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25일 새벽, 극적으로 합의문을 발표했다. 양측이 가장 시급하게 여긴 현안은 일단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2013년 개성공단 중단 사태에서 발생한 현상이 고스란히 재연된 셈이다.
남북이 '무박 4일', 약 43시간 동안 대화를 통해 도출해 낸 결론은, 북한은 지뢰 도발에 "유감"을 표명하고, 우리 측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은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자 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 내 개최하며 앞으로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하였다"는 두 문장이 붙었지만, 일단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빠진 선언적 구호에서 그쳤다.
남북 간 군사 및 대남 대북 분야의 책임자가 한 테이블을 두고 마주앉은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기회였다. 그간 북한이 군부와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통해 '양동 작전'을 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사 문제와 남북 교류 문제를 한꺼번에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즉석에서 종합적 조율이 가능한 자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양측 최고 지도자가 협상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2+2 협의체'가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못했다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발→대화→해소'의 쳇바퀴 '원칙'은 그만
이번 사태는 지난 2013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태의 결말과 비슷하다. 북한 측이 원인을 제공하고 박 대통령은 '원칙'을 지켜 사안을 해결하지만, 남은 것은 없다.
지난 2013년 4월 3일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감행한 기세를 타고 한미 군사 훈련 및 최고 존엄 모욕 등을 문제 삼아 개성공단의 남측 근로자 출경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린다. 5일 후인 8일 김양건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는 "개성공단 잠정 중단·북한 근로자 전원 철수"를 발표했다. 남북 간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진 끝에 그 해 6월 남북 당국 회담이 성사됐지만, 북한이 수석대표의 격(格) 문제를 제기하자 박 대통령은 즉시 테이블을 걷어찼다.
결국 사태가 발생한 지 133일 만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5개 항 남북 합의서를 채택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멀쩡하게 가동되고 있던 개성공단을 두고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133일을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재가동'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원칙을 지킨 박근혜 대통령의 승리'라는 취지의 입장을 쏟아냈다. 보수 언론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13년 지난했던 협상 이후 남북 관계는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북한 측은 비무장지대(DMZ) '지뢰'로 교묘하게 남북 관계를 자극하는 등, 도발을 이어갔다.
도발 후 남측이 대대적인 대결 분위기를 조성하면 북한이 대화를 제안한다. 피 말리는 협상 끝에 도발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린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원칙의 승부사' 칭송에 도취되지 말아야
이번 협상은 결과적으로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지층 결집 효과를 봤고,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도 내부 체제 결속력을 강화했다.
외부 요인도 이번 협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9월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가운데 말썽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고, 김 위원장도 9월 9일 정권 수립일 행사를 앞두고 체제 결속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남북 모두 내부 정치에서 실리를 챙겨간 셈이다.
문제는 향후 남북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 가느냐다. 이번 남북 대화가 각자 정권 유지를 위한 대화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면 추가 대화 조성을 위해 즉각 나서야 한다. 개성공단 중단 사태로 마련된 남북 대화의 끈이 끊어진 것은, 우리 측의 상황 관리 실패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원칙'의 이미지를 공고히 한 것은 좋지만, 거기에서 그칠 경우 '도발→대화→해소'로 이어지는 비생산적 정치 이벤트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남은 과제는 남북 간 진전된 대화체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5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를 통해 남북 장관급 회담 개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화의 물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장관급 회담을 정례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5.24 조치 해제의 실마리를 만들어낼 기회가 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체를 명시하지 않은 "도발"에 대한 유감 수준에서 남북 대치 상태가 해소됐다는 것은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다. 천안함 사태가 원인이 된 5.24 조치 역시 비슷한 수준의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년 반 남았다. '원칙의 대통령'이라는 말에 도취되면 박 대통령은 '정치꾼'에 머물게 된다. 한반도 평화를 선도하는 '지도자'로서의 진짜 평가는 지금부터다. 당장 '남북 고위급 대화체' 구성에 착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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