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든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프레시안>과 문학과지성사는 이 <몸의 일기>를 먼저 읽은 여덟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금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20대의 젊은 작가, 40대의 의사, 60대 70대의 노(老)작가까지 다채로운 빛깔의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다섯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30대 후반의 강양구 기자입니다.
이런, '몸'이 곧 '관계'였구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3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몸이 망가지는 신호가 간헐적으로 오긴 했다. 당연한 일이다. 20대가 넘어서면, 특히 20대 중반부터 자기도 모르게 노화가 시작되어 몸의 이곳저곳이 빠른 속도로 늙기 시작하니까. 십 몇 년간 잦은 폭음, 밤샘 근무 등으로 늙어가는 몸에 독성물질까지 부어댔으니 신호가 안 오면 이상한 일이었다.
고백하자면 슬쩍 위기감을 느끼던 순간도 있었다.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지고 나서(난) 다음 날이면 뭐든지 깜박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실(fact)을 가지고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서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진다는 건 정말로 큰일 날 일이니.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를 스스로에게 들이밀면서 어느 날부터 윗몸일으키기를 시작했다.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가 나오자마자 손길이 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았다. 앞의 도입부를 읽고 나서 10대나 20대 따위는 건너뛰고 (남자라는 동물의 10대 몸의 일기야 안 봐도 뻔했다. 몽정, 섹스 등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한 것들….) 226쪽부터 펼쳤다. 39세 3개월. 딱 지금의 내 나이다.
39세 3개월 4일
불안증 때문에 밤을 꼬박 샜다. 목이 메고, 가슴이 무겁고, 머리가 띵하면서 흔들렸다! (226쪽)
다행히 나는 불안증도 불면증도 없다. (같이 사는 사람에 따르면, 어디서든 머리만 기대면 잠드는 사람은 처음 봤단다.) 하지만 <몸의 일기>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상당한 정도로 탈모가 진행 중이고, (이유는 다르지만) 주인공처럼 비염 증상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주인공보다 10년이나 빨리 이명 증상이 찾아왔다.
48세 6개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불 위에 올려놓고 잊어버린 압력솥에서 나는 것 같은 쉬익쉬익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려니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뒤에 또다시 깼다. 여전히 똑같은 소리. 바람구멍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호루라기 소리 같기도 한 소음이 날카롭게 계속 이어졌다. 모나에게 불평을 했다. (275쪽)
만약 주인공처럼 여든이 넘어서 죽는 천수를 누린다면, 나 역시 서서히 몸의 이곳저곳이 망가질 것이다. 이명 친구는 더 자주 찾아와 귓가에 자리 잡을 테고, 이미 나쁜 눈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귀는 더 안 들릴 것이다. 몸 곳곳에 암세포가 똬리를 틀 테고(친하게 지내길!), 상상하기 싫지만 노인성 치매가 찾아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색을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을 미리 경험하는 일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텐데, 정말로 기이하게도 나는 <몸의 일기>를 읽고서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몸이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니, 심지어 칠순이 넘어서 손녀딸뻘 멋진 여성의 유혹에 마지못해 넘어가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흥분되는가?
바로 이 대목에서 약간의 오해를 해명해야겠다. <몸의 일기>는 여러 차례 "이건 오로지 내 몸에 관한 일기"라고 의뭉스럽게 선언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전체에 걸쳐서 '몸 그 자체'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기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몸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체 해부도가 주인공의 몸과 어긋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내 식대로 요약하자면, 몸은 곧 '관계'다. 그러니 <몸의 일기>는 곧 '관계의 일기'다. 저자의 몸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서 요절한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한 비올레트 아줌마, 평생의 반려자 모나, 10년 터울의 죽마고우 티조, 레지스탕스 활동을 같이하던 동지들, 먼저 세상을 떠난 손자 그레구아르 또 딸 리종 등과 맺은 관계의 산물이다.
<몸의 일기>를 읽고서도 주인공의 한평생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한 사람의 몸이야말로 그 몸을 교차하며 지나간 수많은 관계의 결과라는 삶의 진실! 나만 봐도 그렇다. 나의 탈모는 할머니를 통해서 전해진 탈모 유전자(할머니 동생(진외종조부)은 전부 대머리다)와 술을 빼놓곤 교류가 힘든 '친구들' 탓이다!
행여나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 남성의 '몸 그 자체' 얘기만 지루하게 늘어놓을 것이라 생각하는 여성 독자라면 당장 오해를 풀고 책을 펼치길 바란다. 나이 칠순에도 20대 여성이 온몸을 던져 유혹할 정도로 멋진 남성의 몸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생생한 뒷이야기가 가감 없이 눈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마침 주인공도 이런 바람을 비쳤다.
50세 3개월
만약 이 일기를 공개해야 한다면, 우선은 여자들에게 바치고 싶다. 그 대신 나도 여자들이 자기 몸에 관해 쓴 일기를 읽어보고 싶다. (285쪽)
그런 맥락에서 나는 나이 칠순에도 20대 남성이 온몸으로 유혹할 만큼 멋진 여성이 주인공의 바람에 화답해 그녀만의 '몸의 일기'를 써줬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일기가 있다면 나부터 제일 먼저 독자를 자처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기에서는 꼭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의문을 해소해주길 바란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 젖가슴의 모양과 무게에 관해 어떤 느낌을 갖는지 전혀 모른다. 또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기 성기의 발기에 관해 어떤 느낌을 갖는지 전혀 모른다." (285쪽)
(30대 후반의 남성인 강양구 기자는 <프레시안>에서 편집부국장과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안 사태, 경부 고속 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황우석 사태, 메르스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과학 수다 1, 2>(사이언스북스 펴냄),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1, 2>(뿌리와이파리 펴냄),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사이언스북스 펴냄) 등의 책이 있습니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본명은 다니엘 페나키오니.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열등생이었으나, 그 시기에 독서에 남다른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강압적인 독서 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펴냄), 열등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학교의 슬픔>(문학동네 펴냄) 등의 에세이와 소설,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며,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몸에 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 <몸의 일기>는 2012년에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995년부터 교직에서 물러나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