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좌파라는 단체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일이라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마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아주 잠깐 교수님과 한 가지 일을 함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2010년에 서강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던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였습니다. 그날 교수님은 종합토론의 사회를 맡으셨고, 국민모임의 상임대표이신 김세균 서울대 교수님이 개회사를 맡아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날 권문석이라는 동료와 함께 학술대회의 현장 진행을 맡았습니다. 권문석은 이후 알바연대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알바노동자들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2년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은 지난 3월 29일 국민모임의 창준위 발족식에 대한 기사에서, 교수님의 얼굴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국민모임의 창준위 발족을 축하드립니다. 손호철 교수님이 이 창준위의 운영위원장을 맡으신 것 역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 축하의 말에 "진심으로"라는 수식어는 차마 붙이지 못하는 저의 편협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은 마리오 아울렛이라는 이름을, 홍성열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홍성열 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마리오 아울렛은 살인적인 업무강도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위한 정리해고, 노조 탄압 등 부당노동행위로 잘 알려진 기업입니다. 거기에 수년간 야간 당직근무를 시켜온 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3억6000만 원의 임금을 체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체불임금에 대해서는 고용노동부가 이미 지급명령을 내렸음에도, 홍성열 회장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이 재직하고 계신 서강대학교는 지난 2월 4일 홍성열 회장에게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홍 회장의 경영철학과 기업가정신, 도전의지에 경의를 표한다"는 찬사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서강대학교는 이날 정리해고, 임금 체불과 노동 탄압에 상을 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날 학위 수여식이 열린 서강대 이냐시오관 소강당 밖에는, 이 학위 수여에 항의하던 마리오 아울렛 해고 노동자들과 서강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해고 노동자 한 명은 체포되기까지 했습니다. 공권력이 대학에 진입한 것은 16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굳이 상기시켜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만, 이날 교수님이 계셔야 할 곳은 바로 노동자들과 학생들 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교수님은 그날, 그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교수님은 홍성열 회장 명예박사 학위 수여에 대한 해명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16년 만에 학교 담장을 넘어들어온 공권력에 의해 끌려나간 문제에 대한 항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수님이 침묵하시는 사이 서강대학교에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서강대 정외과 학생인 이가현 씨가 전국의 대학생과 교수, 학교노동자들을 상대로 쓴 호소문도 수도권 각지의 대학교에 붙었습니다. 전국의 대학에서 이에 호응하는 대자보가 나붙었습니다. 전국 118개 대학의 학생과 학교노동자, 교수들이 경찰청장에게 서강대 사태에 대한 항의 편지를 썼습니다. 교수님은 다른 교수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대학원장 퇴임사에서 '축사는 대학원장으로서 한 것'이라는 해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그 편지를 노동자들과 학생들에게도 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수님이 만약 국민모임이라는 정당 창준위의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리에 서지 않으셨다면, 그 국민모임이 스스로 "장그래 정당"을 자칭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런 편지를 굳이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민모임의 김세균 교수님께서도 마침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그(문재인)는 참여정부 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한다. 만약 문 의원이 집권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며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하나의 정부가 한 행동과 하나의 개인이 한 행동은 동일한 무게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국민모임이 새정치민주연합과 다른, 진보정당임을 강변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고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서, 이 잣대는 국민모임에도 그리고 손호철 교수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모임이 "장그래"라는 말을 박근혜 정권이나 고용노동부와 같은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면, 그 장그래는 만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 눈앞의 노동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모임이 "진보"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번 사태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헨리 루이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을 아는 모든 사람은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했을 때가 킹이 가장 유명했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한 문장 이상을 말하지 못한다."
손호철 교수님, 그리고 국민모임에 계신 어르신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진보"라는 말은 마치 마틴 루터 킹의 꿈과 같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수만 가지 진보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게 있어서 진보란, 벼랑 끝의 사람들을 보여주며 "저들을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나를 지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진보는, 기꺼이 벼랑 끝으로 걸어가 그들의 옆에 서는 것입니다. 함께 행복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함께 떨어지기를 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벼랑에 떨어지는 자들을 두고 살아남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자들만이, 그 벼랑 밑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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