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 전문가)의 제52강은 4월 25일(토) <호남정맥 강천산 구간>입니다. 산행 주제는 <구름호수 담양호에 풍덩 빠지다>입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강천산과 섬진강 상류인 적성강의 맑은 물이 흘러 예로부터 산 좋고 물 맑은 산천으로 알려진 호남정맥의 강천산 구간을 걷습니다.
이번 산행도 누구나 부담 없이 광덕산과 산성산, 그리고 강천산과 강천사까지의 감동을 담을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가면
산딸나무 꽃도 있다네
아, 푸르른 잎사귀들이여
그 푸르른 잎사귀 위에
층층이 별처럼 얹혀
세상에 귀를 기울인 꽃잎들이여
강천산에 진달래꽃 때문에 봄이 옳더니
강천산에 산딸나무 산딸꽃 때문에
강천산 유월이 옳다네
바위 사이를 돌아
흰 자갈 위로 흐르는 물위에
하얀 꽃잎처럼 떠서
나도 이 세상에 귀를 열 수 있다면
눈을 뜰 수 있다면
이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나 혼자라도 나는 강천산에 들라네
이 세상이 다 그르더라도
이 세상이 다 옳은 강천산
때동나무 꽃 아래 가만가만 들어서서
도랑물 건너 산딸나무 꽃을 볼라네
꽃잎이 가만가만 물위에 떨어져서
세상으로 제 얼굴을 찾아가는 강천산에
나는 들라네
(김용택 시인의 <강천산에 갈라네>)
비록 6월의 때동나무 꽃은 볼 수 없지만 지천으로 피어있는 선홍빛 진달래가 반겨주는 4월 강천산으로 들어갑니다.
산행의 초입은 장안마을에서 시작됩니다. 평창길이라 이름붙인 농로를 따라 광덕산을 향하여 구불구불 구절양장의 흙길을 걷습니다. 보드라운 땅의 기운이 전해지는 흙길은 맨발로 땅을 디디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수한 땅내음을 맡으며 걷는 봄기운 완연한 미명의 산길은 머리와 마음을 개운하게 합니다.
엷게 깔린 새벽안개 속을 지나고 나면 광덕산입니다. 옛사람들은 강천산과 광덕산을 하나의 산으로 보았습니다. 청정하고 수려한 강천산의 맑은 계곡은 광덕산과 강천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니 하나의 산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광덕산에 올라서면 구름바다가 펼쳐집니다. 아니 구름호수가 펼쳐집니다. 봄가을 일교차가 만들어내는 담양호의 구름호수입니다. 구름호수 바로 앞에는 산성산과 연대봉이 삐죽하고 구름호수의 물결너머로는 추월산이 희미한 반달 아래 일렁이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잠시 구름호수에 빠져 허위적허위적 봄의 깊은 물결 속을 헤엄쳐 봅니다.
광덕산에서 산성산으로 이어지는 정맥마루금은 호수 가를 걷는 듯합니다. 부드럽게 이어진 산길은 평온하기 그지없습니다. 안온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암릉이 나타나고, 조심스레 암릉을 지나면 얼마 안가 산성산입니다.
산성산은 금성산성이 이곳에 위치해 산성산이라 불립니다. 길은 산성의 성벽을 따라 연대봉으로 이어집니다. 연대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장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추월산 너머 백암산과 내장산 장군봉이 삐죽 얼룩을 내밀고 강천산 뒤로 회문산도 얼굴을 내밉니다. 우측 사면에는 분통골, 적우제골, 지적골, 하누제골, 물통골, 큰우작골, 작은우작골, 탑상골, 승방골 등의 강천산 계곡이 굽이굽이 보이고 날이 좋으면 뒤쪽으로 지리산 노고단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금성산성 안쪽 누각 근처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합니다. 봄볕 좋은 아침 함께 산길 걷는 도반들과 반찬 나누고 정 나누며 봄을 먹습니다. 웃음 나누며 함께 마시는 진한 커피 한 잔도 산길에는 더 특별한 향으로 다가옵니다.
산성을 벗어나 북문터를 지나며 다시 산길이 이어집니다. 아직 잎을 피지 않은 활엽수 아래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진분홍, 연분홍 선홍빛 진달래터널의 산길이 계속됩니다. 잠시 발길 멈추고 진달래 꽃잎 하나 입에 따 넣습니다. 향긋한 봄의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듭니다. 봄을 몸에 담으며 산길을 걷습니다. 화전 같이 아름다운 꽃길 속을 걷습니다. <호남정맥 강천산 구간>은 진달래 꽃길을 따라 걷는 꿈같은 산길이 계속됩니다.
강천산을 내려서면 붉은 기둥 현수교가 눈에 들어옵니다.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입니다. 흔들거리는 구름다리 위를 조심스레 건넙니다. 아무리 강삼장이어도 손으로 쇠줄을 붙잡지 않고는 건널 수 없습니다. 아찔한 구름다리 위에서 맞는 봄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습니다. 시원한 봄바람과 함께 구름다리를 건너 내려서면 강천산 계곡입니다.
8km에 이르는 강천산 계곡은 도선교, 금강교, 병풍바위, 선관(仙冠), 광덕정, 투구봉, 금강문, 범바위, 유상대, 용소, 부처바위, 구룡폭포, 송음교, 수좌굴, 형제굴, 비룡폭포, 삼인대 등 수많은 경승지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강천사를 지나 강천산 계곡의 수려한 비경을 감상하며 산행을 마감합니다.
강천산 입구 강천호반 옆에서 징게미매운탕과 순창막걸리로 남도의 봄길 함께한 도반들과 산행의 여운을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막걸리잔 기울이며 강천산의 봄을 나눕니다.
4월 호남정맥 강천산 구름호수와 진달래터널의 꽃길, 백두대간학교와 함께 하셔서 향긋한 봄 속으로 자유롭게 유영하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5년 4월 25일(토)
-산행출발 : 2015년 4월 24일(금) 24:00(자정)
-산행코스 : 장안리 평창마을-광덕산-산성산-연대봉-강천산-강천사-삼인대-강천산주차장
-산행거리 : 약 14km
-소요시간 : 약 8시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중하(★☆)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4월 24일(금)
24:00(자정)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4월 25일(토)
00: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0: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0: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4:30 장안리 평창마을 도착 - 산행준비/스트레칭
05:00 평창마을 주차장 출발 - 산행 시작
05:40 광덕산
07:00 산성산
07:30 연대봉
08:00 북문 - 산성 내 누각에서 아침식사(각자 도시락 지참)
10:30 강천산
11:30 구름다리
12:00 강천사
13:00 강천사주차장 - 산행 마감/스트레칭
13:10 점심식사 겸 뒤풀이 - 산호가든농원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징게미매운탕(민물새우매운탕)
14:30 강천산주차장 출발
17: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등. 그리고 반드시 도시락 가져오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52강 <강천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회 식사 겸 뒤풀이, 가이드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교장선생님에게 해주세요(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참가신청 바로가기
[5월 산행안내]
-산행일 : 2015년 5월 23(토)~24일(일)/1박2일
-산행지 : 영산기맥 변산지맥 내변산 구간
-산행코스 : 1일차 남녀치-월명암-직소폭포-재백이재-관음봉-내소사-내소사입구/2일차 변산마실길(채석강-격포-궁항-솔섬-상록해변-모항)과 곰소항
-출발시각 : 5월 23일(토) 06시 덕수궁 앞 출발
-참가비 : 22만원
-거리 : 1일차 약 13km/2일차 약 14km
-예상시간 : 1일차 약 7시간/2일차 약 5시간
-난이도 : 1일차 중하(★☆)/2일차 하하(☆)
[산행자료]
[호남정맥(湖南正脈)]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갈라져 주화산(珠華山, 600m)에서 시작하여 내장산을 지나 전라남도 장흥을 흘러 영산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을 갈라 광양 백운산(白雲山)을 지나 광양만 외망포구에서 끝나는 산줄기 이름이다. 주로 호남 지역을 지나므로 호남정맥이라 하였다.
조상들이 인식하던 한반도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정맥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이들 맥은 10대강의 유역을 가름하는 분수산맥을 기본으로 삼고 있어 대부분의 산맥 이름이 강 이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호남정맥은 남부의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로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농경과 산업, 그리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장흥의 용두산(龍頭山)에서 하동의 섬진강 하구까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는 지리산에서 김해의 낙동강 하구까지 이어진 낙남정맥(洛南正脈)과 함께 한반도 남부 해안 지방의 동일한 생활문화권역을 형성하게 하였다.
호남정맥에 속하는 산으로는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五峰山)·내장산·백암산·추월산·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국수봉(國守峰)·무등산·천운산·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帝巖山)·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순창군] 전라북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순창군은 동쪽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시, 서북쪽은 호남정맥의 마루금을 경계로 정읍시, 남쪽은 전남 장성군·담양군·곡성군, 북쪽은 임실군과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0개 면, 304개 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 있다.
순창군의 북서부는 호남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하여 험한 산지를 이루고, 동남부는 섬진강의 지류 주변에 분지가 발달하여 서로 대조되는 지형을 이룬다.
북부와 북서부의 정읍시·임실군과 인접한 지역은 회문산(回文山)·장군봉(將軍峰, 780m)·여분산(如紛山, 774m)·깃대봉(644m)·국사봉(國師峰, 655m)·내장산(內藏山, 763m)·백방산(栢芳山, 660m) 등의 비교적 높은 산들이 있다.
서부의 전라남도 장성군·담양군과의 인접지역에도 추월산(731m) 등의 산들이 솟아 있으며, 북서부의 쌍치면·복흥면에는 200∼350m의 고원이 발달해 있다. 진안고원과 연속되는 이 두 고원은 백악기의 능주층군이 백악기 말의 화산암류의 분출로 경화(硬化)되고 주변의 화강암류가 분해침식되어 이뤄진 것이다.
북서부에서부터 광덕산(廣德山, 584m)·무이산(武夷山, 558m) 등 500∼600m의 산지가 연속되다가 남원시와 인접한 동남부에서 섬진강의 지류 주변에 100∼200m의 분지가 발달해 있다. 순창분지는 지질 구조의 차이로 인해 발달한 침식분지로 이뤄져 있다.
섬진강은 군 동부에서 흐르며 주변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를 이룬다. 임실군 오수면 일대에서 흘러온 오수천은 적성면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면서 강폭이 크게 넓어지는데, 이곳에서는 적성강(赤城江)으로도 불린다.
팔덕면 서쪽에 있는 광덕산과 산성산(山城山, 573m)에서 발원한 경천(鏡川)에는 인계면 북쪽에 있는 갈재[盧嶺]에서 발원한 양지천(陽芝川)과 금과면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순창읍에서 합류하여 비교적 넓은 충적지를 이루며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그밖에 서부에서 추령천(秋嶺川)이 복흥면·쌍치면을 지나 정읍시 산내면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북부에서는 구림천이 구림면 일대를 지나 임실군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순창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 오산(烏山) 또는 옥천(玉川)이라 불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 도실군(道實郡)이 되었다.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되어 적성현(赤城縣)과 구고군(九皐郡)을 관할하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그 중 백제 때인 634년(무왕 35)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한 구암사(龜巖寺)와 통일신라시대인 887년(진성여왕 1)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강천사(剛泉寺) 등이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가 건국된 뒤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순창(淳昌, 일명 淳州)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현으로 강등되어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14년(충숙왕 1) 당시 국통(國統)인 정오선사(丁午禪師)의 고향이라 하여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이 시대의 인물로는 1271년(원종 12) 세자 심(諶. 뒤의 충렬왕)이 몽고에 인질로 갔을 때 그를 배종하여 공신이 된 설공검(薛公儉)이 있다.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금굴리(金掘里)에서 은거한 조원길(趙元吉) 등이 있다.
1409년(태종 9) 순창군은 18방(坊)을 관할했으며, 이 때부터 대체로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을 유지해 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순창군의 호수는 317호, 인구는 1,092명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치세(金致世)가 이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무찌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조유(趙瑜)는 정읍에서 갈재로 넘어가는 왜병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이 고장 출신인 선무랑(宣武郎) 양여용(楊汝槦)이 정시직(鄭時稷)과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의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부득이 해산하였다.
조선시대의 학자로는 실학자로서 <강계지>를 저술한 신경준(申景濬)과 성리학자로서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한 기정진(奇正鎭) 등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곳에서도 순창접주 우동원(禹棟源)이 동학군을 인솔하여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에서 관군을 격파하였다. 1897년 방을 면으로 개편하여 집강(執綱)을 두고 18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4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에서도 4월 11일을 기하여 많은 사람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근대의 인물로는 한말 대유학자로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瓚)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객사에 총본부를 두고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한 최익현(崔益鉉)이 있다.
그 밖에도 의병장 양춘영(楊春泳)·국동완(鞠東完)과,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투신자살한 설진영(薛鎭永)이 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의 통신책임자로 활약하다가 서울에 잠입하여 독립군자금 조달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김일두(金一斗) 등이 있다.
순창읍 신남리의 고인돌군을 비롯하여 인계면 중산리·도룡리, 동계면 구미리·주월리, 적성면 내월리·고원리, 금과면 수양리, 팔덕면 구룡리, 쌍치면 둔전리, 구림면 운남리·금천리 등 군 내 20여 곳에 고인돌군이 있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도굴했다는 순창읍 신남리고분을 비롯하여 백산리고분, 인계면 중산리·갑동리고분, 적성면 운림리고분 등이 있으나 대부분 도굴된 상태이다.
성지로는 <동국여지승람>에 군창(軍倉)이 성 내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순창읍 백산리의 홀어머니산성(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70호), 동계면 신흥리의 합미성(合米城,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71호), 유등면의 오교리성지, 풍산면 대가리의 옥출산성지(玉出山城址), 구림면 율북리의 여현성지(廬峴城址) 등이 있다.
가마터로는 옛날 기와를 굽던 구림면 안정리의 와요(瓦窯)와 쌍치면 둔전리 장군봉 아래의 분청사기요지, 백방산 아래의 분청사기요지, 구림면 금창리의 가마터 등이 있다.
정월 명절에 풍물놀이·윷놀이·공치기·제기차기·돈치기·장치기·연날리기·쥐불놀이·홰싸움·석전·승경도놀이·줄다리기·목마놀이·기세배·강강술래·닭잡이놀이·둥당기놀이·널뛰기·달맞이놀이를 한다. 3월에는 화전놀이·천렵놀이 등을 하며, 5월 단오에 그네뛰기, 7월에 호미씻기(술멕이), 8월 추석에 씨름·농악놀이·궁술대회·널뛰기·강강술래·물맞이, 9월에는 단풍놀이 등을 한다.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선돌·당산나무(할아버지당산·할머니당산·천령 등을 대상으로 삼음)·누석단(纍石壇. 돌단)·조탑(造塔)·지음대(낟가릿대·솟대)·장승·당집·산신당·서낭당·석불·수신당·샘·기암괴석·남근석(男根石) 등을 섬긴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수호신을 정해 제를 올렸으나 현재는 숭배의 대상이 줄었고, 심지어는 동제를 지내지 않는 마을도 있다.
인계면 쌍암리에서는 음력 정월 13일 밤에 마을 뒤의 할아버지당산나무와 마을 서쪽 할머니당산나무에 온 마을사람들이 제를 지낸다. 탑리에서는 매년 정월에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와 남쪽의 누석단에서 도깨비제를 지냈다. 이곳은 마을 부녀자들만이 제를 지내는 것이 특색이며, 제수 또한 흰 쌀밥과 메밀묵뿐이다.
풍산면 삼촌리에는 450년 전 전주이씨들이 심은 당산수가 있는데 여기에 매년 정월 보름날 밤에 동제를 지낸다. 팔덕면 청계리에는 4그루의 당산수가 있는데, 정월 14일 밤 자정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농악을 울리면서 제를 지낸다.
월곡리에는 당산나무 두 그루와 당집이 있어 매년 정월 14일 밤에 온 마을 남자들이 제를 지낸다. 구룡리의 입석마을에는 5개의 선돌, 2그루의 당산나무, 2개의 누석단에서 입석당산제와 천룡제를 지낸다.
이밖에 인계면 도룡리 용바위의 기우제, 순창읍 남계리 동은마을의 각시탑축제, 팔덕면 산동리와 창덕리의 남성 성기 모양의 석조각을 섬기는 남근제가 있다. 구림면 금창리 금상골 누석단 주위의 지음대에 옛날에는 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는다.
이들 동제의 공통점으로는, 제주는 마을 수호신을 믿는 사람 중에서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을 선발하고 선정된 뒤에는 목욕재계하면서 근신하며, 제를 지낸 뒤에도 일정 기간 상가나 부정 탄 집에 가지 않고 제물은 간략하고 검소하게 차리는데 온 마을에서 추렴한다는 점이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전설로는 ‘홀어머니산성전설’이 있다.
옛날 순창읍에 지체 높고 얌전하며 얼굴이 빼어나게 예쁜 과부가 있었다. 시집 간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잃고 수절하였다. 이 과부는 성이 양씨였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양과부라 불렀다. 같은 마을에 설씨라는 권세 있고 지체 높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양과부에게 청혼하였다. 양과부가 청혼을 거절하자 그는 다른 여자를 구해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으므로 양과부에 대한 짝사랑이 가슴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양과부에게 애원도 해보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끝내 말을 들어주지 않자 마지막으로 내기를 청하였다.
설씨는 높이가 3자나 되는 나막신을 신고 서울까지 갔다 오고, 양과부는 작은 산에 성을 쌓는 일이었는데, 빨리 끝내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양과부는 십중팔구 자기가 이길 수 있었으므로 마지막 청을 들어주고 설씨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약속한 날 양과부는 열심히 성을 쌓아 놓고 안도의 숨을 쉴 때 마침 설씨가 돌아왔다. 양과부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으나 설씨가 양과부 치마에 아직 남아 있는 돌을 발견하고는 이겼다고 좋아하였다. 양과부가 너무 안심한 나머지 치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돌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기에 진 것을 깨달은 양과부는 수절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수백 자 깊이의 물 속으로 몸을 던져 깨끗한 몸으로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양과부가 쌓은 성을 ‘홀어머니성’이라 불러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이 고장에는 <사리랑타령> <청상요> <엿타령> 등의 민요가 전한다.
<사리랑타령>은 “인자나 가면 언제나 올까/언제 올 줄을 아이구 내가도 몰랐네/사리랑 둥게당실이 노든 사리랑//오라는 디는 밤에나 가아고·동네 술집이 아이구 대낮에 간다네/사리랑 둥게당실이 노든 사리랑//오동에 목판 거문고는/줄만 골라도 아이고 소리가 난다네/사리랑 둥게당실이 노든 사리랑”하는 은근한 사랑노래이다.
줄만 골라도 소리가 먼저 울리는 거문고를 끌어안고, 애정을 담아 뽑아내는 가련한 여인의 노래처럼 그 곡조가 매우 부드럽다.
또한 <청상요>는 일반적인 과부 노래와 내용이 비슷하고 한을 바탕에 깔고 있으나 반복되는 여음이 불교의 염불과 유사하여 주목을 끈다. 제1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하 모오보살/관하 모오보살/어어어어이/오늘저녁에는 여기서 놀건만/내일날은 황천고혼이 되겠네……”
<엿타령>은 “자아 엿이야 엿/맛좋고 빛좋은/전라도 담양의 찹쌀엿/처녀가 먹으면/시집을 가고/총각이 먹으면/장게가는 엿/자아 떨어진 고무신이나/백철 부서진거나/삼베속옷 떨어진거나/있는대로 가지고와요/섣달 큰애기 개밥주듯 팔고가네/자아 싸구려/엿덜사요 엿덜사”하는 일종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락과 내용이 매우 재미있다.
예나 지금이나 엿은 좋은 역할을 하는 것인 듯, 시험 때마다 엿장수가 늘어나는 것이 지금의 풍습이라면 옛날에는 시집 못 간 노처녀와 때를 놓친 노총각을 이어 주는 엿장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단란한 가정을 바라면서 그 소망을 노래한 <가족요>가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부모님 서신자리/노랑꽃이 피었네/낭군님이 서신자리/급제꽃이 피었네/이내몸 선자리에/효성꽃이 피었네/그 나무에 열매열어/각각수령으로 보내리라.”이밖에도 <사슴노래> <딸요> <들노래> <시집살이노래> 등이 구전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의 식량작물과 고추·무·배추·감 등이며, 양잠도 한다. 특히 이 곳에서 생산되는 고추는 껍질이 두껍고 맛이 좋으며, 메주콩도 당분이 많아 이들을 원료로 한 고추장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북서부의 산지에서는 고랭지채소·약초·잎담배 등이 많이 재배된다. 복흥면에서는 인삼도 재배되고 있다.
양잠농가는 많이 감소했으나 동계면과 구림면을 중심으로 아직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감·배 등의 과수 재배면적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적성면과 팔덕면에서는 감, 금과면에서는 배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
산지가 많아 밤·죽순·산나물 등 임산물의 생산이 활발하다. 도내에서도 대표적인 밤의 주산지로 구림면이 유명하다.
군내에는 4∼5개의 정기시장이 열린다. 순창읍 남계리의 순창장이 1·6일, 동계면 현포리의 동계장이 2·7일, 복흥면 정산리의 복흥장과 구림면 운남리의 구림장이 3·8일에 개설된다. 이들 장에서는 배추·무와 밤·고추 등이 거래된다.
특산물로는 고추장·토종꿀·밤·은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고장의 기후와 물맛, 품질 좋은 고추와 콩, 그리고 독특한 제조기술로 만들어지는 고추장은 조선시대 이래 진상품으로 유명하다. 강천산에서 생산되는 토종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적성강의 은어 또한 이 고장의 명물로 알려져 있다.
[담양군] 전라남도 북단에 위치한 담양군은 동쪽은 곡성군, 서쪽은 장성군, 남쪽은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북쪽은 전라북도 순창군에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호남정맥 추월산(秋月山, 731m)·금성산(金城山, 573m)·광덕산(廣德山, 584m) 등 일련의 높은 산들이 산악을 형성, 전라북도와 도계를 이룬다. 서쪽에는 병풍산(屛風山, 822m)·불대산(佛臺山, 602m) 등이 장성군과 군계를 이룬다. 남동쪽에는 국수봉(國守峯, 558m)·무등산 등이 솟아 있다. 남서쪽만 전라남도의 여러 평야와 연접해 중앙부를 분지로 만든다.
영산강의 최상류인 담양천(潭陽川)이 추월산의 용추봉(龍湫峯)에서 발원하여 군의 중앙을 통과한다. 이 하천은 무등산에서 발원한 증암강(甑巖江)·오례강(五禮江)과 합류하면서 중앙에서 서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비옥한 평야로 형성한다. 호수로는 영산강 유역의 농업개발사업을 위해 1976년에 완공된 용면의 담양호와 남면의 광주호가 있다.
백제시대에는 추자혜군(秋子兮郡)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쳐 불렀다. 이때의 치소는 무정면 봉안리로 보인다. 백제 때 굴지현(屈支縣)이 있었던 창평면(昌平面) 지역은 신라에 편입되어 기양현(祈陽縣)으로 개칭되었다. 868년(경문왕 8) 왕의 발원에 의해 개선사(開仙寺)가 창건되었다.
995년(성종 14)담주(潭州)로 고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담양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의 속현이 되었다. 이 때 현의 치소는 금성면 석현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주현으로 독립하였다.
1395년(태조 4) 국사 조구(祖丘)의 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1399년(정종 1) 정종비 김씨(金氏)의 외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한 뒤 1413년(태종 13) 담양도호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인후(因厚)가 창의하여 금산싸움에서 전사했으며, 정유재란 때는 관아와 축요루(祝堯樓) 등의 건물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1648년(인조 26) 부사 성이성(成以性)이 해마다 둑을 쌓아 수해를 막아오던 것을 1717년(숙종 43)의 대홍수 이후 관방제(官防堤) 축조에 착수, 1854년(철종 5)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관비를 투입해 완성하였다. 한편, 창평현은 1479년(성종 5) 강상죄(綱常罪)에 연관되어 일시 폐현, 광주에 병합되었다가 5년 뒤 복구되었다.
1728년(영조 4) 역적 박미귀(朴美貴)의 출생지라 하여 담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8년 다시 승격하였다. 1762년 역적 이홍범(李弘範)의 태생지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72년 담양도호부로 승격되는 곡절을 겪었다. 남면의 성산 일대에는 일찍부터 많은 문인이 거주해 문단활동을 하였다. 특히, 송순(宋純)의 면앙정(俛仰亭), 정철(鄭澈)의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 등을 중심으로 시가와 별곡이 제작되는 산실이 되었다.
1895년의 관제개혁으로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 창평현은 창평군으로 바뀌었다. 1908년옥과군이 폐지되면서 일부가 담양에 이속되었다. 1914년창평군이 폐지되어 그 예하의 면들과 광주군의 갈전면·대치면, 장성군의 갑향면·북하면 일부, 동복군 일부가 편입되었다.
1895년부터 일어난 의병투쟁에는 고광순(高光洵)·고제량(高濟亮) 등이 창평에서 일어나 남원·동복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연곡사에서 순절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송진우(宋鎭禹)가 활약한 것이 두드러진다.
담양읍 가산리, 무정면 오봉리 등 곳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봉산면 제월리에서는 석촉·환석·석검·지석·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철제대도·동경·마구류·옥류·토기호·개배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전면 행성리 등에는 고분이 있다.
산성으로는 용면 도림리에 금성산성(사적 제353호)과 무정면 오봉리에 담주산성(潭州山城)이 있다.
중요한 사료로는 조선 중기를 연구하는데 기초자료가 되고 있는 <미암일기(眉巖日記)>(보물 제260호)가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慕賢館)에 소장되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는 담양읍 향교리에 낙죽장(烙竹匠,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참빗장(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5호)과 양각리에 채상장(彩箱匠,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이 있다.
용면 월계리에 담양추월산(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 담양읍 객사리에 담양의 관방제림(官方堤林, 천연기념물 제45호) 등의 명승지와 고서면 산덕리에 담양후산리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366호), 담양 대전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4호) 등이 있다. 등록문화재로는 창평면 삼천리 삼치천마을옛담장(등록문화재 제265호)이 있다.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들독놀이·풍작놀이·초군놀이·줄다리기 등을 들 수 있다. 들독놀이는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놀이로 단오·백중·추석·중양 때 많이 행해졌다. 들독은 무게가 60∼90㎏인 작은 들독과 100∼120㎏인 큰 들독이 있는데 역량에 따라 선택하였다.
들기의 종류로는 뿌리띠기·무릎들기·허리펴기·어깨올리기·고개치기·열발떼기 등이 있으며, 돌을 잡는 방법에 따라 맨손들기와 또가리들기로 나누어진다. 30대에 이르는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개인별 힘겨루기, 장사뽑기, 머슴자랑과 마을 고샅(골목)별 단체놀이가 있었으며, 승전품은 대개 술과 닭이었다. 들독놀이가 시작되면 전주민이 관전하였으며, 놀이에 지게 되면 체력단련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풍작놀이는 백중에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을 뽑아 즐기는 놀이였다. 장원농가로 뽑힌 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베푼다. 마을의 모든 농군들과 머슴들은 장원집 황소를 장식하고, 소의 등에 안장을 얹어 장원집 머슴을 태워서 장원답을 돌아 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장원집 머슴은 볏짚이나 대풀로 모자를 만들어 쓰며 얼굴에는 수수깡안경과 솔잎수염을 달고 숯검정을 칠하였다. 특히, 장원답으로 갈 때는 농악을 울리고 위세를 부린다. 장원집으로 돌아오면 거지들까지 참여한 잔치에 합류해 하루를 즐겁게 지낸다.
초군놀이는 풀을 베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초군들이 풀터를 찾아 풀을 베고 돌아올 때까지 집단으로 즐기는 놀이이다. 풀을 베는 날 수머슴이 또쟁이(애기머슴)를 데리고 동구 밖에 나가 소굿을 치면, 초군들이 ‘대동(大東)’이라는 덕석기를 들고 모여 풀타령과 함께 지게목발에 장단을 치며 산의 풀터로 올라간다. 덕석기를 풀터 중앙에 꽂고 풀을 베기 전에 지게를 바르게 들어올리는 지게꼬누기·들독놀이·씨름 등의 놀이를 한다. 풀을 베고 나면 낫던져꽂기·풀뭉치차기·장사내기 등의 풀따먹기를 하고 나서 다시 <풀타령>을 부르며 내려오는 것이다. 줄다리기는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던 놀이였으며, 씨름 또한 인기 있는 민속놀이로 널리 행해졌다.
통상 거목을 당산나무로 한 당산제를 정월대보름 전후나 2월에 유교식 가제(家祭)와 비슷하게 지낸다. 제관과 동민이 모두 목욕재계하고 제단 주위를 깨끗이 하여 황토를 뿌린 뒤 금줄을 치며 제사 당일은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은 숙종 때 남씨부인의 꿈에 마을 수호신령이 나타나 정월대보름에 제를 지내면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고 이른 뒤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정월 초이렛날 그 해 복을 받고자 하는 사람 중에서 제를 주관할 화주(化主) 3명을 결정한다. 선정된 사람은 제일까지 부인과 동침하지 않으며, 비늘달린 고기나 조개류는 먹지 않고 질그릇으로만 음식을 먹는다. 초아흐렛날 당산할머니나무 아래 마포차일을 치고 당산할아버지나무 아래 초롱을 달며, 두 나무에 금줄을 치고 제단 주위에 황토를 깐다. 초열흘에는 인구전(人口錢)을 걷는다. 열나흗날 밤 제상을 차리면 마을사람들은 걸궁으로 당산신을 모신다. 새벽 두 시에 화주가 “강신이요” 하고 알리면 각 가정에서도 방에 제상을 차려놓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빌게 된다. 제 뒤에는 떡을 흰 종이에 싸서 각 가정에 돌린다. 이 떡을 먹으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당산신은 3일 동안 머무른다 하여 초롱불은 계속 켜두고 삼실과와 술은 그대로 놓아두며, 열여드렛날에야 제가 끝나게 된다.
담양에는 지명 유래담, 자연물 관련 설화, 사찰연기설화와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소설 <전우치전(田愚治傳)>으로 유명한 전우치는 담양전씨(潭陽全氏)로, 수북면 황금리에 그에 관한 설화가 남아 있다. 해적이 들끓고 관리의 탐학이 심하여 당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에 도술을 부리는 전우치는 동자 한 쌍과 함께 구름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구름 위에서 궁중을 내려다보며 “나는 선관으로서 옥황상제가 지상의 임금들에게 황금들보를 하나씩 거두어오라 하여 왔다”고 하면서 황금들보를 거두었다. 들보의 일부는 팔아 쌀을 사서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때를 만나면 쓰기 위해 지금의 황금리에 묻어 두었다. 불행하게도 전우치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고, 사람들이 금괴를 찾기 위해 이 일대를 파헤쳤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담양댐 근처에는 고구마 같이 생긴 ‘애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온다. 옛날 금성면에 6대독자를 둔 금부자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좋은 며느리를 얻어 후손을 많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들이 혼기에 차 혼인을 시켜 놓고 조바심이 난 금노인은 1년 사이에 며느리를 여섯씩이나 갈아들였다. 이상한 일은 여섯 며느리가 모두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때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여자들이 너무 말이 많아 삼신을 쫓았으니 새 며느리가 말이 많지 않으면 자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금노인은 그날부터 일곱 번째 새 며느리에게 말조심을 시켰는데 과연 1년 안에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즈음 며느리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날이 밝거든 나를 찾아오되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입을 열지 말라”고 하였다. 다음날 며느리는 산신제단이 있는 철마단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집채만 한 바위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어메, 먼 바우가 걸어온다냐?”고 말하는 순간 바위가 걸음을 멈추며 며느리를 깔고 앉아버렸다. 후손을 보려는 금노인의 꿈은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이 바위를 ‘애기바위’라 불렀고, 이 지역 여자들은 말이 없이 살아가게 되었다.
담양읍 지침리의 옛 지명은 효자리였다. 이 지명에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자이야기가 얽혀 있다. 옛날 한씨 부인은 전씨 집안에 시집와서 아이를 낳기도 전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부인은 유복자를 데리고 품팔이를 하며 고생스럽게 아들을 키웠다. 아들이 열다섯이 되던 해 새벽에 눈을 뜬 아들은 잠자리에 어머니가 없는 것을 보고 찾다가 부엌에서 어머니가 치마를 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곡절이 있다고 생각하여 밤중에 집을 나서는 어머니 뒤를 밟았다. 어머니는 서당의 홀아비훈장을 만나러 갔다가 오던 길에 새벽이슬에 젖은 치마를 말렸던 것이다. 아들은 그 뒤 산길의 풀을 말끔히 베어낼 뿐 아니라 어머니와 훈장이 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감동한 사람들이 이 마을을 효자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와서 창업을 신령에게 아뢰었다는 삼인산, 효자의 아홉 가지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아홉바위전설’, 호랑이가 나타나면 과거에 급제했다는 벼슬재, 영조의 어머니가 기도하여 영조를 낳았다는 ‘용흥사설화’ 등이 전한다.
담양 지방은 예로부터 벼농사를 많이 지었으므로 민요 또한 벼농사와 관련된 노동요가 많이 전해 온다. <모판만드는 소리> <모찌기소리> <상사소리> <김맬 때 부르는 소리> <풍장소리> 등이 그것이다.
<모판만드는 소리>는 볍씨를 뿌릴 모판 혹은 이종을 할 모판을 만들면서 부르는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3분박 4박자 두 장단에 불리며, 받는 소리는 3분박 6박자에 “오위에라 오위”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간간이 소리를 길게 받기 때문에 장단은 일정하지 않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모찌기소리>는 모판에 뿌린 볍씨가 이종할 만큼 자라면 모판에서 뽑아 한 단씩 묶으면서 부르는 것이다. 선소리꾼이 3분박 4박자 두 장단에 메기는 소리를 내면 일꾼들이 3분박 6박자 한 장단에 “오위 오호 먼들” 하며 일정하게 받는다.
<상사소리>는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중모리에 맞추어 느리게 <긴상사소리>를 부르다가, 뒤에는 모를 빨리 심으면서 중중모리에 맞추어 <잦은상사소리>를 부른다. 김은 모두 세 번을 매는데 초벌을 맬 때는 <오호소리> <지화자소리>, 두벌 맬 때는 <떨아지소리>, 세벌 맬 때는 <나해소리> <사뒤여소리>를 한다.
논매기가 끝나거나 혹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고 나서는 장원질을 하며 <풍장소리>를 한다. <김매기소리>는 그 구성음이 경토리와 비슷한 점을 보이나, 선율의 특징에서는 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를 보여준다. 주로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이 지방의 민요는 벼농사와 관련된 노동요들이 종류별로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대나무 생산지가 1,802㏊로 전국 제일이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죽세공업이 예로부터 유명하다. 대바구니류를 비롯한 대발·부채·대쟁반과 소형 장식용 공예품 등 수십 종류의 죽제품이 생산되어 전국적인 판매는 물론 해외로 수출되어 호평받고 있다. 주로 농가의 부업과 수공업으로 이루어진 죽세공업은 담양읍을 비롯해 월산면·수북면·금성면·봉산면·무정면 등 5개 면이 주요 생산지역이다.
그러나 농촌지역의 인구 감소와 죽제품의 수요 감소 때문에 죽세공업은 차츰 위축되는 추세에 있다. 게다가 죽물시장에 등장하는 죽제품도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죽제품들로 대치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2003년 대나무자원연구소를 신설하여 대나무를 활용한 신상품 개발, 신소재 개발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공업으로는 고서면 동운리에 편직물공장과 피혁공장 등이 있다.
군내에는 상설시장 1개와 5일 정기시장이 세 곳에 있다. 1720년대에는 금성면 산성의 북문외시(北門外市), 용면 두장리의 서문외시(西門外市), 금성면 금성리의 남문외시(南門外市), 봉산면 삼지리의 삼지천시(三支川市), 고서면 고읍리의 창평읍내시(昌平邑內市), 창평면 삼지내의 삼지천시 등이 있었다.
시장의 개시일은 담양장이 2·7일, 창평장은 5·10일, 한재장은 3·8일이다. 시장의 규모는 예로부터 담양장이 가장 컸으나 근래에는 광주광역시와 지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한 남면·봉산면·고서면 일부가 광주시장권에 편입되어감에 따라 축소되고 있다.
그러나 담양장에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대나무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도 구매자들이 많이 찾아와 죽제품과 대나무를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죽물시장이 2·7일에 개시된다.
광주호는 고서면·남면과 광주광역시 북구에 걸쳐 있는 호수로 광주댐에 의해 조성되었다. 영산강유역종합개발계획 제1차 사업으로 완공된 상류 4개 댐 중 규모가 가장 작은 광주댐은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과 규봉 쪽의 장불천(長佛川)을 합쳐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1974년 3월에 착공, 197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이 댐의 완공으로 고서면·창평면·무정면·봉산면 일대와 광주광역시의 우치동·본촌동·장운동 일대가 농업용수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 호수의 주변은 정철이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며, 식영정과 조선 중기의 정원인 남면의 소쇄원 등 문화재가 있어 좋은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2002년 산림청이 ‘가장 아름다운 거리숲’으로 지정한 8.5㎞에 이르는 메타세퀘이아길이 유명하고, 인근의 한국대나무박물관·가사문학관 등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고려 초에 연원하는 죽취일(竹醉日)을 이어받은 대나무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광덕산] 전라북도 순창군의 팔덕면 청계리에 위치하고 담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564m). 1981년 전국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고시 지명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강천산으로 주로 부른다. 한때 용천산으로도 불렀다. 이는 산세가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광덕산은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유래가 오래된 지명임을 보여준다. <대동지지>에는 "강천산(剛泉山)의 다른 이름을 갖는다"고 묘사되어, 하나의 산이면서 둘의 이름을 붙인 모습이다. <청구도>에는 '광성산(廣城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산록에 강천사(剛泉寺)가 세워졌는데, 예전에는 복천사(福泉寺)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다소 기복(祈福)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산성산] 전라남도 담양군의 금성면 금성리 · 용면 산성리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603m). 호남정맥 용추봉에서 남쪽으로 향한 산성산 능선이 광덕산을 거쳐 오르면서 평탄면을 이루는 산지이다. 능선을 따라 포곡식으로 금성산성이 축성되어 있고, 서쪽은 담양호가 보인다. <고려사절요>에 "1380년(고려 우왕 6)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산성은 시루봉을 정점으로 남문-노적봉-철마봉-서문, 동문-운대봉(최고봉)-연대봉-북문-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다. 1610년 개축되고, 1622년 내성에 대장청(大將廳)을 건립케 했다. 1653년 내성을 수축하였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격전장이 되었다.
[금성산성]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도림리와 금성면 금성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사적 제353호. 확실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산성산으로도 불리는 금성산 줄기의 해발 350∼600m 능선에 쌓은 산성이다. 길이가 3km에 가까운 큰 규모로,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 전라북도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처산성(三處山城)으로 불렸다. 1380년(우왕 6) 9월 왜구가 남원성을 공격하고 운봉현을 약탈한 뒤, “광주의 금성(金城)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고서 북상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금성’은 금성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축조에 대해서는 1410년(태종 10), 1597년(선조 30), 1610년(광해 2), 1653년(효종 4)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804척이며, 성 안에 9곳의 샘과 제사처인 신사(神祠)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혹은 신라말 고려초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237년(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이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이들은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
[강천산] 583.7m. 원래는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 불렸다. 호남정맥에 속하며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이다. 광덕산(廣德山, 565m)·산성산(山城山, 603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괴석과 절벽이 어우러져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천산은 1981년 1월 7일 한국 최초의 군립공원(순창군)으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높지는 않지만 병풍바위·용바위·비룡폭포·금강문 등 이름난 곳이 많다. 또 광덕산·산성산에 이르기까지 선녀계곡·원등골·분통골·지적골·황우제골 등 이름난 계곡만도 10여 개나 된다. 정상 근처에는 길이 50m에 이르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다.
가장 좋은 볼거리는 11월 초순에 절정을 이루는 단풍과 4월 초순에 만개하는 산벚꽃이 유명한데, 산 입구의 강천호 주변뿐 아니라 등산로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산 암봉 아래에는 887년(신라 진성여왕 1)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운 강천사가 있다. 이 곳의 석탑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되었고, 절 입구의 모과나무는 전라북도기념물 97호이다.
그밖에 순창 삼인대(三印臺, 전북유형문화재 27), 금성산성(金城山城, 전북기념물 52)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내장산(內藏山, 763m)·백양사(白羊寺)·담양댐 등과도 가깝다.(자료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두대간의 역사 등)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를 열며> 얘기합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분수령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에서 1정간 13정맥이 갈래치고 또 기맥, 지맥으로 뻗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에서 모든 강들이 시원하고 그 강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일구어졌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그 산줄기와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대어 사는 이 땅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낙동정맥, 호남정맥, 땅끝기맥 등 정맥과 지맥, 기맥을 모두 아우른 백두대간입니다.
지난 3년에 이어 앞으로의 백두대간학교는 이 땅 곳곳으로 갈래친 백두대간을 찾아갑니다. 앞으로 백두대간학교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하나, 백두대간학교의 원래 취지대로 백두대간 걸작 구간 산행을 계속합니다.
둘, 백두대간에서 갈래친 정맥, 기맥의 걸작 구간도 찾아갑니다.
셋, 월별,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넷, 산행과 문화유적 탐방을 아울러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도록 합니다.
다섯, 참가자들이 희망하시는 산줄기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합니다(전체 일정은 유지하지 만, 꼭 고수하지는 않습니다).
여섯, 산행 후 계절별, 지역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곱, 멤버십 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 이외에 비정기 산행(번개산행, 종주산행, 번개모임 등)도 추진합니다.
여덟,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중심이 되는 산행을 이어갑니다.
아홉, 백두대간학교가 지향하는 산행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땅 여러 갈래로 백두대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그 아름다운 산줄기를 늘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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