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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다! 김시습의 옥류동천, 박세당의 수락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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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원하다! 김시습의 옥류동천, 박세당의 수락동천

7월 서울학교는 수락산 계곡

짙은 싱그러움이 가득한 7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 제40강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이 방랑생활을 끝내고 한양에 돌아와 머물렀던 곳이며 훗날 매월당을 흠모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그곳에 찾아들어 매월당을 기리며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던 수락산에 입산하여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아울러 이번 강의는 지난 제19강부터 시작한 서울학교 <시즌2>의 마지막 수업이기도 합니다.

▲‘물이 굴러 떨어진다’[水落] 하여 수락산이라 한다. ⓒ추임새
서울학교 제40강은 2015년 7월 12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30분 경기도 남양주시 수락산마당바위입구 버스정류장에 모입니다(서울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1번 출구로 나와 10, 17, 33, 33-1등 버스를 타고 20분 내외 달린 후 수락산마당바위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세요). 서울 외곽에서 모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락산마당바위→옥류동천(옥류폭포-간폭정터-은류폭포-금류폭포-암각글씨-내원암)→수락산장→수락동천(점심식사-석림사-노강서원-암각글씨-궤산정-반남박씨종택→박세당사당)→<시즌2>마감 쫑파티→장암역

▲<수락산 옥류동천·수락동천의 유적들> 답사길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려 뻗쳐오던 산줄기가 분수치에서 서쪽으로 그 방향을 틀어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이루며 대성산, 적근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 주엽산으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이어져 오다가 포천의 축석고개 넘어, 으뜸줄기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불곡산, 흥복산, 도봉산, 노고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들어 뻗침을 마감합니다. 버금줄기는 광릉(光陵)을 감싸고 돌아 서원천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주엽산, 천보산, 송산, 깃대봉, 숫돌고개를 거쳐 마침내 수락산에서 힘차게 솟구쳤다가 계속해서 불암산, 검암산, 망우산, 아차산으로 이어져 광진나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이처럼 수락산은 한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뻗쳐 있는 산줄기에서 가장 산세가 수려하고 기운이 넘치는 산입니다.

수락산(水落山)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쪽의 내원암계곡 일대의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진다고[水落]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수락산의 암봉들이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수락산 능선 상에 있는 암봉들이 서울을 향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라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수락산을 특히 한양의 수호산(守護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수락산에는 지사(志士)들이 은둔하여 풍류를 즐겼고 명당 기슭에는 왕족의 묘역도 마련되었으며 따라서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들이 번창하였습니다.

수락산은 그 산줄기가 남북으로 불암산(佛岩山)까지 길게 이어져 있어 이 두 산을 경계로 서울과 경기도로 나누어지는데 남서쪽의 서울은 노원구 상계동이고 북동쪽의 경기도는 의정부시와 남양주시 별내면입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으로 수락산이 품고 있는 계곡도 북동쪽 계곡인 옥류동천과 북서쪽 계곡인 수락동천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매월당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옥류동천(玉流洞天)입니다만 매월당을 흠모한 서계 박세당이 은거하며 학문에 힘썼던 수락산 서쪽 계곡인 수락동천(水落洞天)에도 남아 있습니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과거공부를 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삼일을 통곡한 뒤 똥통에 빠졌다가 나와서는 설악산 오세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받아 승려가 됩니다. 관동, 관서, 호남 등지를 유람하다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주석하며 <금오신화>를 쓴 뒤 다시 한양에 올라와 머물렀던 곳이 수락산 북동쪽 계곡인 옥류동천으로, 금류폭포 위에 있는 내원암 근처에 초암을 짓고 생활하였습니다.

▲김시습과 박세당의 발자취가 곳곳에 서린 수락산 ⓒ카리

약 200년 후 매월당을 흠모한 소론(小論)인 서계 박세당이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자 동봉(東峰)의 뜻을 따르겠다며 남서쪽 계곡인 수락동천에 들어와 살면서 매월당의 다른 호인 동봉(東峰, 동쪽의 봉우리)과 역상관계(易像關係)인 서계(西溪, 서쪽의 계곡)라고 호를 지었으며 청절사(淸節祠)를 짓고 매월당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실학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보내니 박세당의 너그럽고 후덕(厚德)한 장자(長者)의 모습이 지명에 남아 장자동, 장재울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서계가 노닐던 정자인 육모정의 궤산정(簣山亭)이 보수(補修)의 손길을 기다리며 쓰러질 듯 초라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서 이곳을 지키며 살아왔기에 수락산 서쪽 기슭에는 서계의 묘와 사당, 영정, 그리고 반남(潘南) 박씨의 종택(宗宅)이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계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를 배향한 노강서원(鷺江書院)이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박태보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를 가던 중에 노량진에서 죽어서 그곳에 그를 배향한 노강서원을 세웠다가 반남 박씨 종택이 있는 수락산 밑자락으로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수락산 남쪽 산록은 덕릉(德陵)이라 불리는 선조(宣祖)의 생부(生父)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역이 있고 그 곁에 원찰(願刹)로서 흥국사(興國寺)와 임오군란 때 고향으로 피신하던 명성황후가 잠시 들러 무사하기를 빌었던 용암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42기 중 어디에도 덕릉이라는 이름은 없는데 왕의 묘를 일컫는 능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에는 다음과 같은 야사(野史)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이며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종친에 불과하였기에 본래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조(河城君, 하성군) 또한 덕흥군의 세째 아들로 더욱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명종(明宗)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종친들을 불러 사람됨을 시험하였는데 임금이 쓰는 익선관(翼善冠)을 내어 주면서 “머리 크기를 보려고 하니 써보라” 하여 모두 임금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익선관을 써보았건만 하성군만은 “이 관은 전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관”이라며 끝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후한 점수를 얻은 하성군은 명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잇게 되는데 임금이 될 수 없는 출신이지만 임금이 된 선조는 이미 세상을 떠나 수락산 자락 흥국사 입구에 묻혀 있는 아버지 덕흥군을 선조 2년(1569년)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하였으나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덕릉고개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대원군 무덤 쪽에서 넘어왔다” 하면 나무 값을 평소대로 지불하고 “덕릉고개로 넘어왔다” 하면 그 값을 후하게 쳐 주었기에 그 후로는 모든 사람이 이 고개를 덕릉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능(陵)이란 임금과 왕후의 무덤에만 붙일 수 있으나 백성의 입을 통해 덕흥군은 왕 대접을 받은 것이 됩니다.

▲내원암에는 정조의 왕세자인 순조의 탄생설화가 전하고 있다. ⓒ서울학교

덕릉고개를 넘어 마당바위입구에는 내원암 안내 표지판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내원암까지 수려한 계곡이 펼쳐지는데 이 계곡이 수락산 계곡 중 단연 으뜸인 청학리(靑鶴里) 옥류동천(玉流洞天)입니다. 옥류폭포(玉流瀑布), 은류폭포(銀流瀑布), 금류폭포(金流瀑布)의 빼어난 3개의 폭포를 품고 있으며 수락(水落)이란 산 이름도 이 폭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옥류폭포 일대는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천막과 좌판으로 계곡을 뒤덮고 있어 계류를 감상하기는 이미 틀렸고 음식 냄새와 취객들의 고함소리만 코와 귀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래도 옥류폭포를 지나고부터는 계곡에 불법으로 세운 식당들을 모두 철거하고 있으며 차량의 통행도 제한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아래쪽 옥류폭포 일대도 불법 건축물 철거를 위한 등산객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지자체에서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은류폭포는 갈려나간 다른 물줄기에 있어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으나 조금의 고역을 감내한다면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금류폭포에 이르게 되는데 200여 돌계단을 오르는 수고로움이 없이는 웅장한 금류폭포의 위용을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

김시습이 수락산에 들어와 머물던 곳이 금류폭포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매월당은 10년간 수락산에 머물렀다<매월당집(梅月堂集)>” 하고 남용익(南龍翼)의 <간폭정기(看瀑亭記)>에는 옥류폭포 옆 간폭정(看瀑亭)에서 5리를 오르면 김시습 구지(舊址)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옥류폭포에서 금류폭포까지 오리쯤 되고 금류폭포 바로 위에 내원암이 있으니 김시습은 10년 동안 금류폭포와 내원암 근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금류폭포 바위자락에는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암반 움푹 들어간 곳에는 옥수(玉水)가 가득 고여 있으며 넓은 바위에는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고 힘찬 해서체(楷書體) 필치로 각자(刻字)해 놓았는데 새긴 시기를 글자 끝에 새겨놓았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가 없어서 안내판을 보니 ‘道光 丁西五月(도광 정서오월)’ 1873년(헌종 3년)이라고 쓰여 있는데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8대 선종(宣宗)의 연호로 선종은 1820~1850년 재위했으니 1873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서(丁西)는 정유(丁酉)의 오자(誤字)인 듯 하며, 선종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정유(丁酉)년은 1837년으로서 1837년을 1873년으로 잘못 쓴 것 같습니다.

금류폭포 위쪽에 있는 내원암은 정조(正租)의 왕세자인 순조의 탄생설화가 깃들여 있는 사찰로서 왕실의 도움을 많이 받아 번창했었습니다. 내원(內院)이란 도솔천(兜率天)에서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56억 7천만년 뒤 이 땅에 내려 와 중생들을 구원할 메시아(마이트레야)인 미륵불(彌勒佛)이 있는 내원궁(內院宮)으로서 내원암은 미래를 구원할 미륵불이 시절인연(時節因緣)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입니다.

내원암은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찰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인 정조 때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사세가 점차 번창하였습니다. 1794년(정조 18년)에 칠성각(七星閣), 1796년 사성전(四聖殿), 1825년에 지족루(知足樓)를 건립하였고 1880년(고종 17)에는 조정에서 내원암의 모든 전각을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묘향산에 있던 16나한을 모셔 와서, 이때부터 성절[聖寺]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왕실의 도움을 받게 된 연유는 후사(後嗣)가 없던 정조(正祖)는 대구 파계사(把溪寺)에서 수행하던 용파화상(龍波和尙)을 내원암으로 불러들여 삼각산 금선사(金仙寺) 농산화상(聾山和尙)과 함께 정조의 원자(元子) 탄생 기도를 드리게 하였는데 농산화상이 입적하여 후궁인 수빈 박씨의 몸을 빌려 원자인 순조(純祖)로 환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실과 인연을 맺은 내원암은 이후에도 왕실의 내탕금(內帑金)으로 여러 당우(堂宇)들을 중수하는 등 불사를 이어왔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부터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여 칠성각과 요사(寮舍), 대방(大房)을 신축하였으며, 1968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그 이후 영산각(靈山閣)과 요사 2동과 미륵전을 복원하였습니다.

내원암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는데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있는 고졸한 품위를 풍기는 마애불(磨崖佛)입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땅 속에 묻혀 있던 부처를 찾아 세웠다는데, 땅에 묻히지 않았더라면 순조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사찰의 부처님이기에 아마도 그 코를 갈아서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이들이 복용하여 부처님의 코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작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표현 형식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고 시기에 관계없이 민초들의 소박한 조각 솜씨가 정겹게 느껴지는 불상입니다. 그리고 매월당이 이곳에서 머물 때 수락산의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데 그 내용이 내원암 현판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쓰러질듯 서 있는 궤산정 ⓒ서울학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마스크,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그리고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세요.(점심은 산속이라 마땅한 식당이 없으므로 각자 도시락을 준비해오세요. 끝나고 서울학교 <시즌2> 쫑파티가 있습니다^^)

서울학교 제40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시즌2>마감 쫑파티,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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