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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머무는 곳[法住]에서 참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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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처님 머무는 곳[法住]에서 참회하라

7월 고을학교는 <보은고을>

깊어가는 여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21강은 삼국시대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신라가 이곳을 차지했기에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삼년산성이 있는 곳, 조선조 이성계가 즉위 전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던 곳, 천륜을 어긴 태종과 세조가 천도법회와 참회기도를 올렸던 법주사(法住寺)를 품고 있는 고을, 충청북도 보은을 찾아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속리산의 아침 ⓒ속리산국립공원

고을학교 제21강은 7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속리산IC-구병산자락(선병국가옥/상현서원/보은동학취회지/서원리소나무)-법주사(오리숲/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팔상전/쌍사자석등/사천왕석등/대웅보전/원통보전/희견보살상/청동미륵대불/석연지/철당간/철확/선희궁원당)-점심식사 겸 뒤풀이-삼년산성-보은읍치구역(보은동헌/보은향교)-회인읍치구역(회인인산객사/회인향교)-풍림정사-회인IC-서울의 순입니다.

▲보은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1강 답사지인 보은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속리산, 한강·금강·낙동강의 삼수지원(三水之源)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충북 지역으로 접어들면서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황악산으로 산줄기를 이어가며 동쪽으로는 낙동강수계를 이루어 경상도 땅을 골고루 적시고 남해로 흘러들고, 속리산을 기점으로 북서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보은, 청주, 음성으로 이어지면서 물줄기를 한강과 금강으로 나눕니다. 한남금북정맥 이북 지역인 단양, 제천, 충주, 괴산, 음성의 물길이 한강수계(漢江水界)를 이루어 서해로 흐르고 한남금북정맥 이남 지역인 진천, 청주, 보은, 옥천, 영동의 물길은 금강수계(錦江水界)를 이루어 서해(西海)로 흘러갑니다.

이처럼 속리산은 물줄기가 세 갈래로 나눠져 한강, 금강, 낙동강을 이루는 삼수지원(三水之源)이 됩니다. 우리나라 산 중에 세 강물의 근원이 되는 산은 백두산과 속리산뿐인데, 백두산은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세 강물의 시원이 되는 ‘으뜸산’[甲山三水]입니다.

보은(報恩)은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서쪽에 위치하고 물줄기는 금강수계의 상류에 해당되며 ‘지아비산’인 속리산(俗離山), ‘지어미산’인 구병산(九屛山),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산’인 금적산(金積山)의 ‘삼산(三山)’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지아비산인 속리산(1,058m)은 백두대간 상에 있으면서, 한강의 남쪽 산줄기인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강의 북쪽 산줄기인 금북정맥(錦北正脈)이 겹쳐져 함께 산줄기를 이어가는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져 나오는 분기점입니다. 이 겹침 산줄기는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한남정맥은 경기도를 지나 김포반도에서 서해로 숨어들고 금북정맥은 충남을 지나 태안반도에서 서해로 그 뻗음을 마감합니다.

속리산은 행정구역으로는 보은군(報恩郡)에 속하나 보은, 괴산(槐山), 상주(尙州)의 삼군(三郡)에 걸쳐 있으며 옛날부터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구봉산(九峰山), 미지산(彌智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剛山), 자하산(紫霞山), 속리산(俗離山) 등 여덟 가지의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또한 속리산에는 8봉(峰), 8대(臺), 8석문(石門)이 있으니, 여덟 개의 봉(峰)은 천황봉(天皇峰),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묘봉(妙峰), 수정봉(水晶峰)이고, 여덟 개의 대(臺)는 문장대(文藏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이며, 여덟 개의 석문(石門)은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입니다.

속리산 이름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하나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784년(선덕여왕 5)에 속리산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어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기에 속세를 떠났다고 '속리(俗離)'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헌강왕 12년(서기 886년)에 속리산 묘덕암에 와서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 하려 하고
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법주사의 정대불사 ⓒ속리산국립공원

지어미산인 구병산(876m)은 속리산에서 뚝 떨어져 나와 경북과 도계를 이루는 웅장하고 수려한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병산은 서원계곡, 만수계곡, 삼가저수지 등을 품고 있으며 계곡 중심에 자리 잡은 99칸의 선병국 고가를 비롯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인 삼년산성, 동학교도들의 보은집회장소, 그리고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토골사터가 남아 있습니다.

아들산인 금적산(652m)은 속리산과 구병산 사이에 솟아오른 산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에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는 전설과 금송아지, 금비둘기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옥천의 박달라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봉수로서 조선시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보은은 백두대간과 한남, 금북정맥으로 둘러쳐져 있어 다른 고을로 향하는 고개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말치고개는 보은에서 속리산으로 들어갈 때 넘는 고개로 마현(馬峴), 마치(馬峙), 말티재라고도 부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보은현의 기록에 따르면 “마현박석(馬峴薄石)은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 4리에 걸쳐 깔려 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때에 닦은 어로(御路)라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고려 태조가 속리산을 방문할 때 말치고개를 넘었고 왕의 행차를 쉽게 하기 위해 3, 4리의 고갯길을 박석으로 포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수리티재는 보은읍에서 회인면을 통과하여 청주로 가는 주요한 교통로인 25번 국도에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보은읍치와 회인읍치를 잇는 주요한 고개의 역할을 하였는데 수리치, 차의현(車衣峴)이라고도 불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에는 “차의현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며 회인현과의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반령(皮盤嶺)은 회인읍치와 청주읍치를 잇는 대로상에 위치한 굴곡이 심하고 험한 고개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회인현에 “피반대령(皮盤大嶺)은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고 가장 높고 위험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인읍치를 중심으로 보면 북쪽으로 뻗은 길은 피반령을 넘어 청주읍치로, 동쪽으로 뻗은 길은 수리티재[車衣峴]를 넘어 보은읍치와 연결되어 있으며 보은에서 청주로 갈 때는 회인을 거쳐 피반령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염티[鹽峙]재는 우리말 ‘소금고개’ 또는 ‘소금재’로 서해안에서 금강을 소급하여 온 소금을 짊어지고 문의에서 회인과 보은으로 향하던 고개였으며 소금과 함께 생선 등의 물자가 이곳을 통하여 회인과 보은을 거쳐 경상도 상주 방면으로 이동하는 소금길이었다고 보입니다.

보은 지역의 산성은 보은현에 삼년산성, 회인현에 호점산성과 매곡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고 소지왕 8년(486)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지금의 선산)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합니다. 성을 다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중에는 오정산에 있는 산성이라 하여 오정산성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산성은 포곡형(包谷形)으로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고 높이가 13~20m로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며 둘레 1,680m, 문지 4, 옹성 7, 우물터 5개와 교란된 수구지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편과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충지로서, 신라는 이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김헌창(金憲昌)의 난 때 거점지로도 이용되었으며, 918년(태조1) 왕건(王建)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이용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호점산성(虎岾山城)은 물길 따라 난 길과 고개를 넘는 길 전체를 내려다보고 지키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회남면과 회인면 경계에 있는 호점산(338m)을 중심으로 해발 280m 이상의 5개의 산봉우리와 그 사이의 7~8개의 계곡을 둘러싼 고로봉 형식의 포곡식(包谷式) 석성입니다. 지형이 매우 험하고 가파른 서남쪽 1.2km는 흙으로 쌓은 토축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2.7km이며,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최영 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고, 금칼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3일간 먹을 양곡이 묻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매곡산성(昧谷山城)은 아미산(蛾眉山, 187m)에 있는 석성으로 아미산성이라고도 하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여 반월형(半月形)으로 쌓았으며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세로 되어 있고 산성의 기능은 북쪽의 피반령 방면을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남문, 암문, 동문, 북문 등 4곳의 문지(門址)가 있고 험준한 서벽에는 문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성에서 신라계와 백제계의 연질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의 빈번한 변동으로 주인이 자주 바뀐 곳으로 추정되며 산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가파른 경사와 산 아래의 회인천(懷仁川)은 천연의 해자(垓字)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시대 최대 요충지였던 삼년산성 ⓒ보은군

보은, 백제·신라의 국경분쟁지역

보은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했고 삼국시대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지역이었으며 신라 자비왕 13년(470년)에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삼년산성을 쌓았고 지증왕 3년(502년)에 주현제(州縣制)의 실시로 삼년산군(三年山郡)이라 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삼년군(三年郡)이라 개칭하였습니다.

고려 현종 9년에느 보령(保齡)으로 고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 6년에 보령현(寶齡縣)과 음(音)이 비슷하다 해서 보은으로 고쳐 부르고 현감(縣監)을 삼았으며 13년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이속시켰습니다.

이처럼 보은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보령(保齡)이었으나 태종 때에 지명이 갚을 보(報)자, 은혜 은(恩)자를 붙여 부르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 2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두 왕자와 개국공신 정도전 등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죄의식에 견디지 못해 등극한지 3년 되던 해에 시자를 시켜 신라 때부터 명찰로 이름난 속리산 법주사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두 왕자 동생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薦度佛事)를 크게 벌여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천도불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항상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말끔히 가시게 되자 태종은 즉위한지 6년째 되던 1406년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충청도에 보령이라는 지명이 둘이 있어 중복된다고 개명할 것을 지적하면서 보령을 보은이라 칭하도록 하명하였다는 것입니다.

보은에는 보은현(報恩縣)과 회인현(懷仁縣) 두 곳에 읍치구역(邑治區域)이 있었습니다. 보은현의 읍치구역의 주산(主山)은 천주교성당이 있는 봉우리로 산이 뱀과 같이 생겼다 하여 ‘사산(蛇山)’이라 부르고, 안산(案山)은 충혼탑이 있는 남산인데 산이 개구리와 흡사하다 하여 ‘와산(蛙山)’이라 합니다. 우백호는 교육청 뒷산으로 돼지같이 생겨서 ‘저산(猪山)’이라 부르는데 풍수지리적으로도 읍치구역에 주산(主山)과 안산(案山), 그리고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산은 있는데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이 없어 산봉우리가 셋만 있는 고을이라 하여 삼산(三山)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보은동헌(報恩東軒)은 조선시대 수령(守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관아의 중심 건물로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순조 때 중수하였으며 공간 구성은 전면 1칸을 모두 마루로 하고 뒤 우측 4칸을 대청, 좌측 3칸을 온돌방으로 두었으며 대청마루 중 동쪽 한 칸과 후면은 약 90㎝ 정도 높여 누마루를 꾸몄습미다. 이러한 수법은 전북의 태인동헌(泰仁東軒)에서도 보이는데, 내부 공간을 다양하게 꾸미려고 한 조선 후기 동헌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보은향교(報恩鄕校)는 조선 세종 때 창건되어 인조 이후 여러 차례 중건, 보수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등이 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명륜당은 1871년(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하게 된 상현서원의 강당을 옮겨 지은 것입니다.

회인현(懷仁縣)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이었고 통일신라 때는 매곡현(昧谷縣)이라 부르며 연산군(燕山郡,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에 속했는데 회인현이라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초부터입니다.

회인인산객사(懷仁仁山客舍)는 문종 때 건립되었으며 건평 35평의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白骨家]입니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다시 양 온돌방의 바깥쪽에 마루를 두고 있으며 건물 전면에는 객사문이라 불리는 삼문(三門)이 남아 있으며 1983년 해체보수할 때 대들보 아래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순치(順治) 12년(1655)에 중건하고 조선 순조 3년(1803)에 중수했으며 인산객사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회인향교(懷仁鄕校)는 조선 세종 때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보은향교와 합했다가 1611년(광해군3년)에 재건하였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4성(四聖), 10철(十哲), 송조4현(宋朝四賢)과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모셨고, 명륜당은 2층 목조건물로 본래는 누문 형식으로 1층은 모두 개방된 것을 뒤에 벽을 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현서원(象賢書院)은 1594(명종4년)에 창건한 후,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1610년에 사액된 서원입니다. 처음에는 삼년성(三年城) 안에 서원을 창건하여 김정(金淨)을 봉안하고 삼년성서원이라 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상현(象賢)’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72년(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성운(成運)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이후 1681년 성제원과 조헌(趙憲)을, 1695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경내에는 사우(祠宇), 정문인 일각문과 묘정비각(廟庭碑閣) 등이 남아 있습니다.

풍림정사(楓林精舍)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가 1889(고종26년) 창건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으로 ‘풍림정사’란 편액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의 글씨이고 ‘풍림정사기’ ‘풍림강업서’ ‘여담간명서’ 등의 현판과 회암(晦庵)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의 글씨 현판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풍림정사 뒤에는 1906(광무10년)에 건립된 후성영당(後聖影堂)이 있는데 주희(朱熹),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한원진(韓元震)의 모사본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인데 1921년 박문호의 영정을 추가 봉안하였습니다.

고봉정사(孤峰精舍)는 최수성(崔壽城)이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김정(金淨), 구수복(具壽福) 등과 함께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후학들을 강학하였던 강당입니다. 그 후 구수복이 이어받아 오다가 그의 5대손 구일봉이 퇴락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고 1981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최수성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시문, 서화, 음률, 수학에 뛰어난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원정(猿亭) 또는 북해산인(北海山人)이며, 본관은 강릉인데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에 관련되어 사형되었고 뒤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입니다.

금화서원(金華書院)은 금적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1758년에 지방유생 강재문(姜在文) 외 105인이 발기하여 최운(崔澐), 성운(成運), 조식(曺植), 성제원(成悌元), 최흥림(崔興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고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년)에 훼철되었던 것을 1917년 지방 유림들의 주선으로 복건(復建)하였는데 지금은 사우와 강당 그리고 관리사가 남아 있습니다.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은 1919~1921년 서원계곡 입구인 하개리에 세워진 보은 선씨의 세 채의 기와집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두 가옥인 선병욱가옥, 선병묵가옥은 1940년대 지은 것으로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서,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기의 대표적 건물들입니다.

이곳 지형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큰 개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룬 섬으로, 일설에 의하면 집터가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어서 자손이 왕성하고 장수했다고 하며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및 사당의 3공간으로 구획하여 안담으로 둘러싸고, 그 밖을 바깥담으로 크게 둘러쌌으며 바깥담 남쪽, 집의 어귀 솔밭 숲속에는 이 집 할아버지 선씨의 효자정각이 있습니다.

하개리와 이웃한 장내리는 고종 30년(1893년)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치며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모인 보은집회의 현장입니다.


▲보은향교 ⓒ보은군

동학 보은집회, 종교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동학(東學)의 초대 교주 수운(水雲) 최재우(崔濟愚)가 이단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1892년 동학도들은 충남 공주와 전북 삼례에 모여 교주의 신원(伸寃)과 동학의 포교를 인정해 달라는 집회를 열었고 1893년 2월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같은 내용으로 상소운동을 벌렸습니다. 같은 시기에 삼례에서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도 수천 명이 모여 동학을 사도(邪道)로 몰지 말고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을 내몰고 탐관오리를 내치라는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집회를 가진 후 대표 20명을 뽑아 서울로 보내 거리 곳곳에 요구사항을 적은 방문(榜文)을 붙였습니다.

다음달 3월에는 충북 보은, 전북 원평, 경남 밀양에서 집회가 각각 열렸는데 특히 보은집회는 제2세 교주 해월(海月) 최시영(崔時亨)이 장내리 북쪽의 옥녀봉 아래 큰 기와집을 동학운동의 본부인 도회소(都會所)로 정하고 충청도는 물론이려니와 경상, 전라, 경기, 강원, 황해도에서까지 동학교도 수 만 명이 모였으며 최시영은 이곳에서 50여 개의 포(包) 이름을 정하고 대접주(大接主)를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삼가천의 냇돌을 옮겨와 길이와 너비가 백여 보이고 높이가 반 장 가량 되는 성을 쌓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주문을 외우고 교리를 강론하는 공동생활의 수행을 통해 단결을 강화했습니다.

조정에서는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로 보내 회유하는 한편 장위영 군대 600여 명을 청주로 파견하자 지도부는 밤에 몰래 빠져 나가고 구심을 잃은 대부분의 동학교도들도 각자 흩어져 보은취회(報恩聚會)는 20여 일만에 막을 내렸으나 이전의 교조신원운동과 포교 허용을 요구하는 종교운동을 뛰어 넘어 외세를 배척하고 탐관오리를 척결하자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義信)이 창건하였습니다. 당시는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는데 553년은 진흥왕이 백제의 점령지를 공격해 대파하고 충주를 소경(小京)으로 삼았던 해입니다. 왕실에서는 이곳에 절을 세우도록 지원하여 통치력을 강화하고 군사요충지로 삼았으며 이후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그 제자들이 중창하여 미륵신앙을 일으켜 신라의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부각되면서 비로소 대찰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 태조가 중수하고 충렬왕, 충숙왕, 공민왕이 다녀갔으며 3명의 왕자가 출가해 주지가 될 만큼 왕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이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여덟 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충청도 지방 승병의 본거지였다 하여 왜군들의 방화로 모조리 불에 타버렸던 것을 사명대사가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하여 인조4년(1626)에 벽암선사에 의해 마무리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기 전에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린 곳이고, 왕권을 얻기 위해 혁명동지와 이복동생들을 참살한 태종 이방원도 이곳을 찾아 참회하고 치성을 드린 곳이며, 병에 걸렸던 세조는 복천암에서 사흘기도를 올린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법주사에는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문화재 22점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팔상전(捌相殿)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 ‘팔(八)’과 ‘팔(捌)’은 같은 글자임)>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팔상도는 고대 불교사원에서 탑 안에 주로 봉안되었기 때문에 팔상전은 종종 탑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따라서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입니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으로 1984년 4월 30일 쌍봉사의 대웅전인 3층 목조탑이 소실됨으로써,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1층은 주심포(柱心包)이고, 2층 이상은 다포집 양식의 포작(包作)으로,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나 쌍봉사대웅전(雙峰寺大雄殿) 등 다른 3층 건물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는 특수한 수법으로 지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상륜부까지 약 65m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에 제일 높은 것입니다.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팔각의 하대석 위에 두 발로 서서 가슴을 맞댄 사자 두 마리가 앞발과 주둥이로 상대석과 화사석,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현존하는 사자 조각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조각 수법 또한 뛰어나 머리의 갈기와 다리, 몸의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중흥산성쌍사자석등과 더불어 통일신라 시기의 이형석등(異形石燈)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의 기본양식을 갖춘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 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던 때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8각형의 상, 중, 하대석(臺石) 위에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었고 4매로 조합된 사각형 지대석 위에 팔각의 기대 각 면에 안상(眼象) 장식을 하였고 하대와 상대에 장식된 단판8엽의 연화 내에는 화려한 보상화문을 조각하였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중층(重層) 불전 가운데 하나로서 내부에는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을 모셨습니다. 이 삼신불은 벽암대사가 중건할 때 조성된 것으로, 삼신불이란 석가모니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하여,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報身]과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 석가모니의 진여(眞如)의 몸[法身],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몸[化身]을 가리키는데 이렇듯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어서 대적광전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원통보전(圓通寶殿)은 처마가 깊게 숙여서 건물 전체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이 보이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마루가 한 곳에 모여 있으며, 그 정상에 석조로 만든 절병통이 놓여 있는데 이것은 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에서 볼 수 있는 석조물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4개의 기둥이 네 귀퉁이마다 서 있어 이것을 4천주(天柱)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추녀 뒷몸을 결구하기 위한 것인데, 뒤편의 두 기둥을 이용하여 후불벽을 만들었고 후불벽 아래에 불단(佛壇)을 배치하고, 그 위에 목조 관세음보살좌상(觀世音菩薩坐像)을 모셨는데 이 관음보살상은 조성기(造成記)에 의하면 순치2년, 즉 1655년(효종6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석조희견보살입상(石造喜見菩薩立像)은 현재 원통보전 옆에 마련된 보호각 안에 있는데 원래는 팔상전 앞에 석연지(石蓮池), 사천왕석등과 함께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명칭은 <법주사사적기(法住寺事蹟記)>에 ‘희견보살석상 일좌(喜見菩薩石像 一座)’라는 기록에 의거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남아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보살상입니다.

희견보살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등장하는데 고행을 즐겨하며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가지고 몸과 어깨가 타더라도 향로 공양을 쉬지 않는 보살입니다. 그 모습이 큰 눈과 곱슬머리 형태, 하체에 짧은 바지를 입는 등, 일반적인 보살상의 모습과 달라 이 상의 명칭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단순히 향로공양상으로 부르기도 하고 머리 위에 든 물체를 향로가 아닌 발우나 다기(茶器)로 인식하여 각각 가섭봉발가사상(加葉奉鉢袈裟像), 차공양자상으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석련지(石蓮池)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伏蓮)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으로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인 구품 연화장을 상징하며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전체적인 조형수법은 특이한 형태이고, 특히 동자주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돌난간 동자주와 유사합니다.

법주사, 태조·태종·세조가 치성 드린 대찰

철확(鐵鑊)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의 거대한 철제 솥으로 원래는 조사각 뒤쪽 석옹(石瓮)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720년(성덕왕18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크기로서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은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로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176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비어 있으며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舊)조사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순조태실은 복천암(福泉庵) 맞은편의 속칭 태봉산(胎峰山) 산봉우리에 있는 조선 순조(純祖)의 태를 묻은 태실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태가 그 사람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가르치는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아 길지(吉地)를 찾아 태를 안장하던 풍습이 있었으며 궁중에서 태어난 아기의 출생의례로서 태실을 조성하고, 후에 왕위에 오르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하여 다시 석물(石物)로 가봉(加封)하였습니다.

법주사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은 가지가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을 닮은 단아한 소나무로 1464년(세조10년)에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처져 있어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이 소나무는 가지를 위로 들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연걸이소나무’라고도 부르며 그 뒤 세조가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하여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 소나무가 서 있는 앞마을의 이름을 진허(陣墟)라고 하는데 그 당시 세조를 수행하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서원리 소나무는 정이품송과 부부 사이로 정부인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전체적으로 우산 모양으로, 정이품송은 외줄기로 곧게 자란 모습이 남성적이고, 이 나무는 줄기가 양 갈래로 갈라져 있어 여성으로 비유되어 이 두 소나무를 부부송(夫婦松)이라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마스크,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21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버스 사전예약 관계상 7월 22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최소출발인원 20명).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

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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