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의 열일곱 번째 강의는 19일(토) 당일로, 충북 단양, 경북 영주의 소백산 자락에서 열립니다. 영주와 단양은 소백산으로 나뉘어 있지만, 죽령이라는 고갯길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대형 석조여래입상으로 유명한 단양군 대강면 죽령 고개의 보국사지(輔國寺址)를 둘러보고 죽령 정상 휴게소를 넘어, 아름다운 나한전 문살로 이름난 영주시 순흥면의 성혈사(聖穴寺), 조선시대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인 순흥면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자리했던 숙수사지(宿水寺址)를 찾아가는, 초가을 소백산 주변을 걷는 상쾌한 마실길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처음에는 죽지령이라고 불리던 죽령을 넘어 다니던 옛길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단양 방향인 용부원리쪽은 시멘트 포장길이며 영주의 풍기 방면은 아직 흙길로 남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폐사지학교가 처음 열리던 날,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이어주던 하늘재보다 3년 뒤에 개척된 고갯길입니다.
경북 영주는 통일신라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곳입니다. 신라는 한강을 차지하려고 죽령을 넘어야 했고, 고구려 또한 소백산을 넘어야 신라 땅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 쟁패가 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불교의 힘을 빌려야 했을 것이며, 부석사의 창건 시기와 어슷비슷한 시간에 가흥동이나 신암리에 마애삼존불을 조성하여 부처의 힘을 빌리려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단양은 한강을 끼고 있어 늘 분쟁에 휘말려 제대로 된 불교문화가 남아 있지 못합니다.
보국사(輔國寺) 혹은 죽령대원(竹嶺大院)
현재 보국사지라고 부르는 곳은 죽령 중 단양 방면에 있지만, 끊임없이 그곳이 보국사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에는 소백산 연화봉 아래에서 사지를 발견했다고 하며 그곳이 보국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가 하면 현 보국사지는 사찰이 아니라 충주 상모리의 미륵리절터 곁에 있는 미륵대원이나 문경의 관음원터처럼 죽령대원(竹嶺大院)터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육불상이 서 있는 사지 바로 아랫마을이 용부원(用富院)이어서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원이 두 곳이나 있게 되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월악산 기슭의 미륵대원터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은 장육불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으며, 그 전각이 마치 석굴처럼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정 또한 두 곳의 불상 조성 시기가 사뭇 달라 보이기 때문에 의아하기도 합니다. 비록 불두는 사라지고 없지만 불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죽령의 장육불이 더 오래된 통일신라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라 안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성혈사 나한전 어간문 창살은 연지수금문(蓮池獸禽紋)이라고도 합니다. 분합문 자체를 큰 연못으로 삼아서 아직 피기 전인 연봉은 물론 활짝 핀 연꽃, 연잎은 물론이거니와 갖가지 날짐승과 물고기, 또 개구리와 용, 게까지 새겨 놓았으니 아무래도 극락정토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동자 하나가 큰 연잎을 타고 앉아 아직 피지 않은 연봉을 삿대 삼아 연못 속에서 노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가 쌍상투입니다.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동자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작은 동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동자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숙수사지(宿水寺址)
현재는 조선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사적 제55호(지정면적 7,504㎡)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찰경내에 있었던 숙수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숙수사가 언제 법통이 끊어졌는지 알 길은 없으나 고려 후기 학자인 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이것이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으므로,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안향의 고향이며 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지요.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53년 현재의 소수서원 후편으로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으며, 서원 경내에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이 남아있어 사찰의 규모와 존폐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9월 19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죽령 샛골 입구 도착(걷기 시작)
-보국사지 도착(도보 30분)
-죽령 정상(휴게소) 도착(도보 30분)
-희방사역 도착(도보 1시간30분 내리막길. 걷기 끝)
-점심식사 겸 뒤풀이(순흥전통묵집)
-성혈사 입구 도착
-성혈사 도착(도보 20분. 1km 비탈길. 왕복 2km)
-숙수사지(소수서원) 도착
-서울로 출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17강 <단양·영주의 폐사지들>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입장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보내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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