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지명되면서 퇴임을 앞두고 있는 류길재 현 통일부 장관이 통일부 장관은 아무나 해도 되는 자리인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일보>는 26일 류 장관이 사석에서 "역대 정부를 보더라도 통일부 위상이 높았던 때가 없었다"면서 "솔직히 통일부 장관은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 같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내에서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통일부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발언으로 풀이된다. 신문은 류 장관이 대북 전단 살포 문제와 관련해서도 "표현의 자유에 따라 막을 수 없다는 정부 방침이 세워진 이상 제가 거기에 뭐라고 더 말을 할 수 있겠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류 장관이 "(현 정부) 외교 안보 라인에서 민간인은 나 혼자"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취임 이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구성됐을 당시 류 장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이 전부 군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강경한 대북 정책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됐고, 상대적으로 북한과 대화 및 협력을 중시하는 자신의 입장이 설 자리가 없었다는 점을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한과 대화 및 협력, 대북정책 입안 및 집행을 주 업무로 하고 있는 통일부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는 청와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정책적인 측면은 통일준비위원회에 주도권을 뺏긴 모양새다.
지난해 2월 이산가족 상봉 직전 이뤄졌던 남북 고위급접촉에서 통일부는 회담을 실무적으로 '지원'하는 것 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 접촉 대표는 NSC 김규현 제1차장이었던데다가, 김 차장은 통일부가 아닌 외교부 1차관을 지낸 외교관 출신이다.
여기에 지난해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정책 제언을 담당하는 통일부의 역할마저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통준위 출범 당시 통준위가 통일 준비 및 과제와 관련한 연구, 사회적 공감대 확산 작업 등에 주력한다고 밝혔지만, 출범 이후에는 실질적인 남북 협력 사업들을 구상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해 12월 29일 정부는 통준위 명의로 북한에 상호 관심사에 대한 대화를 갖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10월 2차 남북고위급접촉이 무산된 이후 정부가 처음으로 제안한 남북 간 대화에 통일부가 아닌 통준위가 전면에 나서면서 대북정책에서 통일부의 역할을 찾기 힘들어진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통일부, 원래 힘 없는 조직이다?
위 사례에 비춰봤을 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통일·외교·안보 정책에서 본인과 통일부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식의 류 장관 발언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신문은 류 장관이 "그나마 통일부에 힘을 실어줬던 참여정부에서도 2차 남북정상회담은 국정원이 주도했고 통일부는 주로 대외적으로 나서는 것 위주로 맡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류 장관의 현실 인식과는 달리 통일부가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이를 진두지휘한 적도 있었다. 참여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세현 전 장관은 NSC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면서 전반적인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정동영, 이종석 등 당시 정부의 이른바 '실세' 인사들이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통일부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적도 있다.
류 장관은 홍용표 장관 후보자가 후임으로 내정된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기간 경색돼 있는 남북관계를 제대로 풀어보자는 뜻을 갖고 시작했지만, 그렇지 못해 아쉽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이날 <한국일보>에 보도된 류 장관의 발언을 보면 자신의 뜻을 풀어내지 못한 이유를 정부 내부의 구조적 문제에서만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참여정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구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장관 개인의 역량도 본인이 이끌고 있는 부처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 도외시한 채 통일부의 위상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만 늘어놓은 류 장관의 발언은 장관으로서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전직도 아닌, 현직에 있는 장관이 이런 입장을 밝혔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 이후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통일부가 실제 폐지되는 수순을 밟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누구도 통일부의 존속 가치를 변호해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어 부적절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편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류 장관의 발언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장관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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