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분노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참 좋다. 마음껏 웃으니 정말 좋다."
단원고 2학년 10반 고(故) 이경주 양의 엄마 유병화 씨는 딸의 이름을 딴 강아지 '쭈쭈'를 품에 앉은 채 환하게 웃었다. 같은 반 고(故) 이은별 양의 이모도 "지난해 4월 16일 이후, 오늘처럼 웃고 농담하는 건 처음"이라며 "진짜 좋다. 진짜 좋아!"를 반복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모처럼 웃음꽃이 폈다. 흙을 나르고 모종을 심는 사이 웃음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번졌다. 노인정으로 마실 온 할머니들, 나들이 차 집을 나온 가족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아이들까지 텃밭 주변에 모였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지역 주민 50여 명은 지난 10일 416기억저장소 인근에 '고잔동 하늘땅별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 만들기는 세월호 참사의 중심 지역인 고잔동 주민들과 4.16정신을 잇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늘땅별 마을공동체 준비팀'(가칭)이 기획한 첫 행사다.
텃밭은 오혜란 마을공동체 준비팀 팀장이 안산 농업기술센터 텃밭 사업 공모에 참여해 자금을 마련한 뒤, 고잔동 현대빌라 주민들의 협조로 과거 놀이터였던 공터를 제공받았다. 이날 마이금 도시농업연대 대표는 흙과 모종 준비를 도왔으며, 마을공동체 '반월사랑'은 닭볶음탕과 김치전 등 음식으로 연대했다.
'벚꽃이 피는 것도 싫다'던 세월호 가족, 새 생명을 키우다
2시간여 만에 별 모양 텃밭이 만들어졌다. 상추와 고추를 심던 유 씨의 손이 흙 범벅이 됐다. 쭈쭈의 발에도 덩달아 흙이 묻었다. 유 씨는 먹을거리지만, 새 생명을 심었다는데 고무되어 있었다.
"나라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제대로 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한다. 절망감이 크다. 그럼에도 세월호 가족들 마음이 얼마나 수수한지…. 새 생명을 키우겠다고 텃밭을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데, 나라에서는 우리를 자꾸 밟으려고만 한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 씨는 경주의 유품을 딸 생일 즈음이던 지난해 9월 택배로 받았다. 수학여행을 떠난 지 150일 만에 돌아온 아이의 가방과 교복에는 참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렇게 1년. 박근혜 정부는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 시행을 강행했으며, 세월호 가족들은 독립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세월호 가족과 공동으로 텃밭을 소유하게 된 현대빌라 거주민 김미경 씨는 "'벚꽃이 피는 것도 싫다'는 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가족들에게 이런 공동체 활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텃밭 만들기 같은 마을공동체 활동은 세월호 참사 여부와 관계없이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주민들도 '세월호'라는 선입견이 아닌, 우리 마을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공동체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매주 화요일 공동체 준비팀 이야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미숙 씨(안산시 부곡동 거주)는 "세월호 가족들이 '안 되는 건가? 너무 거대하다'라는 좌절감에 빠져있다"며 세월호 참사가 제2, 제3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 씨는 "텃밭을 매개로 세월호 가족들과 주민들이 이웃으로 만났듯 일단 만나야 정치적·사회적 오해도 풀린다"며 "공동체 의식을 가진 크고 작은 모임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분노의 표정, 나눔의 표정이 되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는 416기억저장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준비 모임이 한창이다. 하지만 416기억저장소를 이끌고 있는 김익한 명지대학교 교수는 지난달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기억저장소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며 공동체 모임은 "유가족과 시민이 모여 스스로 실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김 교수는 텃밭 만들기에 애쓴 이들에게 막걸리 한 잔을 건네는 것에 만족했다.
김종천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은 "고잔동 주민 입장에서도 서울 광화문에 가지 않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장(텃밭)이 생겼다"며 "텃밭은 '모두들 안산으로 와라. 세월호 가족이 밥 한끼 대접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늘 세월호 가족들 얼굴이 분노의 표정에서 나눔의 표정이 됐다"며 흐뭇해했다.
이천환 마을공동체 준비팀 준비위원(한사랑병원 병원장)은 "세월호 가족 한두 명만이라도 오늘 하루 웃고 즐기는 감정을 느꼈다면 큰 성과다. 공동체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 작은 첫 삽을 펐다"며 겸손해했다. 특히 "새싹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보며 '무엇을 키우고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삶에 대한 욕구를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텃밭"이라고 강조했다.
"텃밭 만들기에 함께한 이들 모두 강아지가 뛰노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렇게 지켜본 '내 새끼'가 한날한시에 사고를 당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다르다. 요즘 '사람마다 제각각인 마음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다르더라도 서로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시점 또는 계기가 있지 않을까? 바로 그때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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