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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대표 '반자본주의' 지식인 갈레아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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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대표 '반자본주의' 지식인 갈레아노 타계

저널리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저술 300여 권 남겨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반자본주의' 지식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74세를 일기로 고국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폐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갈레아노는 유럽 열강과 미국에 의한 착취의 역사를 신랄하게 비판한 대표작 <라틴아메리카의 잘린 혈맥: 수탈된 대지 500년>(1971) 등 3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1970년대 우파 군사독재가 지배한 라틴아메리카에서 금서로 묶였으며, 반식민·반자본주의 진영의 교본처럼 읽혔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당시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났을 때 선물하면서 다시 화제작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갈레아노는 생전에 이 책에 대해 "결함이 많으며, 인간의 조건에 대한 내 견해가 더욱 복잡해졌다"면서 스스로 평가절하해 좌파는 물론 그를 비판해온 우파 논객들도 놀라게 했다.

브라질에서 열린 당시 책 전시회에서 그는 "이 책을 다시 읽을 능력이 없을 것 같다. 전통적 좌파의 시각에서 쓰인 이 책은 너무 비관적이어서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갈레아노의 이 발언에 대해 "축구에서부터 남미대륙 발견 이전까지 방대한 주제를 다룬 다른 저술들이 이 책으로 인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그의 저술은 문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예술적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2010년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저널리스트로 훈련을 받았고, 나를 항상 현실에 안주하지 않게 해준 저널리즘에 감사한다"면서 자신의 저작의 뿌리가 저널리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12년 4월 신작 발표장에 모습을 보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AP=연합뉴스

1940년 9월 3일 몬테비데오에서 출생한 갈레아노는 1973년 정치문화잡지 <위기>를 창간했다가 쿠데타로 우루과이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이웃 강대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1976년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이 1983년 퇴진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한 1985년 우루과이로 되돌아온 갈레아노는 <브레차>라는 좌파 주간지 창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주제로 한 3부작 <불의 기억>을 제작했다.

그의 저술 중에는 축구의 역사를 통해 민중의 비극적인 삶도 조명한 <축구의 명암>(1995)도 있다. 이 책에서 그는 1970년 월드컵 출전권을 따기 위한 경쟁으로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경기에서 벌어진 폭동사건을 '축구전쟁'이라고 표현하면서 "땅과 전쟁의 주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민중은 절망에 빠져 똑같은 불행에 대한 복수를 서로 죽이는 것으로 했다"고 썼다.

그의 작품은 이 시대의 작가와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푸에르토리코의 힙팝 듀오 칼레 13은 갈레아노가 <여행>이라는 자신의 저서 한 대목을 읽어주는 녹음을 포함시킨 <멀티 바이어럴>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갈레아노의 유족으로는 아내와 3명의 자녀가 있다. 앞서 두 번의 결혼은 파경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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