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진'은 어떻게 성공 했나" 첫 번째 기사에서 유료 결제에 의존하는 '레진코믹스' 사업 모델을 살펴봤다. 조회 수에 목을 매는 콘텐츠 업계 현실에서 의미 있는 사례라고 봤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만화가 月 수입 5000만 원, '레진'은 축복이다!")
이 기사 후, '레진코믹스'를 즐겨 보는 게임 및 영화 등 콘텐츠 업계 관계자들과 난상 토론을 했다. 그 내용 가운데 공통분모를 소개한다. '레진코믹스'의 경우, 창업 초기부터 '개발자와 만화가가 행복한 회사'를 지향했다. 이게 성공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만화가뿐 아니라 개발자도 행복해야 한다. 게임을 제외한 콘텐츠 업체에선 대체로 콘텐츠 담당자가 중심이었다. 개발자는 보조적 역할에 그쳤는데, 이래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몰입'의 조건
엔지니어들이 쓰는 말 중에 '심리스(seamless)'라는 게 있다. '이음매 없이 매끄럽다'는 의미인데, 기계나 재료 분야에선 용접한 자국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IT 분야에서도 쓰인다. 예컨대 PC로 동영상을 보다가, 얼마 뒤에 스마트폰으로 마저 본다고 하자. 특별한 조작 없이도, 앞서 시청을 중단했던 그 장면부터 볼 수 있다면, '심리스'한 것이다. 미국 유료 동영상 업체인 '넷플릭스'가 이런 서비스를 한다.
누군가가 콘텐츠, 그것도 시험공부나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되는 종류에 돈을 쓴다면, 그 이유가 뭘까. 콘텐츠로 수익 내는데 성공한 분야가 게임이다. 이쪽 사람들은 진작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몰입이다. 몰입은 그 자체로 행복감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몰입 경험의 대가로 돈을 쓴다. (물론,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따라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는, 게임 성공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사소한 버그(오류)가 게임 흥행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즉 '심리스'한 서비스는 몰입 경험을 낳는 중요 조건이다.
다른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책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게다. 비문이나 오탈자 등 문장 오류, 혹은 번역이나 편집, 인쇄나 제본 오류가 몰입 경험을 어떻게 망치는지. 출판사가 '심리스'한 서비스를 하지 않았던 게다.
디지털 미디어에선 몰입 경험을 방해하는 요소가 더 많다. '다음 페이지' 버튼을 눌렀는데, 갑자기 기기가 멈춰버린다면, 누구나 몰입에서 풀려난다. 페이지가 뜨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면, 링크가 깨져 있다면, 특수 문자가 엉뚱하게 표기된다면…. 경우의 수는 다양하다.
기술은 변방
쉬운 문제라고 보니까 전문가를 투입하지 않는다. 역시 콘텐츠 기업인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콘텐츠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이들이 조직의 중심이다. 기술적 문제를 다루는 자리는 변방이다.
조회 수에 의지하는 사업 모델이라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디지털 콘텐츠에 실린 광고는 결국 '미스 클릭'을 유도하는 게 목적이다. 이용자는 실수로 광고를 클릭한다. 이용자의 몰입도가 높아지면 광고를 볼 가능성은 낮아진다.
반면, '콘텐츠 유료화'로 수익을 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용자는 콘텐츠에 대한 평가에 따라 돈을 내지 않는다. 100점짜리 콘텐츠니까 100원을 내고, 50점짜리니까 50원 내는 게 아니다. 대개는 지금 이 순간의 몰입 경험이 끊기는 게 싫어서, 혹은 유익한 몰입 경험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낸다.
결제를 하는 순간까지, 몰입이 풀리지 않아야 돈을 번다. '레진코믹스'의 경우, 구글에 내는 30% 수수료를 감수하고 '구글 지갑(google wallet)'을 쓴다. 결제 편의성 때문이라고 하는데, 몰입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돈을 내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 몰입을 방해하는 기술적 오류는, '콘텐츠 유료화' 성공의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19년차 개발자, '오버 스펙' 아니냐고요?
창업 초기 <슬로우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권 씨는 "이건 만화 서비스인데, 당신이 여기서 일하기에는 '오버 스펙'이 아니냐"라는 시선이 있다고 말했다. 게임이 아닌 콘텐츠 기업에선, 경력이 긴 개발자를 뽑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텐츠 생산이 핵심이고, 개발자는 보조 역할이었다.
그런데 '레진코믹스'는 창업 초기부터 개발자가 더 많은 조직이었다. 현재 직원 40명 가운데 기술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이가 13~15명이다. 10년차 개발자가 막내 취급 받는다. 반면, 만화 편집자는 6명이다. 소설 서비스도 준비 중인데, 이를 담당하는 편집지가 2명, 일본 서비스 관련 편집자가 2명이다. 요컨대 편집자보다 엔지니어가 더 많다.
얼핏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콘텐츠 기업의 기술 기업화'는 뚜렷한 흐름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에게 인수된 뒤, 기사회생했다. 기술 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한 이유로 꼽힌다. '넷플릭스' 등 동영상 업체 역시 마찬가지다. 조직 안에서 개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콘텐츠 업체가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면, 그건 화려하거나 복잡한 기능을 덧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기능을 위해서라면, 굳이 실력파 개발자가 필요없다. 초보자도 다룰 수 있는 좋은 개발도구가 많다. 그러나 몰입을 끊지 않는, 매끄러운 서비스를 구현하려면 수준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몰입이 풀리면 밥줄도 끊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