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총재는 '출마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냐'는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기존의 입장과 변함없다"거나 분명한 부인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이날 기조연설에서 그는 "(출마와 관련해) 중대발표를 한다느니 해서 기대하고 오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중대발표는 없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법치주의 역행하면서 무슨 선진국이냐"
자신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운 정치권을 의식해 일정한 선을 긋고 나선 셈이지만 이 전 총재는 연설에서 도덕성 논란에 휘말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듯한 발언을 쏟아내 그의 출마설을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이 전 총재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경제강국이라는 말을 들어도 거짓과 허장성세가 판을 치고, 정직하게 원칙과 룰을 지키는 것이 바보가 되는 그런 사회는 후진국이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정신적 기반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면서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황우석 사건이나 신정아 파동 같은 부끄러운 일은 우리 자화상의 일부이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면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정권이나 국가 지도자가 정직하지 못하고, 법치주의에 역행하는 그런 일을 해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총재는 또한 "한반도 평화의 전제조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핵 폐기이고, 그 다음에는 북한의 폐쇄적 수령 독재체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인기가 많이 오르고 평화를 기대하는 여론이 높아서 그런지 정치권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명명백백한 사실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갈지자 행보를 이어 온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의 '대북관'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그는 "친북적 평화주의의 허상을 똑바로 봐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또 이 전 총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정체성과 이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지난 10년 간 좌파정권이 강요해 온 반(反)시장주의, 반자유주의, 극도의 평등주의의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됐다"고도 했다.
그는 "내가 그야말로 수구꼴통이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다"면서 "미래의 국가 디자인을 제대로 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려면 이번에 정권교체를 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이 전 총재의 200여 명의 지지자들은 이 전 총재의 기조연설 중간중간 열정적인 박수를 보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대통령 이회창"이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움직이는 지지자들…'대선후보 추대대회'도
사실 이 전 총재가 어떤 형식으로든 이번 대선에 개입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올해부터 이명박 후보를 직·간접적으로 겨냥한 비판을 쏟아냈던 것도 "이회창이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지난 주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경선캠프에서 상임고문을 맡았던 서청원 전 대표와 식사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서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이명박 후보 측이 박 전 대표 측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면서 "국민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 경선 이후 당의 주도권을 이명박 후보 측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구주류·전통보수 세력이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과 맞물려 묘한 여운을 남긴 대목이다.
외곽 지지자들의 움직임도 분주해 졌다. 지난 해 8월 결성된 '충청의 미래' 모임은 이 전 총재를 17대 대선후보로 추대키로 결의하고, 오는 23일 이 전 총재 사무실 앞에서 '이회창 전 총재 제17대 대선후보 출마 추대대회'를 열 계획이다.
이들은 이날 행사에 2500여 명의 회원들을 결집시켜 이 전 총재의 '결단'을 촉구한다는 방침이다.
이명박 "그래요? 경쟁자가 한 명 늘었네?"
한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이날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문화·예술인들과 가진 정책간담회 직후 '이회창 출마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그래요? 경쟁자가 한 명 늘었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거꾸로 "그런데 왜 갑자기 이회창 씨(에 대한 이야기)를 묻느냐"고 반문하며 이같이 말했다.
일단은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넘겨받은 셈이지만 곧 이 후보는 "그런데 나는 그렇게(이 전 총재가 출마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의 움직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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