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퇴계와 남명, 가야산 자락서 하나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퇴계와 남명, 가야산 자락서 하나되다

4월 고을학교는 성주고을

봄으로 가득 찬 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8강으로, 가야산 자락에 기대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성주(星州)고을을 찾아갑니다. 이곳은 특히 '양강(兩岡)'의 고장이라 부르는데 ‘양강’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일컫습니다. 이들은 각각 경상좌도 영남학파의 종장(宗長)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경상우도 사림파의 거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로서, 퇴계의 인(仁) 사상과 남명의 의(義) 사상을 계승하면서 성주 대가면(大家面)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가야산 백운동. 백운동은 가야산 남동쪽, 성주군에 속한 곳으로 너럭바위가 계곡과 산 사면에 펼쳐져 있어 전망이 시원하다.Ⓒ고을학교

고을학교 제18강은 4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남성주IC→가야산 백운동→심원사/법수사터→사창서당→회연서원→청천서당→심산 김창숙생가→점심식사 겸 뒤풀이→읍치구역(경산리 성밖숲/성산관/연계당/성주향교)→한개마을→세종대 왕자태실→남김천IC→서울 순입니다.

▲성주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8강 답사지인 성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가야산이 우뚝, 풍요로웠던 성주고을

성주의 지형은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대덕산(大德山)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수도산(修道山)과 단지봉(丹芝峰)을 거쳐 가야산(伽倻山)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修道支脈)이 가로막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비교적 낮은 구릉이 이어지면서 낙동강으로 숨어들고 있어 대체로 북서쪽이 높은 산악지대이고 남동쪽이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남쪽으로는 합천과 맞닿아 있고 동남쪽으로는 낙동강변의 고령과 이웃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금오산(金烏山)을 사이에 두고 선산, 김천과 이웃하고 있는데 이들 모든 고을이 낙동강의 서쪽, 즉 임금의 자리에서 바라보아 오른쪽에 있어 경상우도(慶尙右道) 고을이라 합니다.

가야산은 성주의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경남 합천군, 거창군과 경북 성주군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주봉인 칠불봉(1,433m)과 우두봉, 남산, 단지봉, 남산 제1봉, 매화산 등 1,000m 안팎의 연봉과 능선이 이어져 있으며 특히 성주 쪽 백운동 일대에는 합천 쪽의 해인사(海印寺)만큼 유명한 절은 없지만 법수사(法水寺), 심원사(深源寺) 두 곳의 폐사지가 있습니다.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동남쪽에는 포곡식(包谷式)으로 쌓은 가야산 산성이 남아 있는데 축성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가야(大伽倻)의 이궁(離宮)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승장(僧將) 신열(信悅)을 시켜 개축하였고, 숙종 때 근처에 독용산성(禿用山城)이 수축되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자 퇴락하고 말았습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7.2㎞로 대부분 무너졌으며 성 안에는 동서남북의 성문과 암문(暗門), 치성(雉城), 망루(望樓), 장대(將臺), 그리고 7개의 샘과 1개의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용기사지(龍起寺址), 백운암지(白雲庵地), 일요암지(日曜庵地) 등의 건물지가 남아 있습니다.

독용산(禿用山 955m)은 백두대간에 있는 대덕산에서 동남으로 갈라진 지맥이 수도산과 단지봉을 거쳐 가야산으로 이어지기 전에 북쪽으로 가지를 쳐 석항령 넘어 형제봉을 지나 성주 땅 서쪽에 우뚝 솟은 명산으로, 성주의 중요한 두 물줄기인 대가천(大伽川)과 화죽천을 가름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두 물줄기는 가천면의 산간평야를 적셔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독용산성은 성의 둘레 7.7㎞, 높이 2.5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으로 성주, 고령, 합천, 거창 등 네 고을의 병기고(兵器庫)로 사용되었으며 동문, 남문 및 석상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산성 안은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 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여 년 전의 가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의 피난 중 발견되어 숙종 원년(1675) 관찰사 정중휘(鄭重徽)가 주청하여 개축하였습니다.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성벽의 축조방법은 협축법(夾築法)과 편축법(片築法)이 고루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성문과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고 돌무더기와 옛터로 짐작되는 건물지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개축할 당시 둘레가 4,581보(步)이고, 여장(女墻)이 2,405첩(堞)에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 등이 있었고 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객사(客舍), 동서 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군사적인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들이 허물어져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격조높은 선비문화 간직한 한개마을 Ⓒ성주군

영암산(鈴岩山 782m)은 성주, 김천, 칠곡의 3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북쪽으로 선산고을의 금오산(金烏山)과 이어져 있는 신령스런 바위산이라 불렸던 명산입니다. 방울이라는 뜻의 ‘령(鈴)’자로 되어 있는 것은 방울이나 종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보다는 영암산을 성주 쪽에서 바라보면 방울 모양으로 보여 ‘방울바위산’이라 칭하였다고 하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합니다.

선석산(禪石山 742.4m)은 바위가 없고 산등성이가 넓고 평평한 흙산으로 달리 서진산(棲鎭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산에 기대고 있는 선석사(禪石寺)는 신라 효소왕 1년(692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금보다 서쪽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고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그때 절 이름을 선석사라 고쳐 불렀다 합니다. 이곳은 특히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가까이 있어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았고 이 어필을 보관했던 어필각은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正法寮)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에 자리한 세종대 왕자태실(胎室)은 조선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단종(端宗)의 태를 안장한, 전국에서 가장 큰 태실지입니다. 이곳에는 원래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묘와 묘각이 있었으나 조선 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 지관을 통해 길지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하여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 20∼24년(1438∼1442) 왕자들의 태를 안장하였는데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로 조선시대 태실의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영취산(靈鷲山 331.7m)은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나 울창한 수림이 길 양쪽으로 뻗어있는 등 주변 경관이 수려해 어느 명산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영취산 아래 성산 이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70여 채의 전통 고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개마을’과 영취산 거의 정상 지점에 천년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감응사(感應寺)도 품고 있는 산으로 이름났습니다. 감응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 체징(體澄)이 창건한 사찰로 애장왕의 아들 눈을 고쳐준 약수에 대한 전설로 유명합니다.

성주는 철기시대에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에 속했으며 신라에 정복됐을 때는 일리군(一利郡)으로 불렸지만,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지방의 군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이전의 성산가야라는 지명을 이용하여 성산군(星山郡)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영남의 유명고을로 이름 날려

고려시대에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고,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의 지방제도의 개혁에 따라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면서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고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인재도 많이 배출하여 영남의 유명고을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임진왜란 중에는 잠시 경상도 감영(監營)을 성주목 팔거(현재 칠곡)에 두기도 하였습니다.

성산관(星山館)은 조선시대 성주목 관아(官衙) 건물의 하나로서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선조 41년(1608)에 목사 송영구(宋英耈)가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동북쪽에 사시헌(四時軒, 목사의 관사)과 함께 건립하였고 효종 8년(1657)에 목사 최계훈(崔繼勳)이 지금의 군청 자리로 이건한 후 여러 차례 개수(改修)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이 훼철되고 성산관만 남았으며 대청 안쪽에 절제아문(節制衙門), 사시헌(四時軒)을 현판하였습니다.

성산관의 정면은 주춧돌을 높게 하여 기둥 모양으로 나열시켰고 마루바닥은 지면에서 높이 올라와 있습니다. 흔히 고상식(高床式)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구조로서 마루를 주로 이용하는 남방건축에서 지면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짓는 방법인데 상주의 양진당(養眞堂)에도 같은 구조가 남아 있습니다.

성주향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배향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반적인 배치와는 달리 대성전이 오른쪽에 명륜당이 왼쪽에 있는 우묘좌학(右廟左學)의 보기 드문 배치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향교에는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 입덕문(入德門), 수복사(守僕舍), 고사(庫舍) 등이 남아 있으며 동재(東齋), 서재(西齋), 만화루(萬化樓) 등 일부 건물은 소실되었습니다.

월회당(月會堂)은 조선 중종 11년(1516)에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1481~1553)이 제자들에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론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한 강회소(講會所)로 창건한 건물인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여희림이 여씨향약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알렸습니다. 이에 이듬해인 중종 12년(1517)에 전국에 여씨향약을 시행하라는 왕명이 내려져서 전국적으로 향약이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여씨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사는 여씨(呂氏)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네 형제가 문중과 향리(鄕里)를 위해 자치행동규범으로 만든 것인데, 남전현에서 시작되었다고 '남전향약(藍田鄕約)'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의 조약(條約)으로 되어 있으며 그 뒤 주자(朱子)가 수정해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습니다.

연계당(蓮桂堂)은 조선시대 소과(小科)에 급제한 생원 및 진사들이 모여 선현을 숭모하고 서로 면학을 격려하는 장소인 사마소(司馬所)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조 21년(1588)에 성주성(星州城) 서문 밖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철종 11년(186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이름을 연계당이라 하였습니다.

연계당에 보관되어 있는 <연계소영건일록(蓮桂所營建日錄)>은 1860년에 실시한 이건공사를 날짜별로 기록하고 특히 건축 자재의 매입 및 가격, 목수, 토공(土工) 등의 수와 급료 등의 내용이 있어 당시 건축공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보기 드문 배치법을 보여주는 성주향교 Ⓒ성주군

걸출한 인물 '양강(兩岡)'의 고장

성주는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지만 특히 '양강(兩岡)' 이라고 하는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1540∼1603)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으뜸으로,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 벼슬과 학행이 비슷하여 근세조선 중엽 이후 성주의 대표 인물로 꼽힙니다. 이들의 고향은 큰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대가(大家)'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양강은 모두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제자로서 퇴계의 인(仁) 사상과 남명의 의(義) 사상을 계승하여 퇴계의 바다처럼 넓은 유화(儒化)와 남명의 산처럼 높은 기절(氣節)을 본받아 영남의 높은 학문의 정통을 세웠습니다.

특히 한강(寒岡)으로 말하면 당시 영남 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들이었으며 근기(近畿) 출신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따로 한강의 학문을 이어받아 훗날 근기학통(近畿學統)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한강을 연원으로 한 근기학통의 계보는 곧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로 이어졌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조선 선조 때 대유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5년(1627)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입니다. 지금의 위치는 선조 16년(1583)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며 숙종 16년(1690)에 현판,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고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0년대 복원하였습니다.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는데,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예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경내 건물로는 구(舊)사당, 강당, 동재, 서재, 신(新)사당, 전사청(典祀廳), 견도루(見道樓) 등이 있고,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인조 11년(1633) 창평산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묘소를 이장하면서 현종 9년(1668) 현재의 위치로 옮긴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그 밖에 유물전시관과 향현사(鄕賢祠), 관리사가 있습니다.

사창서당(社倉書堂)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49세이던 선조 24년(1591)에 서숙(書塾)을 지어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이후 퇴락되고 유허만 남아 있던 것을 정조 20년(1796)에 건립하였으며, 사창이라 한 것은 서당이 있는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조 21년(1797)에 세운 유허비는 전면에 '문목공한강정선생유허비(文穆公寒岡鄭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으며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의 기문(記文)에는 동쪽의 방을 숭경재(崇敬齋), 서쪽의 방을 낙의재(樂義齋)라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각각 낙영재(樂英齋), 경산헌(景山軒)이라 편액되어 있습니다.

청천서당(晴川書堂)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봉향하던 청천서원(晴川書院)이 영조 5년(1729) 창건되었으나 고종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金頀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한 것입니다.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 김호림의 아들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교육구국운동으로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종 3년(1723)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귀부(龜趺),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모두 완전한 형태이고, 비신(碑身)은 오석(烏石)으로, 비문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습니다.

김우옹은 어려서부터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출입하며 정통 성리학의 맥을 이어받았습니다. 명종 7년(1552)에 진사(進士)가 되고, 선조 즉위년(156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깨어있는 선비들이 주로 임용되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직제학, 대사간, 대사헌,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생가는 청천서당에서 우측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는데, 조상들이 세거(世居)해 온 전래의 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안채 건물은 광무 5년(1901)에 중건된 것으로 안채, 사랑채, 판각고(板刻庫)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김창숙은 김우옹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과 교육진흥에 일생을 바친 유림으로서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세종대 왕자태실. 왕자들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성주군

격조 높은 선비문화 간직한 한개마을

‘한개마을’은 6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격조 높은 선비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전형적인 집성촌 전통마을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풍산 하회마을’ ‘안강 양동마을’에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풍수지리적으로는 우수한 마을의 입지조건을 뽐냅니다. 주산인 영취산(靈鷲山)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청룡등(靑龍嶝)과 백호등(白虎嶝)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며, 마을 앞으로 이천(伊川)과 백천(白川)이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남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형국으로 최고의 길지(吉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개’는 순수 우리말로서 '한'은 ‘크고 넓다[大]’는 뜻이고 ‘개’는 ‘큰물이 드나드는 곳[浦]’을 나타낸 방언으로, 백천에 제방을 쌓기 이전에 큰물이 졌다가 빠져 나가면서 생겨난 큰 개울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세종(世宗)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하였고 17세기 이후 과거합격자가 많이 나왔으며, 충절과 지조, 높은 학문, 독립운동 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마을에 남아있는 집들은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전통가옥으로,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당한 곡선의 토석(土石)담장으로 된 옛 고샅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 대청, 부엌, 툇마루 등이 거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의 가재도구와 의복 및 생활용품 등 옛 생활의 흔적을 담은 유산들도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 전통민속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주 경산리 ‘성밖숲’은 성주읍의 서쪽을 흐르는 이천 변에 조성된 마을숲입니다. 현재 숲에는 나이가 약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55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조선시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임수(裨補林藪)인 동시에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조성된 수해방비림(水害防備林)이기도 합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선 중기 성 밖 마을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한 지관이 말하기를 “마을에 있는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발생하니, 재앙을 막기 위해 두 바위의 중간지점인 이곳에 밤나무숲을 조성하여야 한다”고 하여 숲을 조성했더니 우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과 교육진흥에 일생을 바친 심산 ⓒ 김창숙 생가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8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4월 20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