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으로 아산에는 온양향교, 아산향교, 신창향교가 남아 있으며 모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온양향교(溫陽鄕校)는 원래 아산시 법곡동(능뫼)에 있었는데 임지왜란 시 소실되었던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중국의 사성오현(四聖五賢)과 이철(二哲),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산향교(牙山鄕校)는 아산리 동쪽 향교골에 있었던 것을 선조 8년(1575) 토정 이지함(李之함)이 아산현감으로 있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중국의 사성오현(四聖五賢)과 사철(四哲), 그리고 국내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신창향교(新昌鄕校)는 조선 숙종 때 건립했다고 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고종9년(1892)에 관학 강화책에 따라 왕경열이 신창현감으로 있으면서 도고산에 있었던 진주사라는 사찰을 이건하여 향교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성오현과 이철, 그리고 국내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온양온천은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여 년이 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칭하여졌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온 기간은 약 600여 년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이 온궁(온양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사례가 많고 신정비, 영괴대, 어수정 등 다수의 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어 왕실온천이라 일컫습니다.

신정비(神井碑)는 세조가 1468년(세조 14)에 충청도를 순수하고 속리산 복천사를 거쳐 환도하다가 온양에 주필(駐蹕)하고 있을 때 온천 곁에 있는 냉천을 발견하고 이를 신정이라고 칭한 것을 기념하여 성종 7년(1476)에 건립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온탕이 있던 온양에는 국왕의 행차가 자주 있었으며, 그 때문에 온궁이 건립되기도 하였는데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이 이곳 온천을 다녀갔습니다.

어의정(御醫井)은 세종대왕이 안질 치료 차 온양에 왔을 때 치료했다는 우물로, 어천(御泉), 어정수(御井水)라고도 불리는 우물로, 1989년 7월 공주사범대 박물관에서 유적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우물의 기본적 시설은 변형되어 있으나 본래의 우물에 설치하였던 상부 구조의 석조물은 주변에 흩어져 있어서 이들 석재를 모아 재구성하여 너비 107cm, 길이120cm, 높이 50cm 규모의 우물 상부시설이 복원되었습니다.

영괴대(靈槐臺)는 1760년(영조236) 8월에 영조가 온양의 온궁에 행차했을 때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가 따라와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으로, 당시에 장헌세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온양군수 윤염에게 명하여 사장에 3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게 하였으며, 정조19년(1795)에는 온양군수 변위진과 충청도 관찰사 이형원에 의해 나무 둘레에 대를 만들었습니다.

공사가 끝난 후 관찰사가 조정에 장계하자 정조는 대의 옆에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영괴대비입니다. 비의 정면에 영괴대라고 정조가 어필하였으며, 후면에는 어제 영괴대명을 윤염의 아들 윤행임이 글을 썼습니다. 정조 19년(1795)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영괴첩>의 온양별궁전도에는 내정전, 외전전, 탕실 등의 중앙 내부전각과 외각사면의 궁장, 사문, 각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산에는 관방유적으로 배방산성, 영인산성, 신창학성, 물앙산성, 꾀꼴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배방산성(排芳山城)은 천안에서 아산으로 가는 국도 남쪽에 있는 성재산에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인데, 둘레 1,500m인 성벽은 상당 부분 파괴되어 있지만 성의 남쪽 성벽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합니다.

그리고 성벽은 하단보다 상단을 약간 내경(內頃)하도록 5∼6m 정도 높게 축조되었고 성안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 곳 있으며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토기편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영인산성(靈仁山城)은 곡교천 북안의 가장 높은 영인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어 주변 일대에 대한 전망이 매우 좋으며, 정상부와 계곡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산성입니다.

물앙산성과 꾀골산성은 음봉면에 위치한 산성으로 두 성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물앙산성은 수한산성(水漢山城), 꾀골산성은 앵리산성(鶯里山城)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졌으며 옛 모습을 간직한 구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창학성(新昌鶴城)은 신창면 읍내리 뒷산인 표고 183m의 학성산 정상부에 축조된 석성으로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성벽은 치석된 석재를 이용하여 하나하나 바르게 쌓아 올렸으며, 전체적으로 옛 모습이 그대로 잘 남아 있습니다.

아산 공세곶고지(牙山公稅串庫址)에 공세곶창(貢稅串倉)이 생긴 것은 조선 성종 9년(1478)으로 현재 창고지 주변에 축조한 성지(城地)가 약 680m 정도 남아 있으며 다만 창지(倉址)만이 알아 볼 정도입니다.

최초에는 창고가 없이 노적하였으나 중종 18년(1523)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여 공주목 이하 임천, 한산, 전의, 정산, 은진, 회덕, 진잠, 연산 이산(노성), 부여, 석성, 연기 등 12군현의 세미(稅米)와 홍주목(洪州牧) 이하 서천, 서산, 태안, 면천, 온양, 평택, 홍산, 덕산, 청양, 대흥, 비인, 남포, 결성, 보령, 아산, 신창, 예산, 해미, 당진 등 19군현의 세미와, 그 외 청주목(淸州牧) 이하 천안, 옥천, 문의, 직산, 회인 등 6개현의 공세미(貢稅米) 등 합계 39개 목, 군, 현(牧. 郡. 縣)의 것을 납고시키고 다시 수로 500리 길을 선박으로 조운하여 한양으로 보냈으며 이곳에는 해운판관을 두었습니다.

▲와암마을 돌담길 ⓒ아산시
현충사, 충무공을 키운 곳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李忠武公遺墟)는 지금의 아산 현충사를 말합니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지금 인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덕수(德水), 부는 정(貞)으로 어릴 때 이곳으로 옮겨 살아 종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종가 앞에 우물, 활터 등이 보존중이며 종가에는 이충무공의 친필, <난중일기>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숙종 30년(1704)에 이곳 유생들이 사당 세우기를 상소하여 숙종 32년에 조정이 허락하여 사당을 세우니 국왕이 현충사로 사액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전 국민의 성금으로 현충사를 복원하였고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를 계획하여 본전을 비롯한 내삼문, 홍삼문, 정려, 정문, 고택, 충무정, 활터, 유물전시관, 그 외의 부대시설을 갖추면서 주변을 조경하여 충무공의 유허를 완전히 성역화하였습니다.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은 설화산을 서남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맹사성 정승이 심은 600여 년 된 은행나무와 고택이 있는데 이 건물은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최영 장군이 자기가 머물렀던 집을 손자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고 맹씨의 고택 유허로 생각됩니다.

고택 뒤에는 맹정승, 부친인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세덕사가 있으며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단이라 부르게 된 듯하나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인 행단이 된 것 같습니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고려와 조선시대 사람으로서 우왕 때 장원하고 세종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청백리로 여러 일화를 남겼으며 자는 자명이며, 호는 고불, 본관은 신창으로 온양 출신입니다.

외암마을에 얽힌 사연들

아산 외암(牙山外岩)마을은 설화산을 주봉으로 그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서쪽의 어귀는 낮고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진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서남향 또는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외암마을은 500여 년 전에는 강씨와 육씨가 살고 있던 혼성(混姓)마을이었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郎)을 지낸 이연(李延) 일가가 이 곳에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가 배출되자 마을이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고 집도 격이 있는 반가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이름이 외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연의 6세손인 이간(李柬)이 호를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에서 연유해 외암이라 불렀고, 그 후 언제부터인지 한자동음으로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건재고택(健齋古宅)은 외암리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옛집으로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이 1869년(고종 6)에 지금의 모습으로 짓기 시작하였으며 이상익은 예안이씨 외암 이간의 5대손으로 건재고택이 자리한 터가 바로 이간이 태어난 곳입니다.

건재고택은 설화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산세에 따라 서북향을 하였으며 또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집 안으로 유입하여 수경을 이루게 함과 동시에 화재에도 대비케 하였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ㄱ자형 집으로 마주하여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앞은 넓은 마당으로 연못과 정자 등으로 구성된 정원을 꾸몄고 설화산에서 흘러온 수로가 담장 밑에 설치된 입수구(入水口)를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낙차를 가진 작은 폭포가 되어 연못으로 떨어집니다.

건재고택에는 도자기, 낙관, 서화, 현판, 생활용구 등 대대로 물려오는 유물 3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특히 예안이씨 입향조 이사종이 골말에 세웠던 열승정의 기문(記文)과 1811년(순조 11) 외암 이간선생의 증직교지는 이 집의 터가 예안이씨의 최초 입향지라는 근거가 되며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건축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아산 외암리 참판댁(牙山外岩里參判宅)은 외암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큰집과 작은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규장각의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큰집의 사당과 작은집의 대문채, 사당은 20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큰집은 동남향, 작은집은 서남향으로 자리잡았고 돌담을 쌓아 아름다운 공간을 구획하고 있으며, 집안의 살림살이가 잘 보존되어 옛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전통가옥입니다.

아산의 둔포면 신항리에는 남으로 발달한 낮은 언덕 위에 해평 윤씨 집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작은 길이 나오며 그 안쪽으로 여러 가옥들이 한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尹潽善前大統領生家)는 마을 한가운데에 있으며 전체 평면은 ‘巴’자형으로 동남향을 축으로 하고 뒤쪽에 ㄱ자형 안채, 중간에 ㄴ자형 안사랑채, 바깥에 ㄴ자 행랑채를 둘러서 ‘日’자형을 만들고 동쪽 모서리에 ㄴ자 바깥사랑채를 배치했으며 행랑채는 길에 접하고 있으나 바깥사랑채에는 담을 둘러서 앞에 별도의 대문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선친인 윤치소(尹致昭)가 1907년에 지었다고 하나 바깥사랑채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윤승구 가옥(尹勝求家屋)은 해평 윤씨 일가들의 종가댁으로 불리며 사랑채와 그 옆으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문간채의 끝에 맞추어 담장을 쌓았으며 안채는 정면 ㄱ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1칸의 건넌방, 왼쪽으로는 2칸의 안방을 들였고 안방 앞으로 1칸의 부엌을 들였습니다.

윤제형 가옥(尹제亨家屋)은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형의 평면구도를 갖고 있어 중부지방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안채는 ㄱ자로 꺾어지는 툇마루를 두어 각 방을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잡석 기단을 쌓고 전면 왼쪽 3칸에 툇 칸을 두어 마루를 깔았는데 여기에서는 두루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윤일선 가옥(尹日善家屋)은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튼 ㅁ자의 평면구도로서 안채는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한쪽에 안방과 부엌이 있고 다른 쪽에 건넌방이 있는데 건넌방은 대청보다도 훨씬 높은 툇마루를 두어 변화있게 구성하였습니다.

아산의 불교유적으로는 세심사, 인취사, 오봉사, 용담사, 봉곡사가 남아 있습니다. 세심사는 신라 선덕왕대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경내에는 점판암으로 조성된 다층탑이 있으며 <신중도(神衆圖)>,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등 다양한 성보유물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취사는 신라 법흥왕대 창건된 사찰이라 전해지며 경내에는 인취사 석탑(仁翠寺石塔)이 있고 극락전에는 조선전기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상(阿彌陀三尊佛像)이 모셔져 있습니다.

오봉사는 설화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로 설화산의 또 다른 이름은 오봉산에서 그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경내에는 3층 석탑이 있습니다.

용담사내에 위치한 평촌리약사여래입상은 사실적 표현에 충실한 얼굴에서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거석불이며 이와 더불어 용화사내에 위치한 석조여래입상 역시 동일한 시기 조성된 거석불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봉곡사는 신라 진성여왕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웅전과 고방(庫房)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0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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