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마을 농장에 갔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날마다 자라는 상추며 쑥갓, 아욱을 뜯고, 방울토마토와 고추를 따고, 밭에 물을 주러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작물들이 옥수수와 콩으로 정리되고 해갈이 된 이후로는 드문드문 가곤 했지요.
그 날은 옥수수와 콩을 따러 갔습니다. 아~! 그런데, 너무 무심했던 탓인지 총 15개 정도의 수확량에서 반은 이미 쇠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늦게 심어서 먹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것치고는 훌륭한 수확량이었습니다. 아이는 난생 처음 옥수수를 따는 경험을 했습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아이와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수확을 마치고는 밭을 정리했습니다. 손이 안 가 길게 자란 풀을 뽑고, 옥수숫대와 마른 고춧대와 토마토 줄기를 뽑아 정리하고, 삽으로 흙을 뒤집어엎고 잘게 부수어 잘 고르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올해의 마지막 농사로 배추와 총각무를 심을 생각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에 소금만 조금 넣어 옥수수를 삶고, 나중에 밥 해먹을 때 넣어 먹을 요량으로 쇤 옥수수는 알맹이를 따서 냉동실에 넣어 두었습니다. 한참 지나자 집안에 구수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잘 익은 옥수수를 꺼내 쌓아 놓고 보니,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왠지 정겹습니다. 세 식구가 "뜨거워!" 연발하며 먹었습니다. 이 옥수수, 정말 맛있습니다. 소금만 넣었는데도 감미료의 단맛과 격이 다른 달콤한 맛이 납니다.
언젠가 옥수수 농사를 짓는 페이스북 친구가 "옥수수는 딴 그 자리에서 삶아 먹어야 제맛인데, 도시 사람들은 그 맛을 죽어도 모를 것"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3개째 옥수수를 먹으면서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좋은 음식이란 사람이 맛을 낸 것이 아니라, 음식 재료가 품은 자연의 맛을 잘 끌어낸 것'이란 생각을 했지요.
""식사는 농업 행위이다." 웬델 베리가 한 유명한 말이다. 우리가 음식의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 아니라, 음식 시스템의 공동 창조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사느냐에 따라 그 돈은 양과 편리와 "가격"을 추구하는 식품 산업으로 흘러들어 갈 수도 있고 질과 건강 같은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된 음식 사슬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음식을 사는 일에는 더 많은 돈과 수고가 든다. 하지만 이런 지출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투표 -넓은 의미에서 건강을 위한 투표- 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음식에 돈을 아끼는 일이 현명한 처사가 결코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
넘치는 건강 정보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많은 분이 특별한 무언가를 먹으면 병을 치료하고 좋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먹는 식사입니다. 그리고 음식 재료는 그 식사의 질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재료가 건강하지 않으면, 입이 즐거울 수 있어도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병든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다 보면 내 몸과 마음 또한 병드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생긴 병을 치료와 약으로 회복시킬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평생 약에 의존해서 살 수는 없으니 병의 예방과 치료, 그리고 좋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보다 본질적이고 기초가 되는 부분을 고쳐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때 건강한 음식을 먹는 행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내 몸을 만들고, 신체 기능을 유지하고, 정신 작용에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내가 먹은 음식이니까요.
앞서 인용한 책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방법의 하나로 농산물 직판장이나 CSA(공동체 지원 농업) 상자를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지역에서 실명제로 생산된 농산물을 파는 로컬푸드 판매장이나 여러 생활협동조합이 있습니다. 조금 불편할 수 있고 조금 더 큰 비용을 지출할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는 조금 더 건강한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곳을 이용한다면 내 가족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고, 더욱 많은 농부들을 작지만 단단하고 믿을 수 있는 음식 사슬로 이끌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은 유별나 보이는 선택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물론 환경 또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소식을 들어보면 이런 변화가 금방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인 중에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농부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이 분과 의기투합한 농부들이 영농조합을 만들어 시도한 친환경 파농사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납품한 파가 '모양이 좋지 않다'는 학교 영양사의 판단으로 인해 반품되었기 때문이랍니다. 그 영양사가 모양보다 파의 품질과 자란 환경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요인은 그분께 농사의 경험이 없고, 이 파를 키운 사람과의 교감도 없었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양사가 자신을 농부와 아이들을 이어주는 음식 사슬의 일부로 인식했다면 결과가 달라졌겠지요. 물론 이 한 가지 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도, 해서도 안 될 겁니다. 이와 반대되는 긍정적 소식도 많이 있으니까요. 다만 이 일이 먹거리의 건강은 단순히 시장에 좋은 상품을 공급하는 데 달린 게 아니라, 관계(사람과 자연, 생산자와 소비자, 음식과 건강)의 문제까지 잘 풀어낼 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건강과 음식의 건강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관심을 두고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행동이 내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건강하게 하고,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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