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세월호 참사 1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세월호의 비극이 발생한 뒤 정부를 비롯하여 정치권 그리고 모든 국민이 이제야말로 이 나라를 바꿔야 한다고, 바꾸지 않으면 이 나라가 모조리 침몰할 수밖에 없다고 통곡하고 절규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흘러간 지금, 분명한 어조로 이 땅에 변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커다란 충격 속에서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나라, 아니 더욱 왜곡되어간 나라, 실로 실망스러운 나라, 무서운 사회다.
세월호 참사 뒤 필자도 우리 사회가 다시는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겪지 않고 건강하게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프레시안에 그간 서른 세 차례에 걸쳐 기고문을 실어왔다(마침 ‘김영란법’이 기고에 대한 대가도 규정한 터라 밝히는 바이지만, 그간 필자의 프레시안 기고는 모두 철저히 ‘무보수’였다!). 하지만 결국 현실에서 거의 아무런 성과도 실현시켜내지 못했다. 필자가 너무나 무능하지 않았을까 혹시 문제 제기나 대안 제시의 방법에 부족함은 없었는지 먼저 되돌아본다.
물실호기(勿失好機), 새 봄이 진실과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어둡고 추웠던 긴 겨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진 겨울도 결국은 물러가는 법이다. 이제 새 봄이 왔다.
우선 이 새 봄에 엊그제 막 돛을 단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충실한 진상 조사를 실천함으로써 진실이 국민들에게 밝혀지기를 부디 기대한다.
며칠 전에는 천정배 전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탈당했다. 광주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를 끝내 잡아주지 못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사정이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탈당에 대한 찬반의 논의 차원이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치 발전을 위한 기폭제 혹은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물실호기(勿失好機), 모처럼 야권에게 도래한 호기를 놓치지 않고 더욱 발전하기를 빌어본다.
고통으로부터의 ‘달관’이 아니라 기회와 보람을 주는 사회이기를
젊은이들이 생기를 잃은 사회는 미래가 없다.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극복하지 않은 사회는 발전이 없다.
부디 새 봄에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고 보람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고통으로부터의 ‘달관’이나 ‘체념’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회와 보람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는 그러한 새 봄이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이미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비정규직을 비롯하여 파견과 용역 등의 간접고용 노동자분들의 고용 보장 등 고통이 근본적으로 완화될 수 있는 새 봄이기를 바란다. 필자와 수년 동안 함께 밥을 먹어온 국회 내 간접고용 종사자분들의 처우도 크게 개선되는 새 봄이었으면 한다.
한편 우리 사회에 만연된 노인층의 분노는 결국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의 미비함에 기인하고 있고, 나아가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불공정성과 불건강성에 그 요인이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새 봄에 부디 비등점을 넘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노인층의 분노가 누그러질 수 있는 조그만 싹이라도 자라났으면 한다. 진보진영과 야당도 노인층에 대하여 무조건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그 분노의 심연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여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데 보수와 경쟁해야 한다.
지역과 시민의 강화를 위하여
프레시안에 기고한 내 졸고를 읽고 내게 연락을 하신 분들이 몇 분 있었다. 그들은 결론은 시민들의 자각과 주체적인 운동의 실천이 절실하다는 의견을 주셨다. 시민 의식이 깨어나 시민들이 지역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이뤄내고 ‘세월호’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 사회를 진정으로 ‘정상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모름지기 먼저 지역에서 주민들이 실천하고 힘을 만들어 나가야 할 터이다.
한 가지 의미 있는 소식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한 곳에 모이는 곳, 유배지에서 돌아온 다산이 여생을 보낸 곳, 바로 양수리 그곳에 두머리 부엌이라는 동네 카페가 있다.
이 가게는 동네 지역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직접 지은 건강한 채소와 곡식 등 각종 먹거리로 음식을 만드는 ‘로컬 푸드 운동’의 살아있는 현장이자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 소통 공간이기도 하다. 필자도 마침 기회가 생겨 며칠 전에 그 카페에 가서 하우스맥주 한 잔 마시고 부근의 밭에서 바로 따온 딸기를 사왔다. 이 카페는 한 선배님이 긴급조치 형사보상금로 받은 1억여 원을 종자돈으로 하여 시작하였다고 한다.
덧붙여, 필자의 기고문이 한 동안 나오지 않았던 것은 그간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때문이다. 다른 오프라인 신문에 게재했던 필자의 기고문이 필자의 근무지에서 일종의 ‘필화 사건’으로 번졌던 일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근무지 직장 명칭과 직함을 사용하지 않은 언론 매체 기고는 ‘언론 통제 혹은 지침’의 범주를 피할 수 있게 된 ‘두터운 은혜(!)’에 힘입어 이 기고문은 무리 없이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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