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원시에서 공공미술관 명칭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 그 중심인 화성행궁 앞에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이 미술관은 수원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현대산업개발(대표이사 정몽규)이 건축해 수원시에 '기부채납'하는 미술관이다. 올해 6월 완공해 10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이 공공미술관의 명칭이 현재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으로 잠정 결론이 난 상태다. 이에 수원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문화와 공공성을 헤치는 명칭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네 차례에 걸쳐 관련 기고를 싣는다.
지난 1월 27일부터 수원 화성행궁 광장에서 예술가들이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구호는 명료하다.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명칭에 반대한다.' 지난 5일부터는 명칭 반대 온‧오프라인 2차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수원시가 지난해 12월 초에 진행한 1차 시민 서명 명부를 전달받고도 외면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협의 과정
쟁점은 단순하다. 미술과는 전혀 무관한 특정 아파트 브랜드가 공공미술관 명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에 나선 사람들('수원시민미술관을 고민하는 사람들' ‧ 약칭 '수미사')의 주장이다. 지역 시민단체와 미술인 등이 주축을 이룬 이들은 지난해 11월부터 반대운동에 나섰다. 반면, 수원시 측은 기업의 기부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아파트 브랜드 사용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의 미술관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중심 화성행궁 앞 광장에 지어지고 있다. 지난 2013년 12월 21일 기공식을 한 이 미술관은 올해 5월에 완공돼, 10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미술관 건립공사는 아이파크라는 아파트 브랜드로 잘 알려진 현대산업개발이 진행하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약 300억 원을 들여 원래 수원시 소유인 부지 위에 미술관을 지어 운영권을 수원시에 넘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원시와 현대산업개발은 지난 2012년 7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한다.
수원시는 미술관 건립 결정과정과 MOU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염태영 수원시장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미술관 건립이 현대산업개발의 기부로 성사되었다는 점만을 강조한다. 300억 원에 이르는 건립비용을 업체가 부담했으므로, 업체의 요구대로 아이파크라는 브랜드쯤은 미술관 명칭에 붙여도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다. 염 시장이 직접 밝힌 바 없으나, 시장 측근들은 염 시장이 현대산업개발을 설득하여 미술관 기부를 이끌어낸 공을 인정해야 하므로 명칭쯤은 아무려나 괜찮다고 주장한다.
기부인지, 이익 환원인지도 불분명
현대산업개발은 지난 2009년부터 수원시 권선구에 미니 신도시급인 7000세대 규모의 '아이파크 시티' 단지를 지어 분양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개발에 따른 반대급부로 현대산업개발이 공공시설을 지어 시에 기부채납하겠다고 약속했고, 화성행궁 앞 미술관은 그 약속의 실현이라는 주장도 거듭 제기되고 있다. <경인일보>는 지난해 11월 14일 이 점을 지적하며, 미술관 명칭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경인일보>, '기부채납한 문화시설…건설사 '홍보관' 전락')
'수미사'는 사실에 입각한 명칭반대 운동을 펼치기 위해 수원시에 명칭 결정 관련 정보 및 양해각서 공개와 시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정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양해각서는 현대산업개발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명칭과 관련해서는 애초에 현대산업개발이 '포니 정(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씨의 넷째 동생 고(故) 정세영 씨의 별칭. <편집자>) 갤러리'라는 창업자를 기리는 명칭을 요구해왔으나 시에서 불가하다고 하였고, 이에 '아이파크 미술관'이라고 수정 요청을 해 옴에 따라 이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시장 면담은 시장의 일정 상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수미사는 지난 1월 27일 관련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시와 현대산업개발에 토론자로 참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브랜드 홍보 욕망을 왜 시가 감싸나
현대산업개발이 자발적으로 기부했는지, 아니면 부득이하게 기부채납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야 할 쟁점이지만, '아이파크 미술관' 명칭의 정당성을 따지는 맥락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기부면 '아이파크'를 써도 되고, 기부채납이면 안 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이파크'가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미술과 직결되는 명칭인가가 더 중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아이파크'는 미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현대산업개발이 '아이파크'를 고집하는 이유는 기부의 대가로 아파트 브랜드 홍보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수미사는 행궁 앞 미술관에 현대산업개발의 기부(기부채납?)로 지어졌다는 머릿돌이나 표석을 세우는 것까지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산업개발이 진정 수원시를 위해, 수원시민을 위해 아름다운 기부를 할 목적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공식 명칭을 '아이파크 미술관'으로 확정하여 모든 공문서에, 각종 지도에, 네비게이션에 자기네 아파트 브랜드가 한 번이라도 더 노출되도록 하겠다는 건 공공미술관을 노골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욕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기업 정서'가 아니라 '공공성 지키기'
염 시장은 '아이파크 미술관' 반대는 '반기업 정서'라고 여러 차례 언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수미사 구성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기업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경계를 묻는 일은 친기업/반기업과 관계없다. 어떤 공간보다도 공공성이 강한 세계문화유산 앞 공간이고, 향후 철저하게 공공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공공미술관의 명칭을 기업 홍보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왜 반기업인가? 그런 논리라면 공정거래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것도 반기업 정서 선동이다. 염 시장이 기부를 끌어냈건, 기부채납 약속 이행을 강제했건, 이런 점을 놓쳤다는 게 오히려 아쉽다. 염 시장은 이제 와서 '반기업 정서' 운운할 게 아니라 현대산업개발과 협의 과정에서 기업의 주장이 '반공공적'임을 지적했어야 한다.
도시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공공시설의 건립과 운영을 위해 명명권(naming right)을 활용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 수미사 주최 토론회에서도 제기된 문제다. 하지만 명명권이 공공성과 충돌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어봐야 할 의미심장한 문제다. 자본의 논리가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하는 시대라지만, 공공성의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수원의 상징이자 자존심에 해당하는 화성행궁 앞 '명명권'을 이렇게 선뜻 내줘야 할 만큼 수원시가 절박한지, 수원의 문화적 수준이 낮아진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원시는 "왜 이제 와서 명칭 반대를 주장하느냐, 늦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마 염 시장과 시 관계자들은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이 아직도 '가칭'이라는 점을 잊은 모양이다. '가칭'을 '공식 명칭'으로 바꾸는 시점에서 문제제기는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닌가? 시가 시민들의 합리적인 지적에 이렇듯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 반대 운동은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
* '수원시민미술관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화성행궁 앞 공공미술관 명칭, 아파트 브랜드 사용반대' 온라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온라인 서명 운동 바로가기 : http://goo.gl/KpKX4d)
* 이 글은 수원 지역 신문인 <대안미디어 너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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