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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희끗거리는 3월 들녘의 고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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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희끗거리는 3월 들녘의 고추밭

[살림이야기] 겨울을 깨우는 봄 농사

현재의 농사 모습에 선조들의 전통 농사 방법이 녹아 있다. 그 원형을 찾아 전통 농업과 생태 농법의 뿌리를 살펴보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귀농 초보자는 농사법과 생활 전반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흔히 3월 말에 시작하는 감자 농사가 제철 농부의 첫 농사일로 여겨지지만, 이렇게 된 게 오래되진 않았다. 예전에는 설 명절을 지내고 정월 대보름 행사가 갓 끝나고 난 뒤 서릿발조차 무서운 2월 말에 고추 농사를 시작했다. 겨울을 깨웠던 고추 농사를 알아본다.

방바닥을 구르고 물그릇으로 뛰어드는 씨앗

고추가 농사의 첫 자리를 감자에게 내준 것은 순전히 육묘장 덕이다. 이제 누구도 고추씨를 2월 말에 뿌리는 사람이 없다. 대신 4월 말이나 5월 중순에 육묘장에 가서 포기당 100원 남짓 주고 사다 심는다. 고추가 농사의 첫 자리를 감자에게 내준 것은 순전히 육묘장 덕이다. 고추 모종을 직접 키운다 해도 비닐하우스 속 포토에서 키우기 때문에 들에 나가서 감자 대신 고추농사부터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요즘 고추농사는 유기농이나 자연재배라고 내세운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된 제철 농사라 할 수는 없다. 움이 트고 새싹이 자라는 과정이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추씨를 물에 불렸다가 아랫목에 헝겊이나 부직포를 깔고 물을 뿌려 움을 틔우는 농부들이 꽤 있다. 자연재배를 하는 가족농이거나 '터박이씨앗(토종씨앗)' 보존운동을 하는 농부들이다. 손톱 반의반 토막도 안 되는 납작한 고추씨를 물에 불리려고 종류별로 봉투에서 꺼내다 보면 봄기운을 맡은 이놈이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방바닥을 데구루루 구르기도 하고 옆 물그릇으로 풍덩 뛰어들기도 한다.

적어도 1주는 걸려 움이 튼다. 늘 따뜻하고 축축하게 해 줘야 하는데 어쩌다가 습도 조절에 실패해 말라 버리면 낭패다. 그래서 고추 싹을 틔우려고 부화기를 사용하거나 스티로폼 속에 백열구를 넣어 30℃로 온도를 높이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사나흘이면 촉이 난다. 그다음에는 온상에 씨를 묻는데 씨를 묻을 때는 촉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전새날

직파농사의 대표 주자, 고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따끈따끈한 아랫목에는 고추씨 싹을 틔우기는커녕 주렁주렁한 자식들 누일 자리도 모자라는지라 밭에 직접 씨를 뿌릴 수밖에 없어서 2월 말에 고추농사를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왔다고 보면 350년을 이렇게 농사를 지은 셈이다. 당시에는 씨앗을 산다는 개념이 없었고, 어느 집에나 고추씨가 몇 됫박이나 있어서 아낌없이 줄줄 뿌렸다. 모자라면 옆집에서 얻어 온다. 씨앗은 요즘처럼 농약으로 소독한 알록달록한 씨앗이 아니고 옅은 노란색이었다.

대개 줄뿌림을 했는데 쟁기로 한 줄은 깊게 갈고 그 옆줄은 조금 얕게 갈아서 깊게 간 곳에 거름을 넣고 고추씨를 뿌린 다음에 흙으로 덮는다. 얕게 간 골은 사람 다니는 통로가 되고 고추 두둑으로 끌어올릴 흙을 제공하기도 했다. 고추를 심은 뒤에 서리도 오고 눈도 오는지라 발아율은 형편없었다. 어쩌다 날이 가물면 싹이 나지 않고 말라죽는다.

두 달여 뒤에는 많이 올라온 고추 싹을 뽑아 드문 곳으로 옮겨 주는데 잡초가 더 자라 있기도 하다. 고추 싹이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는데 한 달 반이나 두 달여 걸린 셈이다. 그러니 고추 싹이 올라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려야 했다. 싹이 안 나면 남아 있던 고추씨를 다시 뿌렸다. 6월 초·중순에 보리를 베어낸 자리에 고추 모종을 심기도 했지만 옮겨 심는 것은 보조 차원의 방식이고 직파 재배가 주를 이뤘다.

고추는 솎아내거나 곁순을 지르면 나물이 되고 풋고추는 채소이고 고춧가루는 양념이 된다. 요즘은 한때심기(가식)와 아주심기(정식) 등 두 번에 걸쳐 고추를 옮겨 심지만 옛날에는 씨를 뿌린 자리에서 키웠다. 농작물은 옮겨 심으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잔뿌리가 다 떨어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다. 살포시 내리는 비를 맞았거나 물뿌리개로 물을 흠뻑 뿌리고 나서 옮겨 심어도 마찬가지다. 옮겨심기를 통해 작물이 더 튼튼해진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풀 잡기와 밭 만들기에 옮겨심기가 좋은 건 사실이나 작물의 건강에는 손상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직파농사의 최대 장점은 뿌리가 튼튼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추운 바깥 날씨를 거스르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고추농사야말로 직파농사의 으뜸이다. 7월 넘어서면 풀을 매면서 고추 싹을 솎아내야 하는데, 이때 조금만 늦으면 고추가 풀 속에 잠겨 허약해진다. 옆에 난 작은 골의 흙을 다시 올리는 북주기를 통해 잡초도 잡고 고추 뿌리내림도 튼튼하게 한다.

고추밭 둘레 들깨 심기, 고추와 대파 함께 심기

이렇게 키운 고추는 키가 크지 않아 묶어줄 주지 않아도 쓰러지지도 않는다. 원래 성질도 그러하고 많이 줄 거름도 없어 질소 질이 부족하다 보니, 웃자람이 없어 그렇기도 하다. 고추가 많이 달리지도 않으니 병도 없다. 고추밭에 막대기 꽂고, 줄 치고, 비닐 씌우는 것은 1974~5년 전후에 생겼다. 개량종자가 나오고 비닐이 공급되면서 농사가 확 바뀌었다.

이때부터 화학비료와 농약이 농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학계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 농촌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개발 전략과 한반도 안보 전략에 따른 기획이라고 한다. 1960년대 말의 안보 취약 지구에 건설된 '전략촌'이 효시이다. 종적인 관의 주도성과 마을 단위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전새날

고추밭 둘레를 따라 들깨를 심는 것은 강한 들깨향이 고추 벌레를 쫓는다는 설 때문이다. 고추씨를 뿌릴 때 대파씨랑 같이 뿌리면 좋다는 사람이 있다. 색과 향과 함께 지상부의 장악력을 조화롭게 할 것 같긴 하다. 수수를 듬성듬성 같이 키우면 고추 가지가 의지하고 설 수 있어 묶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키가 훌쩍 큰 수수는 그늘도 만들지 않아 피해가 없다 하지만 땅의 영양분을 많이 빨아가는 수수를 같이 심는 게 좋을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고춧가루는 캡사이신 성분이 있어 매운맛이 나는데, 그것이 혈액순환과 소화액 분비를 촉진한다. 고춧가루에는 사과와 밀감보다 비타민 C도 많다.

옛날 어른들이 말하길, 고추에 액비(물거름)를 줄 때 절대 여자 오줌을 주지 않고 남자 오줌을 줬다고 한다. 남자 오줌을 고추밭에 뿌리면 고추가 튼실해지지만, 여자 오줌을 뿌리면 농사를 망친다고 해서 뒷간에도 여자오줌을 받는 독과 남자 오줌 받는 독을 따로 두고 엄격히 지켰다고 한다. 남자 뒷간은 탁 트여 있고 비 가림 지붕만 있지만, 여자 뒷간 주위에는 남의 눈을 가릴 이엉과 거적을 둘러친다. 여자 뒷간 위에는 양옆으로 발판용 나무 널빤지를 깔아서 두 발로 딛고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이를 '부출'이라고 부른다.

옛말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따질 게 아니다. 금제 사항을 두어 정성과 노력을 촉진하는 면이 크다. 남녀의 오줌을 따로 모아 여성이 쓰는 뒷간에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컸으리라 본다. 어느 지역에서는 파종할 때 사람은 물론 가축마저 암수를 따로 분리해 두고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씨앗을 심었고, 어느 지역에서는 파종 전날 남녀 합궁을 적극 장려했다고 전해지는 것이 다 이런 연유라 하겠다.

제철 농사를 꿈꾸는 사람들은 요즘 여기저기서 열리는 터박이씨앗 행사에 가서 대화초나 유월초, 수비초나 사근초 등을 구하면 될 것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살림이야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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