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책을 소개하기도 쉽지 않다. 우선 현앨리스가 대체 누구인지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한다. 한국 근대사 연구가 직업이고 심지어 1년 넘게 <박헌영 전집>의 편집 실무를 담당했던 나조차도, 임시정부의 핵심이며 미주 한인 민족운동 지도자인 현순 목사의 딸로 상하이 시절에 박헌영과 친분이 있었으며, 좌익 활동에 종사하다 북한 정권 수립 후 입국하여 남로당 숙청 당시에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었다는 것 정도 외에는 아는 바가 없으니 오죽하랴. 1903년생인 그녀와 같은 세대들은 거의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녀 스스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저자가 지적하듯 식민지 조선에서도,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해방 후 남한이나 북한에서도 그녀는 경계인이었다. 그녀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기보다 주변부를 맴돌 수밖에 없던 그녀의 삶이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시대는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지워 없애는 시대였으니, 결정적으로 북한에서 그녀의 행적은 조작된 재판 기록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빈약한 몇 가지 직접 자료들 외에 많은 부분을 증언과 간접적인 사료, 추론과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최근 국민과 민족의 단위를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 역사가 관심을 많이 끌고 있지만, 현앨리스의 삶의 여정이야말로 트랜스내셔널의 극적인 사례다. 저자가 재구성한 현앨리스의 삶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1902년 현앨리스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평양을 건넜다.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1907년 다섯 살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고, 1920년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건너갈 때까지 이화여자고보 등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현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지냈으나 이승만과 대립한 이후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하이로 망명해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박헌영은 이 무렵 현씨 집안과 아주 친밀했고, 당연히 현앨리스와도 친분이 있었다. 이 인연이 후일 그녀의 삶을 파국으로 이끌게 되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상하이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던 현앨리스는 1922년 경상도 출신의 유학생 정준과 결혼하여 시댁으로 들어갔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아들 정웰링턴을 출산했다. 1930년대 뉴욕에 살면서 대학을 다녔고, 이후 동생 피터와 함께 미국공산당 하와이 지부 활동에 참가했다. 2차대전 중에는 항일전에 직접 참가하기 위해 미군 정보 관계 기관에서 근무했고 해방이 되자 주한 미군 민간통신검열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으나 미군 내 공산주의자와 함께 활동했다. 1946년 미군 방첩대(CIC)에 의해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동생 피터, 아버지 현순과 함께 신문 <독립>과 재미조선인민주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재미 한인 진보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9년 각고의 노력 끝에 체코로 건너가서 이경선과 함께 진정한 혁명의 본거지라고 생각한 북한에 입국했다. 1953년 남로당 계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미군의 간첩'으로 등장했지만 그녀의 최후는 알 수 없다.
'민족'과 '조국'을 찾아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현앨리스의 삶
현앨리스 스스로는 거의 답하고 있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저자는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관계망-가족과 진보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인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현앨리스와 그의 가족, 동지'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현씨가의 4대의 연대기이며, 재미 한인 진보 운동 그룹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법은 꽤 효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보자. 현앨리스와 박헌영의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는 박헌영의 첫사랑 운운하는 신파류의 소문들이 통용되고 있었다. 저자는 현순과 박헌영의 상하이 행적을 분석했다. 열렬한 이승만 지지자였던 현순은 반이승만으로 돌아선 이후 상하이의 이르쿠츠크파 사회주의 그룹에 관여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까지 참가할 정도였다. 현순의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았으니 현앨리스의 동생 피터는 상하이 소년혁명단의 단원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청년 그룹의 대표자였던 박헌영이 소년단의 지도자였다. 현앨리스가 사회주의에 기울어지는 것도, 현씨 집안 형제들이 박헌영과 친밀하게 교류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로소 박헌영과 현앨리스의 관계를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들이 모두 관여되어 있기도 했지만 특히 2차대전 이후 현앨리스의 행적은 재미 한인 사회의 진보적 그룹들의 민족운동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직접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시도했고, 미군 입대와 정보 분야 복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현앨리스로서는 미국 육군 정보 당국이나 미군정의 정보 기구에서 번역을 담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1946년 이후 입북하기까지, 저자는 조선민족혁명당 한인지부에서 출발한 재미 한인 민족운동의 진보적 그룹이 급진화되고 고립되면서 북한 정권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로 이행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이념과 정체성은 '조국' 혹은 '민족'을 중심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이들이 느끼는 현실 정치의 현장과 중심은 한반도였으나,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장은 미국이었다. 독립을 목표로 했을 때는 한반도 밖의 무대가 오히려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해방 이후 미국에서의 삶은 이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결국 1949년 이후 북한에 들어가 혁명 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현앨리스만이 아니라 이들 다수가 원했던 일이었다.
개인으로서 현앨리스는 어떻게 살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이렇게 가족과 동지들의 활동과 이념, 네트워크를 통해 현앨리스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하다. 개인으로서 현앨리스가 어떻게 살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다. 몇 가지 점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현앨리스는 동생 피터나 데이비드와 달리, 영어가 외국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해도 다섯 살에 돌아와서 십대 후반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도 상하이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 문법에 애를 먹으면서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려 했던 것은, 이런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끝내 대학을 마치지 못했던 것은, 미국 사회에서 발언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좌절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저자도 개인으로서 현앨리스의 삶을 해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결혼이니, 저자는 현앨리스의 남편인 정준이 누구인지 찾아내기 위해 이 무렵 일본 대학의 동창회 명부까지 뒤져 3.1운동에 참가했던 정봉균이라는 사실을 찾았다. 그러나 결혼과 이혼, 모성의 포기가 그녀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앨리스의 삶 속에서 이 시기를 좀 더 상상해 보자.
1922년 현앨리스는 남편 정준과 함께 거창의 시가에 들어간 듯하다. 동생 피터는 정준이 봉건적 구식 생활에 만족하며 술과 여흥으로 소일하는 나태한 지주 생활을 계속했고 현앨리스의 설득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동생 데이비드는 남편에게 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현앨리스가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신문 자료 속에 나타나는 정준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1923년 8월 6일 자 <동아일보>는 민립대학설립추진위원회 거창 지방부에서 군내 14개 면을 순회하며 민립대학 설립의 취지를 알릴 강연대를 조직했는데, 그 명단의 첫 번째가 정준(鄭埈)이다. 또 1923년 10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거창군 위천면에서 금원청년회가 부흥을 위한 총회를 개최했다고 했는데, 이 총회의 사회자도 정준이었다. 1923년 무렵 정준은 놀고먹는 한량이 아니라 거창 지역 사회에서 신진으로 인정받는 청년 유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옳을까? 저자도 정준에게 향처(鄕妻)가 있었을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아마 현앨리스는 시댁에서 예상보다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많은 유학생들이 그랬듯, 정준에게는 고향에 부모들이 정해준 부인이 이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 지주 가문의 시골집에 유학생 아들이 임신한 '여학생 첩'을 데리고 오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시집 와 있던 본처도 본처려니와,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신부들이 받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임시정부 요인이라고 해도, 역관의 손녀라니 시가의 어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고, 임신 중이었던 현앨리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1926년 현앨리스는 다시 남편 정준에게로 돌아왔다. 아들 정웰링턴도 이때 임신했지만, 다음 해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하와이로 귀환하여 출산했다. 1926년 남편 정준은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현앨리스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한 것 아닐까? 거창 대지주 집안의 아들이며 일본 유학생 출신이 1927년 동래군의 촉탁으로 들어간 것도, 본가에서 벗어나 살아가기 위해서였던 것은 아닐까? 현앨리스가 웰링턴의 출생증명서에 남편의 거주지를 부산이라고 한 것은, 그가 동래군 촉탁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앨리스는 남편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으로 돌아갔고 혼인 신고도 했을 것이다. 현앨리스 부부가 다시 헤어지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저자가 추측하듯 현앨리스는 남편이 총독부의 하급 관료가 되어 그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아들이 태어나서 그마저도 뺏길 수는 없으니 그만큼 서둘러 하와이로 돌아가야 했을 테다. 그러나 이 쓰라린 결혼, 출산, 이혼의 경험은 그녀가 더욱 민족과 사회운동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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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자, 지워진 목소리 되살리기
한편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현앨리스의 최후다. 안타깝게도 저자 역시 그 마지막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앨리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박헌영과 남로당 관계자들의 재판 기록에 대해서는 꼼꼼히 따지고 분석했다. 저자는 현앨리스가 "'미군의 간첩'일 가능성은 물론이고 그런 발언이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현앨리스나 그녀와 함께 미군의 간첩으로 몰린 이경선의 행적을 다른 사료들을 통해 비교해 보면, 재판에서 제시된 간첩 행위들이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앨리스나 이경선을 매개로 한 박헌영의 스파이 혐의도 날조인 셈이다. 기실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이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에게 직접 지령을 내렸다는 식의 재판 기록은 저자의 표현대로 "믿기 힘들 정도로 유치한 설정"이기는 하다. 북한 당국이 미군의 편제와 첩보 기관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저자는 이 재판을 "전쟁 책임과 전후 권력 구도 재편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의 결과"이며 "평양식 마녀사냥"으로 "최소한의 정치적 합리성이나 포용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현앨리스를 단순히 희생양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현앨리스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자 했고, 자신의 이상과 의지에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려 했다. 비록 역사의 수레바퀴가 으깨고 지나가 버렸지만, 그 흔적을 찾아 복원하는 것은 역사가들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 시대 역사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현앨리스의 가족과 동지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그들 중 다수가 흔적조차 희미해진 사람들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들 정웰링턴의 이야기였다. 나는 책이 나오기 전인 2014년 Korea Journal 54에 실렸던 저자와 블라디미르 흘라스니 교수 공저의 논문을 읽었다. 정웰링턴을 주인공으로 서술한, 냉전의 시대가 짓밟아 놓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였다. 마침 어버이날이니, 아들의 고통이 새삼 간절하다. 그들을 다시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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