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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리혜성 보면서 도련님은 뭘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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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핼리혜성 보면서 도련님은 뭘 했나요?"

[도련님의 시대 ④] 근대의 거울

2011년 후쿠시마 사고 후에 이웃 나라 일본을 보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손꼽히는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죠.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꼼수에 장단을 맞추며 군사 대국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합니다. 거품 경제의 후과로 발생한 장기 불황은 20년 넘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죠. 이런 상황을 앞장서 극복해야 할 일본의 정치는 그 자체로 제거해야 할 적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진짜 힘이었던 풀뿌리 시민 사회마저 급속히 활력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100년 전과 겹칩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때 발 빠르게 서구를 좇으며 일본 자체를 '개조'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유산, 대중의 권리, 개인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되었죠. 하지만 이런 개조는 정작 엉뚱한 결과로 귀결되었습니다. 러일 전쟁(1904년), 한일 병탄(1910년)을 거치며 일본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파괴하는 '괴물'이 되었죠.

다니구치 지로와 세키카와 나쓰오의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 펴냄)는 바로 이 시대를 다룬 독특한 만화입니다.

일본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의 창작 과정을 모티프로 한 이 만화는 '괴물'이 아닌 다른 일본을 꿈꿨던 그 시대 일본 '도련님'들의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뇌는 지금 일본의 현실과 맞닿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현재를 성찰하도록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도련님'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프레시안>은 이 <도련님의 시대>를 같이 읽자고 제안하며, 앞서 먼저 읽은 몇 분의 독후감을 소개했습니다. 문학평론가 박슬기 한림대학교 교수, 만화평론가 백정숙 씨,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글들이었죠. (☞관련 기사 : ① 슬픈 진실…"어차피 도련님은 못 이겨!""쓸 데 없는 도련님은 쓸모없는 길을 가야지!""도련님들은 죽어줘야만 하네! 꼭…")

이번에는 철학자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의 사회로 만화평론가 백정숙 씨, 문학평론가 박슬기 교수 또 이번 기획을 담당한 강양구 기자가 참여한 수다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도련님의 시대> 곳곳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뒷얘기,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의 좌충우돌에 당대의 조선 지식인 더 나아가 지금 우리의 삶을 투영해 보면서 생긴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수다는 강양구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 <도련님의 시대>(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예술이 된 가계부

서동욱 : 지금 우리 앞에는 다니구치 지로의 대작 <도련님의 시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일본 문인의 삶을 통해서 메이지 시대를 추적합니다. 내면의 탄생 등 근대 연구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주제들이 빠짐없이 출현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소개하면 이 작품의 매력이 충분히 전달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단순히 소세키의 삶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작품은 아니거든요.

물론 실존 인물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와 떼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일본 근대 문학이나 메이지 시대의 생활상과 같은 일본 근대를 대상으로 한 전문 연구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지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 서정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중심에 놓은 3부가 그 예입니다.

다쿠보쿠는 우리나라의 김소월에 비교해 볼 수 있는 일본의 중요한 국민 시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쿠보쿠의 이미지도 그렇고,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도 3부 43쪽에 나와 있는 도쿄에 막 올라와서 찍은 사진 한 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죠. 아주 맑은 서정시인 말입니다.

그런데 <도련님의 시대>는 잔인할 정도로 철저하게 다쿠보쿠의 일상을 추적해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런 추적 덕분에 안일한 독자의 감상적 태도에 가려져 있던 시인의 진짜 본질을 냉정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죠. 이 3부는 사료를 예술로 승화시킨 좋은 예로 생각됩니다.

강양구 : 정확히 말하면 가계부를 예술로 승화시킨 사례죠. (웃음) 끊임없는 빚도 모자라서, 돈이 조금만 생기면 주색잡기에 모조리 낭비를 했으니까요. 그걸 또 가계부로 꼼꼼히 기록하고.

백정숙 : 실제로 3부를 읽고서 다쿠보쿠의 팬이었던 제 지인이 너무 실망했었다고 합니다. (웃음)

서동욱 : 아니, 오히려 이걸 보고 팬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웃음)

백정숙 : 그 지인이 다쿠보쿠의 서정적인 시들을 좋아했었는데, 3부를 읽고서 시쳇말로 깬 거죠. '이런 망나니였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다 3부를 읽고서 다시 시를 읽어 보니, 그런 진탕 같은 삶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나왔다니, 하고서 새삼 감탄을 하게 되더라고 얘기하더군요. 나름 팬심을 회복 중이에요. (웃음)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소세키와 안중근이 만났다?


서동욱 : 하지만 다쿠보쿠의 예에서 보듯이 역사적 자료를 다루는 방식이 빛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실린 내용을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고 또 순진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부에서 소세키와 그의 제자들과 안중근의 인연을 묘사한 대목이죠.

박슬기 : 정말로 속았어요. (웃음) 그 대목을 읽고서 아주 인상적이어서 안중근의 일대기를 찾아봤죠. 그런데 아무리 찾아 봐도, 그들과 안중근 사이의 접점이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심지어 안중근은 일본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작가가 창조한 완벽한 허구인 셈이죠.

서동욱 : 맞습니다. 사실 안중근뿐만 아니라 1부부터 5부에 걸친 책 전체에 걸쳐서 이런 예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5부의 115쪽에도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죠.

백정숙 : 소세키가 병석에 누워서 환상 속에서 어느 여자를 만나는 장면이죠?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옛 약혼자를 잊으셨나요? 히구치 노리요시의 딸 나쓰코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서동욱 : 자, 히구치 이치요가 누구입니까? 소세키는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에 나왔던 국민 작가입니다(1984~2004년). 히구치 이치요는 바로 현재의 5000엔짜리 지폐에 찍힌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입니다(2004년~현재). 그런데 <도련님의 시대>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두 사람이 약혼자였다는 거예요. 물론 환상이라는 설정 속에서이긴 하지만, 독자로서는 '정말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정숙 : 아니에요?

서동욱 : 궁금해서 일본 전문가로 꼽히는 한경구 서울대학교 교수에게 확인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런 사실은 있었습니다. 소세키 부인인 교쿄가 <소세키의 추억(漱石の思ひ出)>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이치요의 아버지가 도쿄부 관리로 일할 때 소세키의 아버지가 상사였습니다. 그런 배경 아래 양가 사이에 혼담이 오갔던 거죠.

단, 소세키하고 혼담이 오간 게 아니라 소세키의 형하고 혼담이 오갔었데요. 그런데 이치요의 아버지가 소세키 아버지한테 돈을 그렇게 빌려다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인데도 이렇게 돈을 빌리는데, 나중에 사돈 관계가 되면 얼마나 심하겠나' 하는 생각에 소세키 집안에서 파담(破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세키가 아니라 소세키의 형과 이구치 사이에 혼담이 있었던 걸 아주 교묘하게 굴절시켜서 작품에는 둘 사이에 혼담이 있었던 것처럼 투영한 거예요. 실제 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친 거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런 허구적 장치가 그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걸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돋보이게 한다는 겁니다. 혼담이라는 허구의 기괴한 장치가 인물의 차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 그 자체와 등가의 한 절대적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강양구 : 다른 예가 또 있습니까?

서동욱 : 이 작품이 역사를 요리하는 독특한 방식 하나만 더 소개할게요. 2부의 중요한 일화 가운데 하나가 유곽의 유녀를 탈출시키는 일이죠? 그런데 2부 183쪽에 보면 쓰보우치 쇼오와 그의 처 센코의 사진이 나옵니다. 쇼오는 일본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번역해서 펴낸 사람이죠. 단지 이 사진만이 중간에 제시될 뿐 어디에도 사진에 대한 설명이나 이 부부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난데없어 보이는 것이죠. 그럼, 이 사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웃음)

강양구 : 궁금합니다. 얼른 얘기해 주세요.

서동욱 : 바로 쇼오의 처 센코가 유곽의 유녀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2부의 허구임이 분명한 유녀 탈출 일화는 바로 이 쇼오와 센코의 인연을 알레고리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역사를 표현하기 위한 우의 차원의 짝으로 허구를 제시하는 흥미로운 수법이지요.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박슬기 : 저 같은 경우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마주치는 지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1부의 신바시 역 중앙광장에서 나쓰메 소세키와 안중근 또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으로 처형된 (당시는 하급 장교였던) 도조 히데키가 조우하는 장면은 굉장히 드라마틱하잖아요. 안중근의 등장을 사실이라고 깜박 속아 넘어가긴 했지만요. (웃음)

근대 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2부와 3부의 도입부인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장례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장례식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 마주치잖아요. 이 장면을 보고서 우리 근대 문학사에도 저 장면에 비교할 만한 장례식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봤죠. 실제로 1926년 소설가 나도향의 장례식이 그랬더군요. 당대의 문인들이 장례식에 다 모여서 추모를 했거든요.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백정숙 : 그런 허구적인 장치를 집어넣은 이유도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서동욱 선생님께서 언급했듯이, 방대한 자료 수집과 치밀한 고증 없이 <도련님의 시대>는 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전 작업이 작가에겐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해요.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도 자료에 짓눌려서 결국 작품을 못 내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도련님의 시대> 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눈앞에 모아 놓은 방대한 자료를 요령 있게 정리하고, 핵심을 추려서 예술로 승화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겠죠. 이 작품 군데군데 등장하는 허구적인 정치, 그러니까 '구라'는 바로 이런 사실(fact)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작가가 숨통을 트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요?

서동욱 : 그런 허구적인 장치가 오히려 <도련님의 시대>를 더 빛나게 합니다. 그런 장치가 그 시대의 본질을 연대기적으로 사실만 나열하는 것보다 더 정확히 꿰뚫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특징이야말로 이 작품을 역사 서술이 아니라 예술의 반열로 올려놓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있죠? 이 책을 읽다 보면, 요셉이 일신교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창한 파라오 아켄아텐(소설 속에선 아멘호테프)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이 아켄아텐의 유일신 사상이 유대교로 계승되었다고 보기도 하지요. (이런 관점을 배경으로 쓰인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입니다.) 그러니 다신교 사회인 이집트에서 일신교 사상을 주창한 아켄아텐과 일신교를 대표하는 아브라함의 자손 요셉이 대화하는 장면은 너무나 흥미롭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지닌 서로 다른 시대에 각각 살았습니다. 고증에 강박관념이 있다고 할 정도의 작가인 토마스 만이 이렇게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둘을 만나도록 한 이유가 뭐겠어요? 일신교의 비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면, 또 그 무엇이 일신교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작가는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본질에 대한 접근의 통로로서 역사는 소설적 허구에 대해 결코 우위권을 가지지 않습니다. 당연히 작가는 어떤 주제의 핵심을 전하고자, 즉 사안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 훼손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게 예술이죠.

강양구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런 허구를 사실로 믿어버리는 게으른 독자도 있거든요. 제가 그런 경우일 텐데요. (웃음) 그래서 최소한의 편집 장치라도 뒀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바람이 있긴 합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는 정말로 나쓰메 소세키와 안중근이 만났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닌가요?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메이지, 일본이 만들어진 시대

서동욱 : 이제 화제를 좀 바꿀까요? (웃음) 여기서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주제를 얘기해 보죠. 이 작품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를 그리고 있어요.

일본인은 메이지 시대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하는 것 같아요. 고대 그리스인이 자기 정체성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등을 찾았다면, 일본인은 늘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고자 메이지 시대를 반추합니다. <도련님의 시대> 역시 그런 관점에서 쓰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인물을 출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도련님의 시대>가 다루는 메이지 시대의 모습이 단지 문단 풍경 같은 한 단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작품은 메이지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연결망을 총체적으로 복원함으로써, 그 표면뿐만 아니라 심층의 구조까지 보여주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차원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3부 62~63쪽에 이시다 기치조가 출연합니다. 이시다는 바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1976년)의 소재가 되는 사건의 주인공이죠. 요부 아베 사다에게 목이 졸려 죽는….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박슬기 : 방금 서동욱 선생님께서 '거울'을 언급하셨죠? 제가 보기에, <도련님의 시대>는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를 살아가는 등장인물과 자기 시대에 놓인 거울이 있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일본인이 메이지 시대를 돌아보는 거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근대 문학을 공부하는 저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근대를 바라보는 거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도련님의 시대> 표지에도 박힌 광고 문구에 큰 배신감을 느꼈어요. (웃음)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 정작 책을 읽어보면 "혹독한 근대"는 있지만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은 없거든요.

이 <도련님의 시대>가 배경으로 하는 때가 메이지 40년대예요. 1905년 러일 전쟁(메이지 38년)이 끝나고,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메이지 42년), 결국 1910년 한일 병합(메이지 43년)을 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으로 질주하는 바로 그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개인들로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이 지배하는 시기죠.

서양을 모델로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일본도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처럼 강한 근대 국가가 되리라고 믿는 다수가 있죠. 한 편에는 그렇게 따라가 봤자 결코 일본인이 서양인이 될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거나 나름대로 저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를 괴롭힌 신경증이 바로 이런 갈등의 산물이라고 해석하고 있죠.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그런 모습, 즉 서양을 추종하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정작 일본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자신이 애초 가지고 있던 정체성마저도 흔들리는 바로 그런 불안한 상황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메이지 시대에 대한 묘사 등은 동의하기 어렵지만요.

강양구 : <도련님의 시대>가 메이지 시대를 미화한다는 느낌이 있죠?

박슬기 : 그렇죠. 메이지 시대, 그러니까 러일 전쟁 이전의 메이지 시대를 마치 그리운 고향 같은 것으로 표상하는 부분이 있죠.

강양구 : 좀 더 얘기를 하자면, 메이지 시대를 미화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때 그 도련님들이 좌절당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경로를 따랐을 것이라는 가정도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현실의 군국주의 일본이 아니라 다른 모습 말이죠.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서동욱 :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메이지 시대는 꾸며진 것이죠.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같은 작품이 그런 신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요. 메이지 시대를 그 이후인 쇼와 시대와 대비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활기찬" 시대 즉, 일본인의 이상향으로 만들어 버렸죠.

어쨌든 메이지는 오늘 날 얼마나 노스텔지어와 이상 속에서 부풀려졌건 간에, 일본인의 창세기 같은 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도련님의 시대>에도 바로 이런 모습이 있죠.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에는 한 편으로는 근대 국가를 급조하면서 사람들이 지나친 피로감에 빠진 모습이 나옵니다. 소세키의 신경증도 그 일부이지요.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창조성이 인상적으로 드러나요. 예를 들어, 4부 96쪽이 그렇습니다. 고토쿠 슈스이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면서 이런 고민을 합니다.

마지막 부분을 "만국의 직공이여 동맹하라"로 번역을 해놓았다가 '동맹'보다는 '단결'이 좋겠다고 바꿉니다. 그리고 '직공' 대신에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요. 그래서 결국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멋진 구절이 탄생하죠.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시킵니다. 서재에서 파우스트가 성서의 '로고스'를 어떻게 번역할까 고심하는 유명한 장면 같죠. 그리고 또 이것은 마치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동시에 독일어가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감동을 주는 장면이죠.

백정숙 :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짜릿했어요.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서동욱 :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뜬구름>을 창작하는 모습도 그렇죠.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자신의 현대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니, 일단 러시아어로 글을 쓴 다음에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서 언문일치의 현대 일본어를 창조합니다. 메이지 시대에 현대의 언어와 현대적인 마음이 동시에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죠. 이런 것이 전형적인 메이지의 풍경입니다.

박슬기 : 그런데 정작 <뜬구름>을 읽어보면 지극히 관념적이거든요. (웃음) 다쿠보쿠만 하더라도 일기를 한문으로 안 쓰고 로마자로 쓸 정도로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정작 일본의 전통시 단카를 계속 지었죠. 이런 모습이야말로 전통과 현대, 일본과 서양 사이에서 진동했던 메이지 사람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요.

강양구 :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덧붙일게요. 아까 박슬기 선생님이 <도련님의 시대>는 지금의 일본인이 메이지 시대를 투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집필 기간(1986~1997년)은 일본의 전후 호황이 거품 경제로 정점을 찍고서, 그 거품이 터진 다음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으로 들어간 시점과 겹칩니다.

그러니까, <도련님의 시대>에 나오는 메이지 시대 말기 도련님의 좌절과 불안이 바로 지금 일본의 모습과 상당히 겹치는 거죠.

백정숙 : 동감해요. 1980~90년대 일본의 지식인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위기감, 어떤 불안감 이런 부분이 메이지 시대 말기의 지식인의 고민과 공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어쩌면 바로 메이지 시대 지식인의 모습에서 현대 일본이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할 단초를 찾으려고 했던 걸 수도 있고요.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그 때, 핼리혜성이 있었다

서동욱 : 박슬기 선생님께서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 거울, 그러니까 <도련님의 시대>를 우리가 일본의 근대를 바라보는 거울로 읽을 수도 있겠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선 일본의 근대 만들기 이야기를 우리와 비교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당장 나쓰메 소세키는 이광수, 고토쿠 슈스이는 박헌영,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김소월…. 이렇게 대응할 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이 책의 4부에서는 불길한 징조로서 핼리혜성 얘기가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 핼리혜성이 지구 근처를 지나갔죠. 한반도에서는 어땠을까요?

▲ 박슬기 한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박슬기 :
제가 최근에 최남선이 그 즈음에 펴냈던 잡지 <소년>(1907~1911년)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읽다 보니까, <도련님의 시대>와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많더군요. 예컨대, 핼리혜성이 오던 해에 그걸 특집으로 다뤘어요. 또 다쿠보쿠가 돈이 생기자마자 극장에 가서 비행기 영화를 보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소년>도 비행기를 특집으로 다룹니다.

역시 일본이 한국의 거울이었던 거예요. 어떻게든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도련님의 시대>의 등장인물과 다른 점은 <소년>에 실린 텍스트에서 불안 같은 게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잡다한 정보를 늘어놓긴 하지만, 정작 그런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의 내면 갈등은 보이지 않거든요.

백정숙 : 계몽적이죠?

박슬기 : 정확히 그래요. 1910년이면 일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정말로 정치 사회적으로 큰일들이 많았던 해잖아요. 그런데 핼리혜성을 다루는 태도는 사실만 나열하는 식이거든요.

강양구 : 이 책을 읽으면서 걸리는 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일본인이 자기 근대를 만든 시기라고 회고하는 메이지 시대 같은 어찌 보면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도련님의 시대>가 묘사하는 일본 근대의 지식인이 서양과 직접 대면했을 때의 내면 갈등이 과연 우리나라 지식인에게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죠.

우리나라의 지식인 같은 경우는 일본을 경유해서 접한 서양의 근대 문명을 접하면서, 전통을 부정하고 현대를 수긍하는 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 우리도 일본이 했던 것처럼 해보자, 이런 식의 마음가짐으로요. 우리나라의 이광수나 최남선에게서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볼 수 있는 신경증 같은 불안감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백정숙 : 굉장히 수동적이었죠.

서동욱 : 진짜 찾아볼 수 없나요? 정말로?

박슬기 : 아니요. 그런데 시대가 달라요. 1910년대는 한일 병합에도 불구하고 이광수, 최남선 같은 지식인의 행보만 놓고 보면 말 그대로 "생기 넘치는 시대"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일본을 배우면 더 잘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이 만연해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아까 다쿠보쿠를 1920년대의 시인 김소월과 비교했잖아요? 실제로 1920년대는 분위기가 달라져요.

3.1 운동이 실패한 다음에 정말로 절망이 찾아오는 거죠. '독립'이라든가 '우리 실력으로 뭔가 할 수 있다'라는 게 어렵고 힘들고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한 거죠. 그 때부터 지식인 사이에 불안감이나 좌절감 같은 게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김소월 같은 경우도 문학을 하다가 그냥 귀향하고요.

비관, 절망, 퇴폐의 분위기를 띤 <백조>, <폐허> 같은 잡지가 등장한 것도 이때고요. <도련님의 시대>가 그리는 메이지 시대 말기가 바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1920년대인 것 같아요. 4부가 그리는 대역 사건은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긴 하지만 3.1 운동의 실패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1925년에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탄압당하기도 했고.

그림 한 컷에 세상을 담다

서동욱 : 이제 '만화'로서 <도련님의 시대>에 초점을 한 번 맞춰보죠. 다니구치 지로는 어느 정도로 평가할 만한 만화가입니까?

백정숙 : 일본에서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작가죠. 특히 이 작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사실체 그림을 그리잖아요. 그런데 일본 만화의 특징은 빨리빨리 보는 그런 속성이거든요. 그래서 <우주 소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영화 연출 기법을 차용한 긴 장편만화가 여럿 등장했죠.

반면에 다니구치 지로는 굉장히 사실체 기법을 고수하거든요. 이런 식의 작화 방법이 유럽 스타일과 닮았어요. 유럽에서는 '68 세대' 작가를 중심으로 성인을 대상으로 문학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 만화가 많이 나왔죠. 그런 만화의 특징이 바로 한 컷, 한 컷을 회화 작품 하나처럼 그리는 방식이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만화를 흔히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죠.)

다니구치 지로가 유럽 쪽에서 상도 많이 받고, 또 유럽에 일본 만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런 작풍 탓이 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니구치 지로가 일본 만화계에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만화 그 자체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박슬기 : 그런 작풍 탓인지 읽으면서 그림에 정보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원래 만화를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이 작품은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웃음) <도련님의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 되게 감동적이었던 게 4부 291쪽의 그림이에요. 간노 스가코가 삿갓 사이로 눈을 뜨고 햇빛을 보는 그림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서동욱 : 그런데 이렇게 극도로 세밀함을 추구하는 작풍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백정숙 : 한국에서는 우리 문학 작품을 그림으로 계속 그리는 오세영 같은 작가가 그런 작풍이죠. 한 컷, 한 컷의 그림 속에 세상을 다 담고 싶어 하는 그런 작가입니다. 그런 작풍 속에 들어있는 작가의 욕망은 스토리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뭔가를 더 보여주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동욱 : 저도 그런 대목에 주목해 보고 싶습니다. 흔히 소설가가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각색만 하는 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런 평가에는 역사는 곧 스토리텔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죠. 그런데 다니구치 지로의 경우는 어떤가요?

다니구치 지로는 극화를 내세우면서도 스토리텔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대담하게 합니다. 도쿄 거리를 산책하는 내용인 <우연한 산보>(미우 펴냄) 같은 작품도 순간순간의 분위기 파악에 치중하지,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게 따로 없습니다. 객관적인 풍경을 세밀한 그림으로 전하는 것을 통해서 줄거리를 버려도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경지에 이른 거지요.

따지고 보면, <도련님의 시대>도 사실 줄거리라고 따라갈 만한 게 없어요.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것만 놓고 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하고 일면 비슷한 구석도 있고요. 그러니까, 다니구치 지로의 세밀한 그림, 그리고 그런 그림이 가시화하는 시공간의 독특한 분위기는 줄거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작품을 끌어가는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의 진짜 작가는 누구인가?

강양구 : 이 대목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죠. <도련님의 시대>는 그림을 그린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글을 쓴 세키카와 나쓰오의 작품이기도 하거든요. 사실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도련님의 시대>의 뼈대가 되는 글을 쓴 사람은 바로 세키카와 나쓰오죠. 작품 중간에 등장해 해설을 하는 사람도 세키카와 나쓰오고요.

그래서 만화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도련님의 시대>가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세키카와 나쓰오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도발을 해보자면, 만약 세키카와 나쓰오가 다니구치 지로가 아니라 다른 만화가와 작업을 했어도 <도련님의 시대>와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웃음)

▲ 만화평론가 백정숙. ⓒ프레시안(손문상)
백정숙 :
아닐 걸요? (웃음)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아닐 것 같아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이른바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고, 그림 작가가 따로 있죠. 그런데 스토리 작가 이름은 만화책에 등장을 안 하고, 허영만, 이현세 이런 식으로 그림 작가 이름만 나가는 게 통상적인 관례였거든요.

그런데 사실 <공포의 외인구단>의 김민기, <오! 한강>의 김세영처럼 유명한 극화에는 모두 걸출한 스토리 작가가 있습니다. 만화가가 어떤 스토리 작가와 작업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물도 상당히 달라지는 걸 많이 보고요. 허영만 같은 작가는 김세영 작가와 공동 작업을 할 때가 최고의 전성기였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런 협업 그 자체가 사실은 작품의 고유성을 좌지우지합니다.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감성적, 철학적 교류 같은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그렇게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교류가 아주 잘 된 작품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세키카와 나쓰오가 다니구치 지로가 아닌 다른 작가와 만나서 이런 작업을 했다면 전혀 다른 색깔의 작품이 나왔을 것 같아요.

'김수영과 그의 시대'를 만화로!

서동욱 :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역사와 허구 모두를 아우르는 우리 만화의 성취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백정숙 : 사실 박건웅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새만화책 펴냄) 같은 성취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국내 만화가 같은 경우에는 역사 만화를 시도하는 걸 상당히 힘들어 합니다. 왜냐하면, 고증의 문제가 있거든요. 조선 시대, 일제 강점기를 그림으로 고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근대의 성립이라는 주제에만 초점을 맞춰 보면 <도련님의 시대>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지 더 회의적이에요. 이건 만화계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하면 결국은 일제 강점기일 텐데, 과연 그 시대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거리 두기가 가능할까요?

강양구 : 우리나라에서 <도련님의 시대> 같은 작품을 그린다면, 시대 배경이 1920~30년대가 아니라 오히려 1950년대 전후부터 4.19 혁명까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수영과 그의 시대' 같은 작품이요. 그런데 그 시대는 오히려 괄호 친 것처럼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해요.

박슬기 : 아, 그렇죠. <명동백작>(이봉구 지음, 일빛 펴냄) 같은 작품도 있고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최근에 1960년대를 다룬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백정숙 : 소설가 김승옥이 대학생 때 그린 시사만화('파고다 영감')에 주목한 <혁명과 웃음>(이정숙·천정환·김건우 지음, 앨피 펴냄) 같은 책도 흥미로운 작업이었죠.

서동욱 : 우리가 회고적으로 우리시대의 어떤 출발점 같은 걸 찾는다면 4.19 혁명이 그 분기점이라고 할 만합니다. 문학사를 염두에 두면 우리는 여전히 '김수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연구자와 만화가의 협업으로 멋진 작품이 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Natsuo Sekikawa, Jiro Taniguchi 1987/Futabasha Publisher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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