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안타깝게도 소위 진보진영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쪼개졌다 합치기를 반복해왔다. 생각과 비전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위기인 줄 모르고 모여야 할 때 모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정치철학자 박동천 전북대 교수, 그는 한국의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함을 호소한다.
"한국의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손끝이 찢어져 가며 칼끝을 겨우 붙들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모른다.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이에 맞는 굉장히 절실한 얘기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려면 '연대'밖에 없다"며 "'못살겠다, 살기가 힘들다, 모욕감을 느낀다, 이 체제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연대에 있어 합의와 절차, 규칙을 강조한다.
"필수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판은 안 깬다는 전제를 깔고, 대신 거기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과 우선순위를 절차로 정해야 한다. 최대한으로 토의하고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한 끝까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수렴되지 않는 차이점이 불거진다면 절차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라는 말처럼 취업의 문턱을 넘기에 바쁜 청년들에겐 '진실을 포기하지 마라'고 당부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일정한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있는 체제여야, 이들이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면, 인생을 포기하거나 테러를 하거나 그렇게 되는 거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에도 책임이 있다. (중략) '진실을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옛말에 '자기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이 주입한 것을 믿어서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어 그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 사랑까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참아주는 톨레랑스(tolerance) 사회를 꿈꾸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1978년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청년 박동천'이 궁금하다. 어떤 학생이었나.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진도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여의도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1회 졸업생이다. 위로 선배가 없다. 1976년에 서울대에 입학해 이듬해 철학과에 들어갔으나, 그해 가을 학교를 그만뒀다. 그 뒤 서울대 입학시험을 다시 봤는데 떨어져 국민대 정치학과를 갔다. 학교 다닐 때는 운동권에 속한 적이 없었고, 또 그들에게 마음을 줄 상황이 아니었다. 집에는 고시를 볼 거라고 핑계 대며, 계속 학교에 다니다 2학년 때 군대에 갔다. 제대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동(同)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렇게 87년 2월 석사 학위를 받았다.
- 민주화운동에 속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울대에 입학했던 1976년은 유신시대로, 가장 엄혹했던 시기였다. 운동권에 선뜻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핵심에 있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당시 데모하는 친구들을 보니 어떤 대책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땐 이렇게 정의하지 못했지만) 데모가 그저 어떤 좌절감의 표현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괴로웠던 것 중 하나는 '현 체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속상했다. 운동권 활동을 한다고 견뎌낼 자신도 없었다. 당시 운동권은 대화를 통해 상의하고 조정하고 설득하는 형태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기치를 올리고 목소리를 높이면 우르르 따라가는 분위기였다. 물론 촌에서 올라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연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학교 선배 한둘은 있었지만, 고등학교 선배는 당연히 없었다. 운동권은 보통 선후배 사이로 맺어진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런 게 없었으니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주변인, 경계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운명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최인훈(1936~)의 <광장>(1960)·<회색인>(1977), 이호철(1932~)과 최일남(1932~)의 소설을 읽으면서 또 역사책이나 전기를 통해 해방 이후 소위 '중간파'라는 사람들을 알게 됐는데, 내가 그들의 기질과 굉장히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후에 학문을 깊이 하면서 '조직(組織) 대 개인(個人)'을 대비하는 관점에서 보니, 나는 어떤 조직에 말려드는 것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성향이었던 것 같다. 소설가 이호철은 이데올로기보다 인간 자체를 강조하는데 나도 그런 기질의 소유자였다.
- 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 후, 미국 윌라멧(Willamette)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다 일리노이 대학에서는 정치사상사를 연구했다. MBA 과정을 밟다 정치학으로 바꾼 이유는?
국민대가 1987년 윌라멧 대학교와 자매결연을 하고 처음으로 교환학생을 모집했는데, 거기에 지원해 미국을 가게 됐다. 처음에는 정치학으로 박사 공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MBA를 따고 한국에 돌아와 증권회사에 취직해 평범하게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MBA 과정이 끝날 무렵이 되니까 기왕에 왔는데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장학금을 준다는 곳이 생기면 더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자는 생각이었다. 10곳에 장학신청서를 보냈는데, 6곳에서 거절했다. 안 되나 보다 생각하며 돌아가려는데, 다른 4곳에서 모두 장학금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중 일리노이 대학의 조건이 제일 좋아서 거기로 갔다.(웃음)
일리노이에서는 주로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을 공부했다. 거기서 정치학과 벨덴 필즈(A. Belden Fields, 1938~)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는 인권을 중시하며 꾸준히 연구하는 행동가이자 막르크스주의자(Marxist)였다. 원래 트로츠키(Leon Trotsky)와 마오쩌둥(毛泽东)을 연구했으나, 프랑스 '68항쟁' 당시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쓴 논문으로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기질상 마르크스주의자일 수가 없는 사람이지만, 한 학기 동안 그분 밑에서 공부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는 내게 철학과 피터 윈치(Peter Winch, 1926~1997) 교수를 추천해 줬다. 그 뒤로는 주로 철학과 공부를 했다. 주말마다 윈치 교수 집에 모여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는데, 이때 정말 공부가 많이 됐다. 문제는 박사논문을 쓰는 것이었는데, 당시 비트겐슈타인이나 인식론을 주제로 논문을 쓰면 정치학과에는 심사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필즈 교수와 타협해 플라톤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펴냄) 저서에서 진보진영에 대해 낡은 프레임과 피상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의 폐쇄적인 정치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라는 사람에 대해 있지도 않은 신비로운 아우라 같은 것을 씌어놓고, 마치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복음인 양 얘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비판한다. 이들이 스스로를 진보라고 하다 보니, 일반인 대다수도 마르크스와 연관이 있는 것만 진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타파하자'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경로를 제시하고 있나. 말이나 구호가 무성할지는 몰라도 실천 경로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타파'라는 기치 아래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다. 누구는 단식투쟁을 하자고 하고, 누구는 FTA를 반대하자고 하고, 누구는 반미(反美)로 가고 누구는 북한과 평화를 염원하자고 한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구호만이 난무할 뿐, 실천 동력으로 연결될 실마리 자체가 없다. 이 상태에서 책을 많이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막연한 구호만으로 마르크스의 기치를 사당(祠堂)에 모셔놓고 제사 지내듯 한다. 진보가 미래를 열 수 있는 안목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와 사고방식을 깨야 한다.
또 한국의 진보가 민족주의에 열심인 것은 전 세계적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좌파가 민족주의를 하는 것은 황당한 사례다. 일찍 세상을 떠난 성균관대 고(故) 김일영(1960~2009) 교수는 '박정희도 민족주의자였다'라고 했다. (내가 읽어본 글 중에서는) 정치학자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명시적으로 민족주의라고 지목한 것은 그가 최초였다. 김 교수는 박정희의 조국근대화가 민족주의의 한 형태였으며, 많은 사람이 이에 결집해 나라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물론 박정희식의 민족주의는 문제가 많다. 필요하다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를 죽이고 밟아 없애는 야만적인 민족주의이다. 이에 대해 김구-장준하 계열의 민족주의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 비한 역시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문법으로만 점철됐지, 그들에게 '한국 민족주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분명하지 않다.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사회 안에서 수평적·수직적 통합을 전제한다. 실천적이 되지 않더라도, 명목상 그 사회의 민족을 구성하는 인구 집단이 하나의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과 이념을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와 더불어 합의를 통한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협동하는 체제가 된다. 대표적으로 장준하(1918~1975), 문익환(1918~1994) 같은 분이 꿈꾸었고, 서중석(1948~) 교수가 이를 계승했다고 본다. 조선시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이런 정치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육을 받지 못한 민중에게는 불가능했다. 조선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분된 왕조 체제였지, '우리'라는 하나의 민족일 수 없었다.
'일제(日帝)'라는 외세가 쳐들어왔을 때 '우리'라는 의미가 소극적으로 사용됐다. 이 관점은 신채호(1980~1936) 같은 사람이 원조이며, 그의 저술에 의해 널리 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의 침략 당시 일본이 아닌 것을 '우리'라고 뭉뚱그려 규정한 셈이다. 나는 이를 '이중 타자화'라고 하는데, '우리'는 '저들'로부터 타자화된 소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라는 일체감이 우리 내부에 어떤 공통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와 '저들'을 가르는 경계에 의존해서 파생한 일체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외세(外勢) 또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즉, 우리는 외세를 이해하고 대응한 것이 아니라, '외세'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객체화·대상화를 통한 타자화를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검토조차 안 됐던 것이다. 우리의 사유 습관에 있는 '이중 타자화'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 진보와 보수의 관계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프레시안> 대담에서 "기울어진 건 맞다. 하지만 진보 스스로 운동장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싸울 것이냐는 얘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 관련 기사 : "MB는 결코 정치에 무능하지 않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은 맞다. 기울어져도 아주 심하게 기울어졌다. 2012년 대선에서 득표율 차이가 51.6% 대 48.0%로 아슬아슬했던 결과를 보고 진보와 보수가 대등한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국회의원 선거만 봐도 진보가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4년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이 한국 헌정사에서 국회 주도권이 여(與)에서 야(野)로 바뀐 유일한 사례였다. 이마저도 3개월 정도 지나서 무너졌다. 70년 헌정사에서 단 한 번 있었던 일이다. 기초지방의회 지역구는 새누리당 독점이다. 더구나 자본이 있는 곳, 언론계, 관료계, 법조계 등의 인맥은 보수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현재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50대가 주류인데, 이들은 나처럼 박정희 시대에 초중고 및 대학교에 다닌 사람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박정희식으로 정립된 세대가 지금 이 사회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손끝이 찢어져 가며 칼끝을 겨우 붙들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모른다.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이에 맞는 굉장히 절실한 얘기가 나와야 한다.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합과 연대' 말고는 길이 없다고 본다. 현재 한국·중국·일본이 거의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데,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모스카(Gaetano Mosca, 1858~1941),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 같은 학자들이 얘기했던 기본적으로 왕조체제에서 약간 변형된 엘리트 순환체제로 가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인다. 이를 타개하려면 '연대'밖에 없다. '못살겠다, 살기가 힘들다, 모욕감을 느낀다, 이 체제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안 됐던 일이다. 연대를 못해서 결국 우리가 분단되지 않았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공동전선을 펼치고 집단의사를 창출해 동참하는 협동과 동맹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정치가 이 협동과 동맹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인데,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 연대하고 협동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보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연합하는지, 궁금하다.
지금 기득권 세력은 '가치 연합'이 아니라, '이권 연합'으로 뭉쳐 있다. 명령에 복종하면 뭔가 나오기 때문에 죽치고 있는 것이다. 여차 해서 불리해지면, '시켜서 했다'고 발뺌하면 된다. '조용수 판결'에 배석했던 이회창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언론인 조용수 씨(1930~1961)는 <민족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인 5월 18일 체포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구속됐다. 죄목은 조총련계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면서 북한이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것. 1961년 10월 31일 상고심에서 사형이 선고돼 두 달 후 사형됐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용수에 대한 사형 판결을 위법한 것으로 규정하고, 국가에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은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편집자)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이르게 한 판결에 배석해 '반대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007년 대선 출마 당시 문제가 되니까, 자기는 소장배석판사로서 발언권이 없었다며 발뺌했다.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게 진실이다. 사람은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지위도 주는 밥줄에 목줄이 잡혀 따라가기 마련이다. 지금 기득권 세력은 굉장히 공고한 '이권 연합'으로서 조폭이 단결하는 것과 다름없다. 세상이 이래선 안 된다.
일부가 '이권 연합'을 한다는 것은 나머지를 뜯어먹겠다는 얘기다. 이것에 맞서 뜯어 먹히는 나머지가 연대해서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생각도 다르고 믿지도 못하니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정치인과 일반인의 연대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아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차에 의한 연대'가 필요하다. 필수 '목표'를 정해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연대는 깨지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과 우선순위를 절차로 정해야 한다. 토의하고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한 끝까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수렴되지 않는 차이점이 불거진다면, 절차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서로가 유리한 룰(rule)을 차지하려고 줄다리기만 하다 줄이 끊어지는 것은 천하의 바보짓이다. 다수결, 제비뽑기, 팔씨름, 닭싸움, 동전 던지기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연대하고 비전을 제시해야한다.
- 한국 정치의식의 보수성을 지적하며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제시했다. 위의 책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여러 갈래 중에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넓다"며, 이것이 바로 '정치·사법의 자유주의'와 '소외계층의 복지'를 결합한 제도"라고 설명하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용인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큰 것 같다. 해방 공간에서는 다들 사회주의가 정답이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한국은 굉장히 평등 지향적인 사회다. 사실 이건 좀 왜곡된 평등인데,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89~1979) 같은 사람은 이를 '억압적 평등주의'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얘기다.
부잣집 자식과 가난한 집 자식이 경쟁한다고 할 때 원천적인 불평등이 있다. 부잣집 자식은 인생에서 실패할 기회가 100번 정도 허용이 된다면, 가난한 집 자식은 한번 실패로 인생이 끝나버리는 다시는 오를 길이 없는 불평등이 있다. 빚을 갚다가 연체하면, 바로 신용불량자가 돼버린다. 그런데 이것은 불평등일 뿐 아니라, 부자유다. 이런 식으로 젊을 때부터 기회를 차단당한 사람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하는 사람만 처참한 게 아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바로 옆집에 굶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돈 많은 부자라고 해도 옆집에 거지가 사는데 그걸 편하게 여길 사람이 어디 있나. 사람이란 다 그렇다. 가난한 사람의 형편이 좋아지면 부자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특히 젊은 세대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일정한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실 수 있는 체제여야, 이들이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면, 인생을 포기하거나 테러를 하거나 그렇게 되는 거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에도 책임이 있다. 지금 이 세대는 과잉생산을 넘어 지나친 풍요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인류의 절반은 아직 굶주림에 시달린다. 10조 원을 가진 자가 100조 원을 가지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틈에, 수십억 명의 인구가 고통 받고 있다. 개인의 욕심은 성취동기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 정도의 욕심은 죄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권력을 발동해 부익부빈익빈이 무제한으로 기승을 부리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국에서는 오직 사회주의라고만 치부하는데, 자유주의 안에도 이런 발상의 흐름이 아주 두껍게 흐른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 등이 그런 자유주의자들이었고,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롤즈(John Rawls, 1921~2002)를 거쳐 센(Amartya Sen, 1933~), 크루그먼(Paul Krugman, 1953~) 등으로 이어진 흐름이다. 이 흐름이야말로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제임스 밀(1773~1936) 등을 온전히 이어받은 자유주의의 주류다.
- 지난 19대 대선 때 안철수·문재인 두 후보에게 '개헌'을 말하라고 주장했다. 지금 정치권에서 개헌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다.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1944년 프랑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뒤, 파리로 금의환향해 임시정부 수장을 맡았다. 곧바로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의회제 헌법을 만들려고 하자, 드골은 '대통령제를 채택하지 않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프랑스 제헌의회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드골은 1년 반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1948년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제헌국회가 내각제 헌법을 만들었는데, 이승만(1875~1965)이 김성수(1891~1955)에게 '이렇게 가면 자기는 안 하겠다'고 하니 김성수가 유진오(1906~1987)에게 '대통령으로 모셔야 할 분이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하느냐'며 하룻밤 사이에 헌법안을 고쳤다는 것이다. 시작은 같은데, 결과는 정반대다.
한국 헌법은 그대로 지켜만 진다면, 의회제에 가깝다.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권력을 분점하기만 하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대통령이 되면 다들 그 앞에서 껌뻑 죽는다. 지금 새누리당 의원 중 20명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대 의사를 표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헌법상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연금 개혁안에 대해서도 새누리당 의원 20명만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 박근혜 아니라 박정희가 다시 와도 대통령 마음대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없다. 개헌이 필요한 건 맞지만,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그렇다면 어떤 식의 개헌이어야 하나.
기본적으로 개헌은 나라의 기본 틀을 제대로 정해보자는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가령 헌법재판관이라는 제도도 1987년에 만들어진 거다. 대통령이 3명,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3명, 국회에서 여당이 2명, 야당이 1명을 임명한다. 사실상 8대 1이 되는 거다.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불합리를 바꾸려면, 대법관 임명제도뿐 아니라 애당초 법관 임용제도 자체를 고쳐야 한다. 이 밖에도 헌법을 수정해야 할 대목은 어림잡아 수십 가지다.
중요한 것은 개헌 논의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 헌법 개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최소 10년 정도의 공론을 거쳐야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충분하다. 뉴질랜드의 경우, 단순다수 소선거구제에서 비례대표제로 바꾸면서 10년이라는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우리도 이렇게 시간을 들여 국민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보라고 공론화해야 한다. 그러면, 국민 스스로가 정치사회화가 된다. 이 자체로도 좋은 정치커뮤니케이션 교육이 되는 것이다.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계산한 정치인의 개헌 주장은 개선(改善)이 아니라 개악(改惡)밖에 안 된다.
- '87년 체제' 전환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는 쟁취했지만, 내용적 민주주의는 아직 부족하다고들 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냐고 주장했다. 현재 부족한 내용적 민주주의를 극복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은 없다. '87년 체제'를 '민주화(民主化)'라고 부른 것도 하나의 수사일 수 있지만 오도(誤導)한 면이 있다. 민주주의란, 어떤 시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 역사에 특별히 민주화라고 할 시기가 없다. 언제 민주화가 됐으며, 절차적 민주주의는 언제 완성됐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헌정주의(憲政主義)를 멋있게 표현한 말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프랑스나 독일을 보라. 그 사회는 절차가 완성되었나? 끊임없이 무전유죄(無錢有罪)가 있다. 앞으로도 계속 법치(法治)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법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강화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갑(甲)질이 유럽이라고 없겠는가. 다 있다. 차이는 한국보다 유럽이 갑질을 당한 사람이 법에 호소해서 구제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다음에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다. 두 용어는 서로 다른 관점을 표현하는데, 절차적 민주주의 관점은 민주주의를 '제도'로 바라보는 것이고 실질적 민주주의 관점은 '이상'으로 보는 것이다. 둘 다 '완성'이란 개념이 없다. 우리가 민주주의 강화를 원한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강화를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문구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민주화가 됐다'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더 말하는가.
- 지난해 1월 <프레시안> 칼럼에서 "권력의 노예가 되어 굴종하면서 (하지만 날마다 전전긍긍 두려움에 떨면서)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의 공기가 사회에 충만해질 때까지 미력이나마 기여하면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찬밥신세라고 했다. 이유가 뭔가.
(☞ 관련 기사 :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왜 '찬밥신세' 못 면하나)
박근혜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했다. 기가 막힌 아이러니다. 학자들, 지식인들이 이런 아이러니에 휩쓸리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박정희 유신 시절, '왜 자유민주주의를 안 하느냐?'는 비판에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는 서양의 얘기고 사치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은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진입한 적이 없다. 약자는 밟고 보는 아주 잔인한 체제이다. 한국·싱가포르·일본 모두 경제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없는 사회(illiberal society)'다. 이런 사회가 외견상 민주주의 흉내를 내니까 '자유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례로, 이명박 정권 때 대학총장 직선제를 뒤집어 이상한 선거 절차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절차대로 뽑은 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교육부는 절차대로 선정된 경북대 총장 후보에 대한 임용제청을 거부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는 시늉만 낸 채 덮어버렸다. '말로만 민주주의', '말로만 자유 사회'의 단면이다. 이런 것도 선거라고 부르는, 억지가 통하는 것이 '자유 없는' 사회의 특징이다. 어떤 정치학자는 이를 선거만 하는 '선거주의(electoralism)'라고 부르는데, 정확히 말하면 '선거하는 척만 하는 체제'라는 뜻이다. 러시아 푸틴이 대통령을 두 번한 뒤 총리를 했다가 또 대통령을 하는 그런 식인 거다. 이런 사회를 자유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한국도 러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역시 지난해 1월 <프레시안> 칼럼 중 "한국의 정치문화는 기본적으로 대의제의 이념을 수용하지 못한 채, 정부라고 하면 바로 행정부를 연상하는 틀에 사로잡혀 있다. 정부라고 할 때 의회를 연상하지 않고 행정부를 연상하는 정치의식은 본질적으로 정치권력을 한 사람의 우두머리에 귀속시키는 하향식 정치의식이다"라고 했다. 정치문화·정치의식은 제도의 직접적인 원인이 클 텐데, 어떻게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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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식을 상향식으로 바꾸려면, 국회의 권한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국회의원 수를 늘리고 비례대표제를 채택해야 한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에게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후, 선거라면 치를 떨었다. 67년과 71년에도 부정선거를 통해 간신히 당선된 박정희는 결국 유신 쿠데타로 선거를 없애고 체육관으로 갔다. 그러면서 '선거는 낭비고 골치 아픈 것'이라는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어 주입했다. '세뇌'가 얼마나 심한지 지금도 대다수 국민은 선거를 귀찮은 것으로 인식한다. 프랑스는 선거로 뽑는 공무원 수가 4만7000명이다. 미국은 소방서장, 교육위원회, 산림위원회, 보안관, 어떤 주는 주의 법무장관, 재무장관, 감사원장 등을 선거로 뽑고, 각 지방의 판사들도 선거로 선출하는 곳이 많다. 이렇듯 선거로 선출하는 회의체, 즉 정부의 수가 미국에는 8만 5000개다. 한국의 국회의원 수가 오히려 많은 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미국에 비해 많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미국의 연방의원 숫자 535명밖에 모른다는 자기 고백과 같다.
- 철학적인 이야기, 혹은 근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시시 때때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 나름대로 외로움 또는 어려움 같은 게 있지 않은지?
질문에 '근본적'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하는 얘긴데, 나는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내가 하는 말이 특별히 근본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현상의 이면에 무슨 신비한 이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발상 자체가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고, 이념이나 규범보다는 실제적 이득과 필요에 초점을 맞춰야 생산적인 방향의 논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단, 다른 사람이 잘 보지 않는 국면이나 차원을 파헤치려는 것은 맞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스스로를 돌아보면 남들이 흔히 하는 말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 내 기질이자 팔자인 것 같다. 흔한 말 중 맞는 말은 다 알기 때문에 따라 할 필요가 없고, 틀렸다면 틀렸으니까 따라 하면 안 된다. 모든 틀린 말을 다 고칠 수 없고, 그중에 관심이 있는 것을 나름대로 추적하고 확인해 고쳐 말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한 게 당연한 거다.어릴 때 외로움을 많이 느꼈지만, 지금은 인간이란 원래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과거 외로울 때는 <논어>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를 외우며 삭혔는데, 지금은 '내가 죽고 없어져도 세상이 특별히 나빠질 리는 없다'고 했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태도가 더 맘에 든다. 어려움을 가장 많이 느낄 때는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나 청중이 "어렵다"고 말할 때다. 그런 반응은 사실 "관심이 없다"거나,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제가 가리키는 방향 말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일반적으로 소통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인데, 그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 수년간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 2001년 전북대에서 15년째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정치학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학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어떤 범주로 묶더라도, 내부는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뉜다. 따라서 정치학자를 대표해 답변할 수는 없고, 내가 어떤 종류의 정치학자인지를 말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정치학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과학에서 기법 일부를 응용해 쓸 필요는 있지만 과학을 본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얘기지만, 거칠게 말해 물리적 대상을 주제로 한 자연과학의 시각을 '사회과학'이랍시고 답습해 인간을 물리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풍조가 심해지는 것이다. 또 정치학이든 뭐든 모든 학문은 진실을 추구하는 만큼, 문장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에 관한 최소한의 수련이 학자의 자격 요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학의 경우, 통계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기법은 물론이고, 반드시 인식론적 탐구가 일종의 예비과정으로 강습 돼야 한다. 대학에 들어와 통계학을 배우기 전에 수학을 10여 년 배워야 하듯이, 논리적 사유의 훈련과 문장의 진위 구분을 초중등 교육 과정에서 훈련해야 한다. 특히 역사책에 나오는 문장과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문장의 일관성과 진위를 따지는 훈련을 받으며 자란다면, 그들이 나중에 유권자로 성장했을 때 정치의 품격이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은 인간에게 행동의 지침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도덕은 학문의 주제라기보다는 삶 속에서 먼저 실천해야 하는 주제라는 말이다. 실천은 개인의 기질·소원·여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재단하려는 순간 가장 도덕적이지 않은 길로 빠진다. 사회질서를 위해서 꼭 필요한 최소한으로 강제하고, 나머지 옳고 그름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도 소원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인도하는 것이 도덕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다.
-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 사랑까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참아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홍세화 씨가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을 '관용(寬容)'으로 대중화시켰는데, 번역이 잘못됐다. 수용을 뜻하는 '용(容)'보다는 참을 '인(忍)' 자를 써서 '관인(寬忍)'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고슴도치 딜레마에 대해 얘기한 게 있다. 고슴도치들이 추워서 서로 살을 맞대려고 가까이하니, 가시에 찔리는 거다. 멀리 가면 또 춥고, 가까이 가면 가시에 찔리고. 이를 반복하다가 언제부터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마이클 오크쇼트(M. Oakeshott, 1901~1990)는 이를 인용해 '고슴도치가 시민적 결합의 원리를 깨우쳤다'고 말했는데, 이게 '관인'이다. 필요한 만큼 서로 온기를 나누면서 서로 참는 것. 동양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관계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되는 즉 '균형(均衡)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식으로 '톨러레이션(toleration)'이라고 하든, '톨레랑스'라고 하든, 모두 주안점은 '참아준다'는 데 있다. 어떻게 자신이 반대하는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나. 다만 자신이 반대하고 싫어하는 것을 참고 공존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문명사회의 원리다. 이렇게 '관인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연대가 가능하다. 나아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 아니겠나.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발언의 자유, 반대의 자유 등을 관인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혜의 핵심이다. 그러고 여유가 있다면, 옆 사람이 너무 가난해 고통 받고 있다면 도와주고. 그렇게 고통을 덜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옆 사람이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지 않은가. 아주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남을 돕는 것만큼 자존감을 채워주는 일도 없다(웃음). 이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여하고 싶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정치에서 불거진 문제 중 우리가 생각만 제대로 한다면 고칠 수 있는 게 아주 많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진실을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옛말에 '자기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이 주입한 것을 믿어서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권력이 하는 소리가 좀 이상해도 일단 접어두고 생업에 종사하는 건 정상적이고 건강한 거다. 이건 진실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있는데 사정상 더 이상 캐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면, 바로 거기까지가 진실이다. 사정 때문에 더는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이상하지 않은 일로 둔갑하면 안 된다. 의문이 있는 것을 '아니'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궁금한 점이 해소될 때까지 캐 들어가는 것이 생명의 원천이다. 여건 때문에 캐 들어가지 못했다고 궁금증까지 말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 경우, 인생에서 경험한 쾌락 중에서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것만큼 즐거운 쾌락이 없다.
- 박동천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본능이다. 자유는 본성이다. 자유는 영혼의 울림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정리는 조경일 연구원과 손어진 비례대표제포럼 간사가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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