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97년 이후 국무장관 다섯 명 중 세 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1997~2001년)와 콘돌리자 라이스(2005~2008년)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2009~2013년)이다. 주목할 점은 여성 국무장관 임명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 세 차례나 이어졌다는 점이다. 21세기를 '여성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적어도 미국 외교가의 경우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중국 외교가는 어떨까? 중국에서도 여성 외교의 시대가 도래할까?
올브라이트나 라이스 그리고 힐러리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중국에서도 푸잉(傅瑩)이라는 걸출한 여성 외교관이 2010년 중국 외교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물론 푸잉은 힐러리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정통 직업외교관이다. 외교부 통역요원으로부터 시작해 부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49년 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여성 외교부 부부장은 단 두명이었는데 문화혁명기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광으로 외교부에 들어와 불과 서른여섯에 여성 부부장을 단 왕하이롱(王海容)외에는 푸잉이 유일하다.
왕하이롱이 '낙하산' 부부장이었다면 한다면 푸잉은 제 길을 걸어 온 정통외교관이다. 그래서 푸잉의 이름 앞에는 '중국 최초'라는 단어가 자주 붙는다.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몽고족) 출신 대사, 중국 최초의 여성 주호주 대사, 중국 최초의 여성 주영국 대사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전국인대(全國人大) 최초 여성 대변인 등 그가 남성 우위의 중국사회에서 여성으로 개척한 새로운 길이 많았다.
푸잉은 신중국이 성립된 후인 1953년, 내몽고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중고등과정을 마쳤다. 문혁시기 내몽고의 한 시골농장에서 노동학생으로 있던 푸잉은 이후 외교관 양성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미국과 관계정상화가 진행되면서 영어전문가가 필요하게 됐고, 이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의 인재들을 모아 외국어 교육을 시켰는데, 푸잉도 이 때 선발돼 북경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들어갔다.
그는 영어와 함께 프랑스어, 루마니아어를 배웠는데, 푸잉의 첫 해외근무지가 루마니아였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후 푸잉은 외교부의 번역실 직원, 번역실 부처장, 아주국 부처장, 아주국 처장,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참사 등을 차례로 거치면서 차근차근 외교관료 경력을 쌓았고 주로 아시아지역 외교정책을 담당했다.
대사로서 그의 첫 근무지는 필리핀이었다. 본부로 복귀한 이후에는 아시아 지역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아주국 국장을 맡게 되었고, 후진타오(胡錦濤) 시기의 외교 '장문인'(掌門人, 우두머리)이라고 하는 다이빙궈(戴秉國)가 주도한 '6자회담'의 모든 실무를 책임졌다. 6자회담은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이 된 후 처음으로 다자외교를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하는 것이었기에 중국외교부 전체가 무척 공을 들였다.
당시 실무책임자로서 푸잉은 두 차례에 걸친 6자회담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 이런 점이 다이빙궈를 비롯한 중국 최고지도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외교부는 그동안 주요 국가에 여성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았던 관례를 깨고 외교적 비중이 큰 호주, 영국의 대사로 푸잉을 파견했다. 외교 현장에서 은퇴한 후 현재 전국인대 외사위원회 주임으로서 중국의 '의회외교'를 총괄하고 있다.
푸잉의 성공요인, 친화력과 매력으로 중국의 국익 실현
그가 외교관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친화력'과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수년간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해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등 중국 최고지도자의 통역으로서 얻은 신임이 그가 출세하는 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지닌 타고난 대외적 친화력과 인간적 매력이야말로 중국을 대표하는 여성 외교관 지위에 오르게 한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6자회담을 원만하게 준비해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이니셔티브를 유지할 수 있도록 5개국 외교관들과 정책조율을 했던 것, 그리고 영국대사 시절 친 티베트 여론이 팽배했던 영국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한 사람 씩 만나면서 중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해 친 베이징 여론으로 돌려놓았던 것 등은 여성 외교관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중국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공리(鞏悧), 장쯔이(章子怡)와 함께 푸잉을 꼽는다. 중국인들은 푸잉이 공리나 장쯔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중국 여성의 매력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마오쩌둥 집권 시기 중국 여성의 공적 영역 참여는 양적으로는 많았지만 질적으로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마오쩌둥 시기에 전국인대 대표의 여성비율이 22.6%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중국공산당이나 상급기관의 조직적인 배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예외가 있었다면 문혁시기 마오쩌둥 이후 권력을 탐했던 장칭(江靑)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시작됐다. 중국여성들의 참여비율은 비록 이전보다 낮지만 전 시기에 비해 더 능동적이며, 목적의식적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숫자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여성 외교관의 대사 파견 인원만 보더라도 1970년대에는 단 1명에 그쳤지만 1980년대 9명, 1990년대 24명, 2000년대 55명으로 점점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여성 외교관의 고위직 진출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수치가 남성 외교관의 단 3%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춰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여성 외교 시대의 대비
바야흐로 여성 외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외교가 국가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타협과 협상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매 순간 전쟁과 같은 긴장된 국제외교무대에서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나름의 전략과 형식 그리고 이를 실행해 옮길 수 있는 외교관의 자질은 외교 전쟁의 중요한 성패 요소라 할 수 있다.
최근 외교무대에서 여성 외교관들이 점점 더 각광받고 있는 이유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성이 외교에 상대적으로 더 친화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특유의 친화력, 감성적 소구력 그리고 변화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력은 외교관 자질에 필수 요소다.
미국의 여성 국무장관들은 '브로치 외교'(올브라이트), '피아노 외교'(라이스), '패션 외교'(클린턴) 등과 같은 디테일한 수단을 활용해 감성적이면서도 경직되지 않은 외교스타일을 창출했다. 물론 모든 국가가 미국과 같은 길을 갈 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다. 중국이 미국처럼 지금 당장 외교 수장 자리를 여성에게 맡길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다만 여성 외교가 갖는 장점과 그 효과는 중국 나름대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푸잉이라는 친화력과 매력을 지닌 여성 외교의 성공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외교부 역시 '여초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성 외교의 한국 모델은 부재한 상황이다. 여성 외교 시대에 대비한 모델의 발굴과 이를 기초한 능력 있는 여성 외교관 배양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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