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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나 같이 쓸까?", 슬픈 10대의 내면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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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나 같이 쓸까?", 슬픈 10대의 내면 풍경화

[프레시안 books] 김순정 <십삼인의 아해>

정형화된 소설은 어딘가 심심하고 따분하다.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잘 차려진 만찬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눈이 아프게 읽어 내려가야 하는 고통과 맞먹는다. 하지만 이상의 '오감도'를 청소년 소설로 풀어내다니! '오감도' 속 '십삼 인의 아해'를 각각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굉장히 신선한 시도로 느껴졌다. 때문에 더 예리하게 이야기를 훑어야 할 의무감이 생겼다.

작가는 훌륭한 독자이면서 가장 예리하고 날선 독자지만 그런 이유로 순순한 독자이면서 작가이면서 비판 아닌 제대로 된 비평가의 삼색을 두루 갖추기는 힘들다. 이 글 어디에도 분명 힘의 균형이 어긋난 곳이 있을 것이다. 비록 대립되는 힘과 방향일지라도 그 벡터의 값은 가고자 했던 그 방향의 어느 쪽으로든 나아갈 것을 믿기에 무작정 내디뎌본다.

<십삼인의 아해>(생각과느낌, 2015년 3월 펴냄)는 7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풀면서 3학년 1반의 좌석 배치도에서 첫 변곡점을 보여준다. 원의 중심부 1등의 자리에서 시계 방향으로 점점 풀어지는 주변 등수로의 전환으로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은 신선한 시도다.

이야기는 등수 권력의 말단에 속하는 28등 김혜수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우등생 범주에 속하는 김승기라는 아이와 같은 반이 된 것에 대한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가 가라앉자 겨울 방학에 자살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묻어 나온다.

유서를 써야 하냐의 문제를 두고 동급생 이한나가 괴롭힘을 당한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가해자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행간에 숨어 있는 작가의 말투에서 타자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입하는 목소리가 느껴진다.

혜수의 목소리는 유서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인간이라면 가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더불어 과제물 대신 유서나 같이 쓸까 하는 자조적인 말을 통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제일 말단 권력 집단의 고민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있다. 삭막하고 건조한 두 아이의 이야기는 '그냥 사는 게 재미없어서, 지루하고 따분해서'라는 말에서 마땅한 이유를 찾아냈다. 특별한 변주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아이들의 시선에 한 반이 된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가 관찰자의 시선으로 녹아 있는 것이 가장 흥미롭다. 이제 곧 그들의 목소리로 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목차는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상의 '오감도'를 바탕으로 풀어낸 청소년 소설 <십삼인의 아해>

ⓒ생각과느낌
여기서 그들에게 던져질 심연과도 같은 질문이 수행평가, 또는 뜻하지 못한 대답들의 기대로 이어진다. 인간의 생활과 경제 생산에 해당하는 모든 원료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각자 다른 개성 있는 자원에 대해 반드시 자신의 생각을 쓰는 수행평가는 이 아이들이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해 아이들 각자가 생각하는 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등생으로 통하는 김승기의 자원론을 들여다보자.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학교생활과 달리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승기의 이면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이는 없다. 가족들 몰래 술을 마시는 엄마와 승기 몰래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빠에 대한 반항심을 열여섯의 승기는 폭죽 소리로 대신한다. 귀에서 끝없이 터지는 폭죽 소리가 끝없이 분열되는 그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 인생의 첫 기억이 식탁 아래에 앉아 있다가 서로 미워하며 바라보는 부모의 낯선 눈빛이었고, 그 공포를 인지한 순간 꺽꺽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다가 기절했다는 대목에서 승기의 분노가 부모를 향해 터져 나올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승기는 스스로 불씨를 쥔 자를 찾아다닌 끝에 담임 세균에게 따귀를 맞음으로써 그 폭죽을 터뜨리고 만다. 엄마를 위해, 어찌됐든 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우등생의 가면을 쓰고 살아온 지난날을 화형시키는 순간 이후, 그는 막막한 우주 속 어느 행성에 홀로 떠 있는 순간을 만끽하며 스스로 괜찮지 않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한낮에 터진 폭죽으로 인해 그 밤까지 계속되는 승기의 폭죽은 이제 주변부로 밀려나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기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자아낸다.

꼴찌보다 더한 파급력을 가진 꼴찌 앞잡이 강지성의 자원론을 보자. 지성은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의 몸이 거꾸로 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체와 하체가 서로 위치를 바꾸어 물구나무서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처럼 육식을 거부한 채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공격당하지 않는 존재로서 나무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지성의 나무는 영혜의 나무와 닮아 있다. 생명이 있는 한 그것이 무엇이든 바라고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본성인 동물의 정체성을 떠난 지성에서 영혜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성은 지난밤 불꽃놀이 때문에 자신의 몸이 변한 게 아닌지 의아해한다. 그리고 그 불꽃이 너무나 아름답고도 짧아서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쏟아 부은 엄청난 돈, 혹은 그 돈의 본성을 사악하게 쓰는 거대한 배후에 분노한다.

아이답지 않은 발상이다. 하지만 곧 지성의 아빠가 더블에스 그룹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당한 뒤 이 사건을 언론에 알린 것을 두고 오히려 더블에스 측으로부터 손해배상금이 청구된 사건을 통해 지성이 분노하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한 달에 100만 원씩 942년 동안 113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성이 자식에게 빚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대목은 지금의 이십 대의 고민이 십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성은 과거 공벌레가 되었던 상담 선생님을 통해 존재론적 고민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정체성을 고민한다. 지성이 운동장 보호수에 기대어 지금 자신의 현실이 꿈이고 거울처럼 반사되어 비현실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 꿈의 거울이 너무 거대해서 자기가 압도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대목에서는 장자의 '나비의 꿈'이 장주의 입이 아닌 지성의 입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지성의 곁에서 세 번의 실패 후 네 번째 물구나무서기를 성공한 한나 역시 지성의 이 존재론적 고민에 동참한다. 한나의 고민은 늑대가 되어버린 아빠에게서 비롯되었다. 다만 한나의 존재론적 고민은 자신이 아닌 타인, 타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종이 다른 생명체 아빠의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하는 것이다. 한나는 바뀌어버린 아빠의 정체성을 거부하거나 혐오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나는 늑대 아빠를 사육하면서 집에 있던 벌레들이 다 사라진 것을 장점으로 생각할 만큼 사고가 열린 아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카프카의 <변신>이 쇳소리를 낸다. 변한 가족이 벌레가 아닌 늑대일 경우 이해와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가족과 사회, 이웃으로부터 모두 소외받고 단절되어 있는 한나의 아빠와 그레고르 모두 상실의 현대인을 표상하고 있지만 시점의 차이는 두 작품의 온도를 뒤바꿔놓았다. <변신>은 어느 날 문득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르의 일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늑대가 되어버린 아빠의 이야기는 딸 한나의 시선에서 전개된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결정적 차이는 <변신>의 그레고르가 가족에 의한 죽음을 당하지만 늑대 아빠는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탈출했다는 점이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깨어지고 깨진 유리창을 통해 파란 하늘을 본 것은 사뭇 의미심장한 결론으로 보이지만, 늑대가 되어버린 아빠가 이야기의 주축에 서면서 결과적으로 한나의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늑대가 되어버린 아빠와 무당이었던 할머니의 옛 이야기보다 한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등생에서 꼴찌까지, 아이들 가슴속 내밀한 상처

1반의 좌석 배치도에 없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의 입을 통해 존재를 알린 이수인의 자원론은 어떠한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독자는 수인이라는 아이가 작년에 있었던 열세 번째 자살 사건의 주인공임을 간파할 수 있다.

미국에서 전학 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눌한 한국말과 상황을 분간 못하고 튀어나오는 영어는 수인이 받는 '왕따'의 표면적 이유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것은 괴롭힘을 위한 작은 이유일 뿐, 그 직접적 원인은 아이들 각각의 부서진 내면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공작나비의 날개처럼 부서져버린 아이들의 내면이 다른 아이의 마음을 짓이기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내가 더 잘하자'라는 어느 반의 급훈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바싹 메말라버린 아이들의 마음에서 뽑아 올린 물기로 쓴 그 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수인은 의식의 불이 꺼지기 직전 본 자신의 미래를 얘기하며 폭풍우를 뚫듯 이 시간을 지나면 강철처럼 단단해진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수인을 옥상 난간으로 몰았던 달콤한 목소리, 삶은 고통일 뿐이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사실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죽음을 통해 친구들 곁에 더 가까이 머무르게 된 수인은 '오감도' 속 무서워하는 '아해'에서 그들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무서운 '아해'로 정체성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일 아침 자신의 영정 사진을 안고 있는 엄마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선생님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등교를 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내면의 변화를 이제와 반갑다고 해야 하는가, 안타깝다고 해야 하는가.

다른 아이를 차치하고라도 정상현에게만은 수인의 변화가 섬뜩한 공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무시로 보이는 수인의 환영이 상현이 가진 죄책감의 무게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래의 작가로 통하는 정상현은 자살한 수인의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라기보다 말을 나누던 대상이었다는 게 적절하겠지만.) 상현은 수인이 신던 실내화에 흙을 담고 씨앗을 심음으로써 수인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자 한다.

상현에게 죄책감은 여러 가지 모습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애써 담담해 하면서도 수인의 죽음 앞에서는 애도의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오히려 9년간 병원 신세를 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들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기뻐한다. 또한 진흙 옷처럼 무거운 '가장'이라는 단어를 짊어지게 됨을 소름 돋아 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3년 전 식물인간이 된 시점으로 돌릴 만큼 슬픔으로부터 초연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애써 차린 밥상을 엎는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유산처럼 되뇐다. 그는 아이들이 차린 식탁을, 이수인을 둘러싼 채 공을 던지며 공모자가 되어 있던 그 원탁을 엎어버려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은 수인을 탓하면서, 불처럼 달려가 수인을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흔들어 일깨워주고 싶은 진심과 달리 그는 수인을 향해 공을 던졌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총을 쏜 것처럼, 그는 태양 때문에 자신을 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태양 때문에 바싹 말라 사막처럼 된 그는 너무 외로워서 슬픔도 느끼지 못한 채 그 자신과 수인을 쏜 것이라고 항변한다. 수인의 실내화에 심은 씨앗은 죽고 나무가 태어날 것이라는 한나의 말을 통해 상현은 그 나무가 진정 평화롭기를 바란다.

반면에 이 아이들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문제적 총아로 보이는 신예인은 학교가 정한 궤도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아이다. 9시 33분에 등교해 닫힌 교문의 틈바구니로 들어가 삐딱한 시선으로 학교를 바라보는 그의 자원론은 무엇일까?

그의 눈에 비친 학교는 신성한 공간이라기보다 경멸과 멸시의 대상임을 첫 단락에서 짐작할 수 있다. 교문이 늙은 개의 주둥이로 묘사되고 수위 아저씨가 뿌린 물이 엎드려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늙은 개의 그것으로 이입되는 도입부는 예인이 학교에 얽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대상이 선생님이란 구체적 대상으로 화한 것은 정보 담당 선생의 손이 예인의 몸, 혹은 그의 일부인 이마에 닿았던 순간이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선생의 멱살을 잡은 것이 자신의 과거와 맞닿아 있음을 감지한 순간 예인은 고백한다. 죽는 게 아니라 기억만 사라지는 것을 원한다고.

그 기억이 1학년 때 담임에게 당한 성폭행임을 암시하며 거미에게 물린 자국으로 대비되는 순간 예인은 꿈 선생의 말을 통해 현실이 악몽임을 읊조린다. 그리고 그 말에 예인은 성모송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일말의 평화를 얻은 모양이다. 때때로 신의 선물은 나쁜 포장지에 싸인 채 올 수도 있음을, 그 말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찾는 예인의 모습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백인백색, 다른 모양으로 퍼뜨려놓은 자원론을 그러모으는 것은 혜수의 내레이션이다. 그녀는 각각의 '아해'들이 가졌던 존재론적 의문의 답과 그 결과를 조금은 예상된 범주의 좌석 배치도로 보여준다. 깨진 유리창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았던 한나가 2등의 자리로 가고, 제 안의 폭죽 놀이가 끝나지 않은 승기가 26등으로, 그리고 그 승기 앞에 예인, 예인 앞에 혜수의 모양새는 심심하고도 애석한 결과물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자원론이 각자가 가진 경험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없음으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로 일단락되며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신선하고 강렬한 새로운 시도, 그러나 주제의 일관성 측면은 아쉬워

<십삼인의 아해>는 청소년 소설이 탐색하지 않은 시의 소설화를 꾀한 것으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품이다. 이전에도 고전이나 기존 작품의 재해석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 여러 번 시도된 바가 있다. 고전소설의 주제와 주인공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주변 인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배유안 작가의 <뺑덕>이나 박상률 작가의 <방자 왈왈>도 전형을 파괴한 소설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십삼인의 아해>는 재해석과 주제 비틀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새로운 얼개를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옴니버스처럼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주변 인물들이 다음 장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받아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내며 하나의 커다란 결계를 만들었다. 결계 속에서 일곱 개의 이야기가 제각각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내며 잘 맞춘 퀼트 조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영역의 확장이 작품의 독이 되었음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산만하게 뻗어나간 개개의 주제가 각자의 내면과 문제점을 설파하느라 주제의 일관성을 방해했다. 옴니버스식 구성의 장점은 짧은 이야기 속의 강한 몰입도인데 그 호흡이 끊겨버려 애를 쓰며 읽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삼인의 아해>가 보여준 십 대의 내밀한 상처와 '오감도'를 통한 과정의 재해석은 신선하고 강렬하다.

소설은 힘의 균형과 방향성이 팔 할이다. 개요와 구성을 잘 짜지 않으면 얼개가 뒤틀어진 이상한 건축물이 되고 만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소설이 아닌 값을 구하는 벡터의 물리학이 되기 십상이다. <십삼인의 아해>의 복잡다단한 얼개는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공들여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지만 책을 덮고 난 다음에야 떠올랐다. 난해한 구조로 골머리를 앓게 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지은 이가. 이상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건축학자이지 않았던가. 결국 이 힘의 균형과 방향성은 원작자 이상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작가에게 그 질문을 던진들 대답이 돌아오겠는가. 우문의 우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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