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애초에 하천이 흐르는 곳에 살 곳을 자리 잡았습니다. "새/내"는 그런 지역에 대한 이름이었습니다. 새로운 내 또는 강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고구려 때에 "소노부(消奴部)"라는 지역명도 '부'가 붙은 지방의 한 행정구역 명칭이긴 하지만 "소노부"의 "소노"가 바로 "새내"를 한자음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냇가 또는 강가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곳에 좀더 규모가 큰 새로운 고을이 생겨났습니다. "새/고을" 또는 "새/골"이라는 말이 이에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그 활동무대를 강 유역에서 벌판 쪽으로 펼쳐나가게 됩니다. 그곳에 터를 잡은 뒤 나온 말은 "새/벌"입니다. 새롭게 동트는 벌판으로 삶의 무대를 넓혀나간 것입니다.
하천 부근에서 살았던 작은 무리가 씨족 사회로 발전하고 이어 부족 사회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이 말들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새내", "새골", "새벌"은 후기에 이르면 "새/내/벌", "새/골/벌" 등으로 서로 합쳐져 혼재해서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신라의 원칭인 "새내벌", 즉 "서나벌", "서라벌", "서가벌", "스가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들이 점차 중간의 음이 떨어져나가고 "셔블"로 쓰이다가 음운변화에 의해 "서울"로 정착되어갑니다. "셔블" 내지는 "서울"이 차츰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말로 굳어지고 부족국가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새내"라든가 "새골" 등은 본래의 새로운 정착지라는 뜻을 잃어가고 중앙에 복속된 지방적 위치를 갖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새내"와 "새골"은 강과 대비되는 규모가 작은 하천을 뜻하는 "시내", 또는 중앙의 수도와 대조되는 촌(村)을 의미하는 "시골"로 그 음이 변해가면서 그 의미도 다르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내는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하천이고, 시골은 시시한 고을이 되어간 셈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한자문화권이 제도적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울이 한자로 경(京)이 되고 시골은 향(鄕)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古歌硏究)>, 즉 신라 시대 옛 노래 연구에 의하면 이 "향(鄕)의 중국 고대음은 "샹", 또는 "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향가(鄕歌)라는 말을 배격했습니다. 자칫 "쌍스러운 노래"라는 식으로 고대 노래를 하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놈", 또는 쌍 시옷을 쓰는 "썅놈"이라는 욕도 사실은 "시골 출신 녀석"이라는 비하어로 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골은 애초에 새로운 삶의 터로 시작된 곳이었지만 권력의 중심이 서울로 몰리면서 그 위치가 격하되어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과거의 시골은 행정구역상의 위치가 격하된 것이지, 땅을 갈고 곡물과 가축을 기르는 생명의 현장이라는 의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시골 농촌은 그마저도 상실하면서 절망의 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제 "시골"이 "새로운 고을"로 다시 살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중앙의 "서울"도 그 근원은 말에서나 역사의 현실로서나 이 시골, 즉 "새골"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서울도 그 뿌리와 바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서울이 시골을 새로운 고을로 대하지 아니하고 "샹스러운 촌 동네 부락"으로 인식하는 한, 그건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근원을 부정하는 존재의 미래는 부모를 모르쇠 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이런 문제는 아무래도 관심 밖인 모양입니다. 정치의 도시 ""서울"은 본래 "스가발"에서 나왔으니, 아, 정녕 계속 "스가발"인가?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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