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 그러니까 1800년대 초의 야구는 시간 남아도는 여피들끼리 즐기는 한없이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경기였습니다. 그때는 스트라이크도 볼도 없었습니다. 투수는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져주는 역할이었고, 아무리 가운데로 던져도 타자가 안 치면 칠 때까지 다시 던져야 했습니다. 경기는 9회가 아니라 한 팀이 먼저 21점을 내야 비로소 끝이 났습니다. 1845년 '세 번 헛스윙하면 아웃' 규정이 신설됐지만 경기는 여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당시 투수들은 지금처럼 150km/h 강속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가까이에서 치기 좋게 토스하는 수준이었거든요. 아무리 방망이에 선풍기를 단 타자라도 세 번 헛스윙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일대 변화가 일어난 건 1858년. 기록된 야구 경기로는 최초로 유료 관중을 받은 뉴욕-브루클린 경기에 무려 1만여 명의 관중이 몰려든 겁니다. 야구의 상업적 가능성이 주목받으면서, 세월아 네월아 하던 경기 시간을 줄일 필요가 생겼습니다. 야간 경기가 없던 시절이니 해가 지기 전에 게임을 끝내는 것도 중요했죠. 그래서 '스트라이크 선언'이 신설됐습니다. 심판은 칠 수 있는 공을 안 치고 시간을 끄는 타자에게 스트라이크를 선언했습니다. 나중에는 '볼'이 추가됐습니다. 타자가 칠 수 없는 공을 던져서 시간을 지연시키면 '볼'을 주게 됐습니다. 야구 경기 시간은 상업화와 함께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는 3시간 안팎까지 단축됐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지금의 야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 KBO리그가 왜 그렇게도 경기 시간을 줄이려고 애를 쓰는지 이해가 갑니다. 야구가 많은 관중을 유치하고 상업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적절한 수준의 시간 내에 경기가 끝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야구는 초창기 그랬던 것처럼 지루하고, 보는 사람의 시간을 뺏고, 시간과 돈을 들여 구경할 엄두가 나지 않는 '선수들만의' 종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올 시즌을 앞두고 메이저리그와 KBO는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여러 가지 규정을 신설했습니다. 경기장에 타이머를 설치하고 공수교대 시간을 제한한 건 두 리그 모두 동일합니다. 타자가 타석에서 두 발 모두 벗어나면 페널티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죠. KBO의 경우 타석 이탈 시 스트라이크를 주기로 하고 시범경기 때 실행했다가 한 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벌금과 경고로 해결한 MLB에 비해 좀 과격한 방식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경기 시간을 줄여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격려를 받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스피드업을 위한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나 효과를 발휘했을까요. 아직 시즌 초반이라 평가하기 이른 감이 있지만, 현재까지 결과만 놓고 보면 MLB와 KBO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7일 열린 개막 15경기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당 평균 시간은 2시간 49분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지난해 리그 평균인 3시간 2분은 물론, 2010년 이후 개막전 평균 경기 시간 중 최단시간(종전 2010년 2시간 55분)에 해당합니다. 물론 아직 팀당 1경기를 치렀을 뿐이라 앞으로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MLB 사무국의 시간 단축 조처는 성공적인 결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7일까지 팀당 7~8경기씩 치른 KBO리그는 어떨까요. 일단 수치만 놓고 보면 경기당 시간을 어느 정도 줄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지난해(3시간 27분)보다 2분여가 줄어든 평균 3시간 24분 48초를 기록했으니까요. 물론 어떤 분들은 그렇게 파격적인 조항을 여럿 신설했는데도 겨우 2분 12초밖에 줄어들지 않았다는 데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3시간 24분도 1998년 이후 역대 2위에 해당되는 꽤 긴 시간이니까요(역대 1위 2014년 3시간 27분, 3위 2009년 3시간 22분). 하지만 이번 시즌 각종 리그 기록들에 비춰 보면,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조항들이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충분합니다.
앞서 '베이스볼 Lab.'은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주된 이유는 박한이의 버퍼링과 윤길현의 견제구가 아니라 볼넷과 투구수, 높은 BABIP 비율이라는 점을 데이터를 통해 밝혀낸 바 있습니다.(☞ 참고 글: '소련야구'가 실패한 3가지 이유)
그런데 올 시즌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볼넷과 투구수 등의 지표가 2014년에 비해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다음 표를 보시죠.
타석당 볼넷 비율은 2014년보다 1.64%나 늘어난 10.9%를, 경기당 투구수도 3.6구가 늘어난 159.3구를 기록했습니다. 리그 BABIP는 2014년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역대 2위(3위 2013년 0.314)에 해당하며, 메이저리그에서는 100년 넘는 역사 동안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높은 수치를 기록 중입니다. 각종 지표만 보면 오히려 작년보다 경기 시간이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 이유가 없는 셈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2분여가 줄어들었으니 타이머 설치와 신속한 공수교대, 타석 이탈 시 벌금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또 10개 구단 중 대부분 팀이 작년도 리그 평균보다 경기 시간을 줄였다는 것도 눈길을 끕니다. 10개 팀의 현재까지 경기당 평균 시간을 정리한 아래 표를 살펴보겠습니다.
10개 구단 중 6개 구단의 평균 시간은 작년(3시간 27분)보다 줄었습니다. 특히 두산, KIA, 삼성, NC의 경우 평균 3시간 20분 이내에 경기를 끝내고 있으며, 삼성과 NC 같은 경우엔 거의 3시간 10분에 가까운 경기 시간을 기록 중입니다. 반면 매 경기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중인 한화는 3시간 54분에 가까운 혈전을 펼쳤고, 넥센 히어로즈도 3시간 35분대로 경기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 외에도 LG 트윈스와 신생팀 kt 위즈가 각각 3시간 28분과 3시간 27분대로 지난해와 큰 차이 없는 경기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장전과 9회 말 공격 생략이라는 변수를 제외한 결과는 어떨까요. 그래서 총 경기 시간을 이닝수로 나눠 1이닝 동안 공수를 하는데 걸린 시간만 구해 봤습니다. 여기서 최장 시간을 기록한 팀은 평균 25분이 소요된 한화 이글스였고, 그 뒤로는 신생팀인 kt 위즈(24.1분)와 롯데 자이언츠(23.5분)가 따랐습니다. 최단 시간 팀은 21.4분의 삼성이었고, KIA 타이거즈(21.9분)와 NC 다이노스(22.0분)가 뒤를 이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보려면, 구단별 볼넷과 투구수, BABIP 지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표를 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 시간 증가의 주된 원인은 볼넷, 투구수, BABIP 등입니다. 야구는 아웃을 잡아야 경기 종료가 가까워지는 법인데 타자 배트에 맞은 타구가 아웃이 아닌 안타가 되면 그만큼 시간이 늘어나고(BABIP), 투수가 공 하나 던지는데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볼넷, 투구수). 그런데 경기 시간이 가장 긴 팀들은 저마다 특징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일단 타석당 볼넷%. 이 부문에서 한화는 10구단 중 가장 높은 13.27%를 기록했고 kt도 13.11%로 뒤따랐습니다. 반면 경기 시간이 짧기로 소문난 NC와 삼성, KIA는 볼넷%가 가장 낮은 구단이었습니다.
다음은 이닝당 투구수와 경기당 투구수. 이 부문 최강자는 이닝당 20.1구를 던지고 한 경기당 173구를 던진 kt 위즈였습니다. 아무래도 신생팀 특성상 투수력이 약하고 투수들의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한 타자를 잡는데도 많은 공을 던지며 애를 먹을 수밖에 없겠죠. 그 외에도 경기당 평균 시간 2위 넥센이 경기당 171.7구를 던지며 투수들에게서 육수를 우려냈습니다. 또 인플레이 타구의 안타 비율을 나타내는 BABIP도 kt와 넥센은 0.360으로 두산(0.391)에 이어 높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가장 적은 투수를 투입한 팀은 삼성과 KIA, LG로 5명 이하의 투수만 경기에 투입했습니다. 경기당 시간, 이니당 시간이 적은 편에 속하는 구단들이죠. 반면 경기 시간 상위권인 한화, 넥센, kt는 이 부문에서도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벌떼 야구'에서 한 단계 진화한 '독수리떼 야구'를 선보이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한화가 5.86명을 투입한 점이 눈에 띕니다.
물론 이제 정규시즌 7~8경기 진행됐을 뿐입니다. 앞으로 시즌이 점차 진행되면서 팀당 경기 시간에는 얼마든지 변동이 생길 수 있고, 리그 경기 시간도 지난해와 비교해 좀 더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은 데이터를 갖고서도 몇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경기 시간 증가는 헬멧냄새를 맡거나 공 한 개당 견제구 10개 던지기 같은 다른 요인들보다 볼넷과 투구수, 안타 허용과 같은 팀의 경기력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타격 준비 시간 길기로 유명한 박한이의 소속팀 삼성이 리그에서 가장 경기 시간 짧은 팀이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죠(사실 박한이의 준비 시간은 전에 비해 많이 짧아졌습니다). 아무리 타석에 두 발을 딱 붙이고 공수교대시 재빠르게 뛰어나와도, 투수들이 볼을 남발하고 야수들이 타구를 아웃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타석 이탈하는 타자에 아무리 벌금을 물려도, 매 이닝 많은 투수를 쏟아 부으며 진땀을 빼야 한다면 경기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창기 야구가 시간 단축을 위해 '볼'을 도입한 이유는,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을 던지게 유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KBO리그의 많은 투수들은 타자가 칠 수 있는 공(스트라이크)을 던지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타자가 칠 수 없는 공만 던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이는 리그에 새로 가세한 신생팀과, 투수력이 취약한 팀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중입니다.
결국 '경기력'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입니다. 좋은 투수와 야수들이 나와서 좋은 경기력을 발휘한다면, 팬들에게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경기 시간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남은 시즌 KBO리그의 보다 많은 팀이 야구다운 야구, 좋은 야구를 보여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스피드업을 위한 리그 차원의 다양한 노력들이 보다 나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기록제공: www.baseball-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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