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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의 관문, 문경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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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남대로의 관문, 문경고을

9월 고을학교

초가을, 9월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23강으로 경북 문경(聞慶)고을을 찾아갑니다. 문경은 우리나라의 동남부, 경상북도의 서북단 내륙에 자리잡은 중산간 지역으로, 동쪽은 예천, 남쪽은 상주, 서쪽은 괴산, 북쪽은 제천·충주·단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일찍이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관문(關門) 역할을 했고 문경·가은·점촌이 중심지였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 ⓒ문경새재도립공원

고을학교 제23강은 9월 20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9월은 추석연휴 관계로 한 주일 당겨서 개강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문경새재IC-문경관문구역(신길원충렬비/산불됴심표석/조령원터/문경새재박물관)-진남교반구역(토끼비리/고모산성)-점심식사 겸 뒤풀이-문경읍치구역(관산지관/문경향교)-김룡사-문경IC-서울의 순입니다.

▲문경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3강 답사지인 문경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문경·가은·점촌으로 이루어지다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으면 포암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계립령, 주흘산, 문경새재(조령), 조령산, 이화령, 희양산으로 이어지며, 속리산 쪽으로 그 산줄기가 뻗어 가는데 남쪽으로 방향을 튼 계립령에서 희양산까지 구간이 문경고을의 북서쪽 경계인 백두대간 상의 봉우리와 고개입니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문경시 농암면 중앙을 흐르며 농암천(籠巖川)이 되고, 농암면과 가은면의 경계에서 산지를 곡류하면서 윤강이 되고, 가은읍 남부를 지나 마성면 신현리 부근에서 조령산이 발원한 조령천(鳥嶺川)과 합쳐져 영강이 되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예천에서 흘러온 내성천과 만나 마침내 낙동강이 되어 상주 쪽으로 흘러갑니다.

문경은 행정구역상 우리나라의 동남부, 경상북도의 서북단 내륙에 자리 잡은 중산간 지역으로서 동쪽은 예천, 남쪽은 상주, 서쪽은 괴산, 북쪽은 제천, 충주, 단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도(慶尙右道) 고을이었습니다. 경상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을 우도, 동쪽을 좌도라 부르는데 임금의 자리인 한양에서 볼 때 서쪽은 오른쪽에 해당하기에 경상우도라고 합니다.

경상도를 좌, 우로 구분한 것은 중종(中宗) 때인데 상주진(尙州鎭)에 속하는 성주, 선산, 금산, 개령, 지례, 고령, 문경, 함창 등 8개 군(郡)과 진주진(晉州鎭)에 속하는 합천, 초계, 함양, 곤양, 남해, 거창, 사천, 삼가, 의령, 하동, 산음, 안음, 단성 등 13개 군과 김해진(金海鎭)에 속하는 창원, 함안, 거제, 고성, 칠원, 진해, 웅천 등 7개 군을 합하여 모두 28개 군을 경상우도라 하였습니다.

문경은 읍치구역이 있었던 문경(聞慶)과 탄광 중심지였던 가은(加恩), 경북선과 가은선이 교차하는 교통 중심지 점촌(店村)으로 나누어집니다.

문경의 읍치구역은 문경서중학교 부근으로 객사(客舍)인 관산지관(冠山之館)만 남아 있고 관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현단위의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서 달리 객관이라고도 했는데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는데 건물의 구조는 가운데에 마루로 된 정당(正堂)을 두고, 그 좌우에는 온돌을 들인 익실(翼室)이 있으며 전면에는 중문과 외문, 측면에 행랑채 등이 딸려 있습니다.

관산지관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90년 발견된 상랑문(上樑文)을 통해서 1648년(인조 26)과 1735(영조 11)에 각각 중수(重修)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군청사로 사용되다가 1950년경 문경서중학교의 교사로도 이용하였는데, 본래는 주관(主館)인 정청(正廳)과 부속관(附屬館)인 좌, 우에 익사(翼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정청과 좌익사만 남아있습니다.

▲김룡사의 배롱나무 Ⓒ맑은강산

근암서원과 소양서원

문경향교(聞慶鄕校)는 조선 태종 1년(139)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598년(선조 31)에 대성전, 1676년(숙종 2)에 명륜당을 재건하였으며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이 동일 축 선상에 놓여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대성전의 전면에는 동무(東廡)만이 남아 있고 명륜당 뒤에는 동, 서재(東, 西齋)를 두었습니다.

동, 서재가 명륜당의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문경향교에서는 동, 서재가 명륜당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대지의 경사가 심하여 명륜당의 앞에는 건물을 세울 수 없는 지형적인 이유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근암서원(近巖書院)은 산북면 서중리에 있으며 1669년(현종 10)에 근암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된 후 홍은충(洪彦忠), 이덕형(李德馨), 김홍민(金弘敏), 홍여하(洪汝河), 이(李榘),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을 배향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으나 다행히 18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권상일의 전적 및 유물인 <일록(日錄)> 12책(冊), 교판(敎牒), 교지류(敎旨類) 70여 장, <괴원계첩(槐院稧帖)>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양서원(瀟陽書院)은 가은읍 전곡리에 있으며 고종의 서원 훼철 당시에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남았습니다.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강학공간(講學空間)과 배향공간(配享空間)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배향공간에는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각각 중앙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나암 정언신(懶菴 鄭彦信), 인백당 김낙춘(忍百堂 金樂春), 고산 남영(孤山 南嶸), 가은 심대부(嘉隱 沈大孚), 가은 이심(稼隱 李襑)의 다섯 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서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지역별로 비교적 활성화된 비형식적인 사설(私設) 교육기관으로서 서원과는 달리 설립에 기본재산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이 세우고 폐지할 수 있었습니다.

문경 지역에는 가은읍 작천리의 옥봉서당(玉峰書堂), 산북면 창구리의 창구서당(蒼邱書堂), 산양면 반곡리의 영빈서당(潁濱書堂), 반곡서당(盤谷書堂)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반곡서당은 1694년(숙종 20)에 지방 사림들이 서계(書契)를 조직하여 그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서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초기에는 18개 문중에서 48명이 참여하여 발의하였고 이때 문경을 위시한 상주, 예천, 안동 등지의 유림들이 참가하였으며 서당이 잘 운영될 때에는 수백 명의 당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강당 한 채와 관리사 한 동만이 외롭게 남아있고 과거 서당에 속한 토지도 과거에 수천 평이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1천여 평 정도 남아 있으며 <반곡서당완의(盤谷書堂完議)>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결국 반곡서당을 지금까지 지켰던 것은 ‘재물을 아끼고 강학에 힘쓴다(節財用, 勤講學)’라는 정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영남대로의 백두대간 남쪽 첫째 고을

영남대로(嶺南大路)의 백두대간 남쪽, 첫째 고을이고 교통의 중심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인 문경에는 백두대간을 넘는 세 개의 큰 고갯길과 이 길을 지나는 사람과 말이 자고 먹을 수 있는 역(驛)과 원(院)이 있었으며 고모산성, 노고산성, 석현성 등의 산성도 남아 있습니다.

경상도 문경에서 충청도 충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갯길은,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계립령(鷄立嶺, 하늘재), 조선시대의 관도(官道)였던 문경관문(聞慶關門, 문경새재), 그리고 일본 강점기에 신작로로 닦여진 이화령(梨花嶺)의 세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록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옛길은 계립령(鷄立嶺)으로 달리 ‘하늘재’라고도 하는데 문경읍 관음리 포암산 중턱에 있으며 “156년(신라 아사달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사용되어 오던 계립령 길은 서서히 쇠퇴하고 고려시대부터 조령(鳥嶺)으로 새 길을 내주었으며 급기야 근대에 이르러 이화령(梨花嶺)으로 찻길이 나면서 현재의 주 교통로는 이화령 방면으로 이어집니다.

문경관문(聞慶關門), 즉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관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 주변에 흐르는 조령천(鳥嶺川)의 양안으로 우뚝 솟은 주흘산(主屹山), 부봉(釜峰), 기산(箕山), 조령산(鳥嶺山) 등이 이루는 8㎞ 남짓한 험준한 계곡에 구축한 요새입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선조 26)년에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중의 경제사정과 조정내의 찬반양론으로 설치를 미뤄오다가 그 이듬해 비로소 조곡관에 중성(中城), 즉 제2관문을 개설하고 그 후 1708년(숙종 34)에 중성(中城)을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또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초곡성을,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조령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1관문과 제3관문입니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하였고, 영조 때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습니다.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 다시 지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협문(夾門) 2개가 양쪽에 있고, 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水口門)이 있습니다.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축성하였으며 세 관문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으나 숙종 때 관방을 설치할 때 3관문인 영성(嶺城)과 1관문인 초곡성(草谷城, 주흘관)에 관을 설치하고 2관문에는 조동문(鳥東門)만 설치하였습니다.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은 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 때 중창하였습니다. 1907년에 소실되어 훼손된 것을 1976년에 홍예문, 석성, 누각을 복원하였으며 문루의 북쪽에는 조령관(鳥嶺關)이란 편액이, 남쪽에는 영남제3관(嶺南第三關)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처럼 첩첩이 둘러친 관문을 적이 뚫고 나아가기에는 험난한 난간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버리고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신립장군에 대해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몇 번의 정찰 후 뜻밖에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다 지나갔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다의 울돌목’ 같은 천혜의 요새를 스스로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쳐 왜군을 맞았다가 전멸한 신립장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진남교반 전경 Ⓒ문경시

문경새재에 얽힌 사연들

‘새재’의 어원에 대해서는 ‘새도 넘기 어려운 길’ ‘억새가 많이 우거진 길’ ‘계립령(하늘재)을 버리고 새로 만든 길’ 등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세 번째 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문경새재 주변에는 충렬비(忠烈碑), 산불됴심표석(表石), 원(院)터, 교귀정(交龜亭), 군막(軍幕)터, 동암문(東暗門), 북암문(北暗門), 이진터, 봉수(烽燧)터, 성터, 대궐터 등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보부상(褓負商), 산적(山賊), 화전민들과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새재를 넘나들면서 남겨놓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특히 ‘산불됴심’표석은 지구상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한글표기 비석 5기 중의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한글비석은 단 5기(基)뿐인데 그마저도 한 기는 일본에 있으며 유일하게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한글영비(靈碑)'인데 조선 중종 31년(1536년)에 세운 비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네 기는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위치한 선조의 제12 왕자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의 묘역 입구에 있는 ‘한글고비(古碑)’, 경남 진주의 의곡사 입구에 세워진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여 새겨진 ‘작은비석’, 문경새재 입구의 ‘산불됴심’표석과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館山)시 다이간인(大巖院) 사찰에 있는 ‘사면석탑(四面石塔)’입니다. ‘사면석탑’은 동서남북 네 면에 한글, 중국의 전서체 한자, 일본식 한자,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습니다.

유곡(幽谷)이라는 지명은 이곳 지형이 워낙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유곡역(幽谷驛)이 들어선 뒤 1472년에 찰방역(察訪驛)으로 승격돼 2백 여리, 여덟 고을에 걸쳐 있는 19역을 종6품 찰방이 관리하며 그 아래 역리(驛吏) 4백69명, 노비(奴婢) 83명을 두었습니다.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역도체계(驛道體系)에서도 상주도(尙州道)의 으뜸 역이었고,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각지로 뻗은 9대간선(九大幹線) 도로 가운데 부산동래[嶺南大路]와 통영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갈라졌습니다.

문경새재를 지나 천혜의 요새인 곶갑천(串岬遷, 토끼비리)을 끼고 돌아 남한강 나루로 이어지는 유곡동은 아골, 마본, 한절골, 주막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역로(驛路)를 기준으로 왼쪽 유곡침례교회 부근은 유곡찰방의 관아가 있던 아골마을이고, 점촌북초등학교를 기준으로 유곡동 서쪽은 말 먹이던 마방터로 대마 5필, 중마 8필, 짐 싣는 말 12필을 거느렸습니다. 점촌북초등학교 앞에는 관찰사 박문수, 어사 박이도, 유곡도 찰방 이명원 등 15명의 관리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절골은 아골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역로를 기준으로 좌우로 주막거리와 장시(場市, 2·7일장)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식당과 슈퍼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말까지 남아있었다고 하는 역관(驛館), 아사(衙舍), 청고(廳庫)는 그 위치마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고모산성과 노고산성

고모산성(姑母山城)은 5세기경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칠 때 한강 유역의 전진기지로서 고구려, 백제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쌓은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산성이며, 고려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이 다투던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말에는 의병들의 주둔지로서 시대를 달리하며 역사를 지켜온 산성인데 달리 ‘마고할매성’이라고도 합니다.

고모산성은 천연요새로 길이 약 1.6km, 성벽 높이 2~5m, 너비 4~7m인데 성벽은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높낮이를 맞추어 쌓았고 정문인 진남문(鎭南門) 양 옆으로 날개를 펼친 듯 익성(翼城)을 쌓았는데 그것이 석현성입니다.

석현성(石峴城)은 조선시대 관성으로 성의 길이가 401m의 익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축성하였고 한쪽은 고모산성 남문과, 다른 한쪽은 토끼비리와 잇닿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 3개의 성이 바로 뚫리는 비극을 교훈 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일자형의 성이며, 성문의 이름이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진남문(鎭南門)이라 한 것은 남쪽에 있는 왜적을 무찌르고 싶은 바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축성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는 않다가 1896년 1월 15일 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이 이끄는 문경 의병이 퇴각한 뒤에 왜병들이 불을 놓아 모두 태웠으나 최근에 진남루와 석현성 일부를 복원하였습니다.

노고산성은 동로면에 위치하며 북쪽지역과 남쪽지역의 진입과 퇴로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에 축조된 산성입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시켜주는 주요 교통로인 계립령이 개설되었고, 계립령의 입구를 지키는 역할과 동시에 예천, 안동, 상주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성의 규모는 총 둘레가 665m이고 남벽 160m, 서벽 140m, 북벽 155m, 동벽 210m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마름모꼴 형태인데, 석재를 이용한 석축 성벽이나 동쪽 구간은 급경사를 이루기 때문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성 내에는 문터 1개소와 치성 1개소가 남아 있습니다.

진남교반(鎭南橋畔)은 문경시 마성면의 영강(穎江)을 가로지르는 진남교 부근의 풍광 좋은 곳을 일컫습니다. ‘호반(湖畔)’이 호수 주변이듯 ‘교반(橋畔)’은 다리 주변을 뜻하며 ‘진남(鎭南)’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이곳을 쉽게 내줘 정유재란 때 성을 다시 쌓고 남쪽[倭]을 경계하고 진압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입니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농암면에서 농암천(籠巖川)이 되고, 가은면에서 윤강이 되며, 마성면에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조령천(鳥嶺川)을 합하여 영강이 되고, 두 강이 합쳐 남동쪽으로 흐르며, 어룡산(魚龍山)과 오정산(烏井山) 사이의 산지를 지날 때는 ‘S’자로 크게 휘돌아나가는 물도리동의 태극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곳 지형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높게 솟은 산의 울창한 숲이 큰 닭이 큰 날개를 접으며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이라서 ‘포란형’, 또는 ‘삼태기지형’ 이라고도 합니다.

토끼벼리, 가장 험난한 길

‘토끼비리’는 토끼가 지나간 길, 즉 토끼길이며 그것을 한자로 토천(兎遷)이라 하고 ‘비리’는 ‘벼루’의 문경 방언으로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일컫는데, 벼랑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달리 관갑천(串岬遷), 곶갑천잔도(串岬遷棧道), 토잔(兎棧) 등으로도 불렸는데, 잔도(棧道)란 험한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 길을 말하며, 천도(遷道)는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하므로 이 길은 강가의 벼랑을 이루는 절벽을 깎아낸 길과, 나무 등을 이용해서 만든 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 10년(927) 9월에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산양)을 빼앗고 서라벌에 육박하니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고려 태조가 시간을 계산해 보니 보병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정예 기병 5천으로 진군했으나 고모산성에 이르러 나아갈 길이 막막하였답니다.

가을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길은 막혀 할 수 없이 고모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뒤에는 어제 온 비로 냇물이 불어났고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진퇴양난의 망연함 속에 앞을 바라보니 토끼 한 마리가 바위 절벽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여, 즉시 군졸에게 명하기를 “토끼가 가는데 말이 못 가겠는가. 길을 내어라”고 했답니다.

이렇듯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내어 이 험로를 통과하였다고 하여 ‘토끼비리[兎遷]’라 부르며 옛날 서울을 오가는 길손들은 이 길을 ‘관갑잔도(串岬棧道, 관갑의 사다리길이란 뜻)’라 하여 가장 위험한 길로 꼽았습니다.

토끼비리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든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잔도로서 세 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길을 냈습니다.

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노면을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고, 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며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 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여 길을 넓힌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으로 석회암맥이 돌출해 있는데 인공으로 암석 안부를 만들었습니다.

영남대로에는 다섯 곳의 천도(遷道)가 있었는데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左岸), 문경새재 조곡관(2관문) 아래의 용추 부근, 밀양의 작천(鵲遷), 양산의 황산천(黃山遷) 그리고 문경 남쪽의 토끼비리입니다. 이중 토끼비리가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구간이었습니다.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도 <관갑잔도(串岬棧道)>라는 시(詩)에서 토끼비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屈曲羊膓路(굴곡양장로) 꼬불꼬불 양 창자 같은 길이여
逶迤鳥道奇(위이조도기)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하기도 하여라
峯巒一一勝(봉만일일승)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遮莫馬行遲(차막마행지)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

문경 지역은 탄광이 많이 산재해 있어 채굴된 석탄을 옮기기 위한 수단으로 철로가 그 역할을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개통된 산업철도가 문경선(聞慶線)과 가은선(加恩線)입니다.

문경선은 김천에서 영주까지 가는 경북선(慶北線)의 지선으로 점촌에서 가은까지 총 22.3km인데 1955년에 개통되었으며, 처음에는 ‘문경선’이라 명명하였으나 1969년 다시 점촌에서 문경까지의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가은선’이라 개칭하였습니다. 2004년 4월 가은선 중에 진남역에서 가은역까지 9.6km의 구간이 철도청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선 조치되었고 지금은 이 지역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가은역(加恩驛)은 1955년 석탄공사 은성광업소 명칭에 따라 은성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1959년 가은역으로 개칭하였고 현재의 역사는 1955년에 신축한 것으로서 해방 후에 건축된 목조역사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한때 번창했던 석탄산업과 관련된 역사(驛舍)로서 희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정역(佛井驛)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조(石造) 간이역으로 1955년에 준공되어 1993년에 영업이 중단될 때까지 대성광업소에서 생산된 수십만 톤의 석탄을 수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과 광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 드나든 애환이 깃든 곳으로 문경선의 시작점인 점촌역과 현재 레일바이크 역으로 운영 중인 진남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경새재 제1관문의 가을 Ⓒ문경새재도립공원

유서깊은 사찰, 봉암사·김룡사·대승사

문경에는 유서 깊으면서 규모가 큰 전통사찰이 봉암사, 김룡사, 대승사의 세 곳이 있습니다.

희양산(曦陽山) 기슭에 자리한 봉암사는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로서 지증국사의 문손들이 국사의 뒤를 이어 중수하였고 중창 80년 후에 극락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었는데 고려 초 정진국사가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나 순종 원년에도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었고 1956년에도 큰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습니다.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로 한때 폐사 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중창을 거듭해 옛 모습을 되찾고 많은 선승들이 모여 참선 수행하는 도량으로 거듭났으며 이러한 연유로 부처님오신날 하루만 사찰을 개방하고 일체 일반인에게 산문을 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룡사(金龍寺)는 개산조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한 후 인조 2년 혜총선사가 제자들과 힘을 모아 중창하였고 그 후 소실된 것을 의윤, 무진, 대휴의 세 분 대사가 옛 모습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번창 시에는 48동에 건평 1,188평이나 되었으나 현재는 대소 전각 30여 채가 남아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32교구본사 중의 하나였고 불교전문강원이 개설되어 권상로 박사 등 저명한 불교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김용사는 풍수지리상 와우형국(臥牛形局)이기 때문에 물빛이 우윳빛과 흡사하여 신기한 느낌을 주는데 산혈의 촉맥을 보우하는 비보책(裨補策)으로 석탑과 석상을 절 뒤에 세웠습니다.

대승사(大乘寺)는 사불산(四佛山)의 중턱에 있으며 한국 불교사에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찬란한 역사를 지닌 사찰로서 김룡사를 창건한 운달조사가 그보다 한 해 앞서 진평왕 9년(587)에 개산했다고도 하고, 이름을 모르는 도승이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사불산의 주봉은 공덕봉으로 산 중허리에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사불암(四佛岩)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587년(진평왕 9)에 커다란 비단보자기에 싸인 사면석불이 공덕봉(功德峰)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불암(四佛岩)이었습니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곳에 와서 예배하고 절을 짓게 하고 ‘대승사’라고 사액(賜額)하였습니다. 망명비구(亡名比丘)에게 사면석불에게 공양을 올리게 하였고, 망명비구가 죽고 난 뒤 무덤에서 1쌍의 연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그 뒤 산 이름을 사불산 또는 역덕산(亦德山)이라 하였습니다.

대승사에는 보물 제575호인 목각탱부(木刻幀附) 관계문서와 사적비(寺跡碑) 및 아미타불사에서 나온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 7권, 불사리 1과(顆) 등이 전해지며 부속암자로 반야암(般若庵), 묘적암(妙寂庵), 상적암(常寂庵) 등이 있는데, 특히 반야암은 1415년 기화(己和)가 <금강반야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經五家解說義)>를 지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불정역. 우리나라 유일의 석조(石造) 간이역이었다. Ⓒ문경시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9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입장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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