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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의 꿈, 변산과 실학, 기생 매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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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제부흥의 꿈, 변산과 실학, 기생 매창 이야기

8월 고을학교는 <부안고을>

8월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22강은 전북 부안(扶安)고을입니다.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끝까지 저항했던 우금산성(禹金山城)과 백강전투지(白江戰鬪址), 비록 높이는 낮으나 그 골이 무척 깊은 변산(邊山)에 기대어 농사짓고 소금 굽고 고기 잡던 삶의 흔적들과, 실학(實學)의 비조(鼻祖)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과 묵향(墨香)이 그윽한 여류시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의 사연들이 스며있는 부안(扶安)고을을 찾아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멀리 울금바위와 개암사 Ⓒ이지누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2강은 8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부안IC-읍치구역(동문안당산/서문안당산/부안향교/이매창묘·비)-개암사/우금산성/울금바위-점심식사 겸 뒤풀이-유형원유적지-내소사-적벽강/수성당-서울의 순입니다.

▲부안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2강 답사지인 부안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제부흥을 꿈꾸었던 곳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육십령(六十嶺)을 지나 영취산(靈鷲山)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오면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이루고 마이산(馬耳山)을 지나 주화산(珠華山)에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으로 나눠집니다. 호남정맥의 내장산(內藏山)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서쪽을 향해 입암산(笠巖山), 두승산(斗升山)을 지나 그 끝자락 정기를 모두 토하듯이 빚어놓은 명산이 변산(邊山)입니다.

변산은 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 능가산(楞伽山)으로도 불리는데 영주산과 봉래산은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으로 경관이 빼어나 붙여진 이름이고, 능가산은 변산 동쪽 기슭에 있는 개암사(開巖寺)에 원효와 의상이 머물면서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변산은 소나무가 많은 산인데 바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성한 소나무에 가려져 거칠게 보이지 않으며 변산의 소나무가 예로부터 질이 좋기로 소문나서 궁궐을 지을 때 이곳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특히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도모할 때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변산의 오른쪽에는 드넓은 평야가, 왼쪽에는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바다와 평야를 가르며 힘차게 뻗어가는 산줄기의 기상이 예사롭지 않아 그곳에는 많은 명당(明堂)과 명승(名勝)이 있어 조선시대에는 8경(八景)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노령산맥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扶安)에 와서 서해로 빠져들었는데 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속에는 많은 봉우리와 많은 구릉이 있는데 이 산이 변산으로 골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의 집이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들이 많다”고 했는데 지금도 농사를 짓고, 땔감을 해오고, 해산물을 건져 올리며, 소금을 구웠던 삶의 흔적들이 부안고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바닷가 서쪽 해안에는 툭 튀어나온 곳에 바다의 수호신에게 제사 지내는 수성당(水城堂)이 있고 바다 건너 위도에는 풍어를 기원하는 띠뱃놀이가 무형의 유산으로 전해지며, 남쪽 해안선에는 청자를 구웠던 고려시대 가마터와 곰소만 일대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습니다. 북쪽 해안가, 개펄을 메운 간척사업으로 형성된 계화면에는 ‘계화미(界火米)’가 생산되고 있으며 동진강 하류는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백강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부안고을의 큰 물줄기는 정읍고을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고부천을 받아 안고 서해에 안기는 동진강(東津江)과 고창고을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동진강에 합류하는 고부천(古阜川)이 있습니다.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부안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고자 제언(堤堰, 댐)이 많이 발달하였는데 부안댐으로 생긴 부안호를 비롯하여 청호저수지, 사산저수지, 석포저수지, 운호저수지, 고마제, 종암제, 영전제, 우동제, 개암제, 도청제, 유유제, 운산제 등이 있습니다.

부안은 지형적으로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서해로 불쑥 튀어나와 있는 반도로 바다에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은 변산이 겹겹이 쌓여 있고, 북동쪽은 넓고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해안선은 북쪽의 동진강 하구에서부터 남쪽의 줄포면 우포리까지 99km가 되며, 바닷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겨울철엔 눈이 많이 내립니다. 지리적으로는 전북의 서쪽에 있어 군산과는 바다로 접하고, 북동으로 김제고을, 남동으로 정읍고을, 남으로는 고창고을과 접해 있습니다.

부안고을은 삼한시대는 마한(馬韓)에 속하여 마한 54개국 중 지반국(支半國)이라 하였습니다. 백제시대는 개화현(皆火縣)과 흔량매현(欣良買縣)의 두 현을 두었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년)에 고부의 속현이 되어 개화현을 부령, 흔량매현은 희안이라 고쳐 불렀고 고려시대는 보안현이라 하였으며, 고려 말 우왕 때는 부령현과 보안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습니다.

조선시대는 태종 때 부령현과 보안현의 합병과 분리를 여러 번 한 후, 1416년(태종 16) 마침내 두 현을 합하여 부령의 ‘부’자와 보안의 ‘안’자를 따서 부안현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홍덕진을 폐하여 부안에 귀속시켜 부안진이라 하였으며 병마사로서 판사를 겸하게 하였습니다. 1423년(세종 5년)에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다시 현감으로 고쳤으며 부안군으로 개편된 것은 1895년(고종 32년)에 전국의 부, 목, 군, 현의 이름을 군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내소사 전경 ⓒ부안군

부안읍성 지키던 당산들


부안의 읍치구역(邑治區域)은 성황산(城隍山)에 기대고 있으며 객사는 지금의 군청터에, 동헌은 군청 곁의 감리교회터에 있었고 읍성은 모두 무너져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동, 서, 남쪽에 남아 있는 당산으로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황산 아래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샘과 금대(琴臺)라는 바위가 있어, 가야금을 타는 바위와 샘에서 사람들이 쉬며 놀 만한 장소이기에 이곳에서 예로부터 시회(詩會)가 열렸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곳에 부풍시사(扶風詩社)의 촌로들이 이매창의 시비를 세웠습니다.

부안향교(扶安鄕校)는 1414년(태종 14)에 창건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07년에 만화루(萬化樓)를, 1848년에 양사재(養士齋)를, 1894년에 현감 조연명(趙然明)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신축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명륜당과 만화루, 양사재, 동재, 서재 등과 홍살문, 하마비(下馬碑)가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부안읍성(扶安邑城)에는 남문, 동문, 서문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각기 짐대, 솟대로 불리는 당산이 있어 이들 당산들이 성(城)을 지키는 수호신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부안읍치구역의 주산(主山) 명칭이 ‘성황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 당산(堂山)은 마을의 당산으로서의 성격 이전에는 성 안의 주민들이 함께 지내던 성황제(城隍祭)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남문안당산은 조선시대 읍성의 남문 터로 알려진 취원문루(聚遠門樓), 일명 건선루(健仙樓) 자리에 있으며, 당산석은 화강암을 2단 석주(二段石柱)로 연결하였고 두 개의 별석(別石)을 잘 다듬어 하나의 기둥처럼 세워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든 원추형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석간(石竿)의 하단부에는 시주자(施主者) 24명의 이름이 음각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단부만 건물의 지붕 위로 노출된 상태로 상단부 중간쯤에는 부조(浮彫)된 네 마리의 거북모형이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짐대당산을 신적(神的) 존재로 믿고 있기에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매년 행하는 줄다리기 때 당산석에 옷 입히는 의식으로 줄을 감아두곤 하는데 이 짐대당산은 부안읍성의 동문, 서문에 세워진 짐대당산, 돌장승과 함께 공동체의식을 키웠던 구심체로서 한국인의 기층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동문안당산은 읍성의 동문인 청원루(淸遠樓)에 세워진 것으로, 이곳을 나서면 고마제 옆 동진장터와 청운동의 동진원을 지나 동진나루터에 이르게 되는데 동문은 김제, 만경, 전주 등지로 다니는 부안의 관문(關門)이며, 예로부터 벼슬아치, 관원, 양반은 물론 온갖 상고배들의 주요 통로여서 사실상 부안의 대문(大門)이기도 합니다.

동문안당산은 ‘당산’이라 하는 석조신간(石鳥神竿) 1기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으로 불리는 석장승 한 쌍 등 모두 3기로 이들은 당산목(堂山木) 한 그루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석조신간은 동문 안 당산의 주신으로 화강암 기둥 위에 돌로 조각한 새(오리)가 돌기둥과 맞추어져 있는데, 새를 앉힌 것은 민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솟대’라는 신간을 돌로 바꾼 것으로 보이며, 이 당산은 나무장승이 돌장승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솟대가 돌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서문안당산은 부안읍성 서문 터인 군청 서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원불교당 부근에 세워진 당산으로, 2기의 솟대와 석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솟대와 석장승은 각각 남녀로 구분되며 이들 당산은 솟대와 석장승의 구분 없이 남녀에 따라 ‘당산할아버지’ ‘당산할머니’로 불립니다.

서문안당산의 4기 신체(神體) 가운데 마을의 주신(主神)은 할아버지 솟대당산으로,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일명 ‘당산솟대’ ‘철륭’으로도 불리며, 솟대당산의 상단에는 오리 한 마리가 올려 있고, 중앙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하부의 기단석에는 아홉 개의 ‘알받이구멍’이 파여 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할머니 솟대당산이 있으며 석간주는 상부의 3분의 1쯤이 잘려있고 그 아래로 머리를 하늘 쪽으로 향한 오리가 투박하게 음각되어 있습니다.

솟대당산 옆에 세워져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서문 안 당산에서 하위신 역할을 하며 이들 장승의 명칭은 솟대당산처럼 ‘당산할아버지’ ‘당산할머니’로 부르기도 하지만 통칭하여 ‘문지기장군’이라 하며, 할아버지 장승은 복부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있고 할머니 장승은 복부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합니다.

이들 당산이 세워진 시기와 연유, 그리고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솟대당산에 새겨진 ‘강희이십팔년(康熙二十八年)’이라는 글자를 보면 할아버지 솟대당산은 1689년(숙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격전지는 충남 예산의 임존성과 함께 부안의 우금산성과 백강을 들 수 있습니다.

우금산성은 둘레 3,960m의 포곡식 석성이며, 660년(의자왕 20)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을 위하여 항전을 벌였던 도성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한데 성 밖에서 공격하기에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어려운 반면 성안에서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입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전망대 구실을 하였던 울금바위는 소정방이 김유신을 만난 곳이라 하여 우금암(遇金岩)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는 백제부흥운동 당시 복신장군의 지휘소였던 복신방(福神房), 원효대사의 수도처인 원효방(元曉房), 진표율사가 수행한 불사의방(不思議房) 등 세 개의 굴이 있습니다.

우금산성의 북쪽에는 있는 동진강은 백제부흥운동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백강으로 비정되는 곳으로, 동아시아 최대의 해전이었던 백강전투에서 부흥군과 왜의 구원병이 크게 패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부흥군은 사기가 꺾였고, 부여 풍(扶餘豐)마저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금산성 아래 있는 개암사는 634년(백제 무왕 35) 묘련대사(妙蓮大師)가 세웠다고 하는데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을 때, 우(禹)장군과 진(陳)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의 전각을 짓게 하여 동쪽을 묘암(妙岩),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개암사는 본래 사찰이 아닌 변한의 왕궁터였습니다.

개암사는 오래전부터 내소사와 함께 부안의 불교를 지탱해 왔으며 민생의 정신적 지주역할 해 왔는데 백제부흥운동 당시에도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우금산성에 있었던 부흥군에게는 산성 아래로 보이는 개암사가 확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백산성은 고부(古阜)와 부안으로 갈라지는 곳에 있는 백산(白山)에 660∼663년쯤에 축조되었으며 산의 동쪽 기슭 아래로 동진강(東津江)이 흐르는데, 이곳은 옛날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로 일찍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백제부흥운동의 백강전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니혼쇼키(日本書紀)> ‘천지기’에 보면, 부여 풍이 백촌(白村)에 가서 일본의 구원군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백촌이 바로 백산으로,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이 이곳으로 본진을 옮겨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그들이 서면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앉으면 손에 쥔 죽창이 가득하다고 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라고 하며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했고 예로부터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내소사만 남아 있습니다.

사찰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데 둘째 축대에 올라 서면 수령 950년 된 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입암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문 바로 밖에 선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 짝을 이룹니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중흥하면서 칠성각, 산신각 등 민간신앙들이 절 안으로 끌어들여지지만 당산나무까지 들어온 것은 매우 드문 일로,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독경을 하며 입암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지냅니다. 해방 전까지는 줄다리기를 하고 그 줄로 당산나무에 옷을 입히기도 했으나 지금은 금줄만 쳐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능가산(봉래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뒤를 둘러싼 경내에는 고려 시대의 동종이 걸린 범종각과 봉래루, 삼층탑, 설선당, 대웅보전, 그리고 요사채들이 놓여 있습니다.

▲유형원유적지 ⓒ두산백과

반계와 매창이 남긴 흔적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외갓집인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 2세 되던 해에 아버지 한림공 류흠이 광해군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5세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10세 되던 해에는 유교경전의 학습을 마치는 총명함을 보이면서 성장하였습니다.

18세에 풍산 심씨와 결혼하였고 21세 때부터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것, 대화할 때는 항상 의관을 바르게 하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볼 것, 부모를 섬김에는 즐거운 얼굴을 가질 것, 부인에게는 공경스럽게 대할 것 등 자신의 생활지침인 좌우명을 지어 평생토록 실천하였습니다.

반계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어려운 농민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기 위하여 전북 부안에 내려가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고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자신의 호를 우반동 마을 이름을 따서 반계(磻溪)라 지었으며 이후 농촌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20여 년간의 연구 끝에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출판은 반계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70년(영조 46)에 경상감영에서 이루어져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 부국(富國)을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 실시, 신분제 및 직업 세습제의 개혁, 학제와 관료제의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과감한 실천을 강조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고,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학풍 조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사상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으며,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홍대용(洪大容), 정약용(丁若鏞)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실학을 집대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긴 저서로는 21세에 지은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한 <백경사잠(百警四箴)>와 이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입니다.

매창(梅窓, 1573~1610)은 부안(扶安)의 기녀로 부안현의 현리(縣吏)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한테 글을 배웠고,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계생(癸生) 또는 계생(桂生),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자호(自號)를 매창(梅窓)이라고 했고 시와 노래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매창이 기생이 된 것은, 매창의 어머니가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개 기생은 관비 출신 중에서 충원되었기 때문에 관아에 속한 기생은 ‘기안(妓案)’에 올라 관리를 받았습니다.

매창은 기녀로서 당대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였으나 특히 가까이 지낸 사람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교산(蛟山) 허균(許筠), 묵재(黙齋) 이귀(李貴)이며, 이 중 유희경과는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유희경은 매창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천민 출신이었는데, 뭇 양반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성이 높았던 매창이 신분이 높지 않았던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과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와 같은 매창의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애틋한 시에 대하여 유희경은 서울에 있어 부안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이와 같이 읊었습니다.

그대의 집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누나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지만, 너무 짧은 재회의 시간이었고 함께 시를 논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이것은 이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는데 매창이 3년 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유희경은 비록 천민출신이지만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효성이 지극했고 시도 잘 지어 많은 사대부들이 그와 교유하였습니다.

특히 창덕궁 옆을 흐르는 계곡에 작은 집을 짓고 침류대(枕流臺)라 명명하고 그곳에서 차천로, 임수영, 이수광·신흠·허균·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유희경에 대해 허균은 “사람됨이 청수(淸秀)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다”고 평했으며, 조우인(曺友仁)은 “당시 사대부들조차 예법에 관한 한 따라잡을 자가 드물었다”고 할 만큼 예법에 아주 밝았던 인물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유성룡을 도와 싸운 공로로 통정대부로 제수되었습니다.

매창이 평소에 “나는 거문고와 시가 참말 좋아요.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한 말에 따라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무덤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지 45년만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졌고, 58년 뒤인 1668년에는 시집 <매창집(梅窓集)>이 간행되었으며, <매창집> 발문(跋文)에 의하면 매창이 시를 잘 읊어 한 때 수백 편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거의 흩어져 1668년 10월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각 체 58수를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겨 간행하였다고 합니다.

▲변산반도 일몰 Ⓒ변산반도국립공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8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입장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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