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 무르익는듯했던 남북 간 대화 분위기가 한 달 만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난해 말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에 이어 김정은 제1비서가 신년사에서 최고위급 회담을 언급하면서 부상했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사그러든 분위기이다. 이러다가 남북대화 자체가 열리지 않는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정부, 일단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지만…
"남북이 직접 만나 모든 현안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보자" 우리 정부가 제기하고 있는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얘기해보자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남북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사실, 북한이 제기하고 있는 대북전단 살포 저지나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등은 남북이 만나서 얘기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 한미훈련을 중단한다거나 대북전단 살포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정황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 측면에서 북한이 남한과의 협상을 위해 비핵화 결단을 내리리라고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상황에서 남북 간의 협상은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한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에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한계는 남북 간에 정상회담이 이뤄진다고 해서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단계에서 남북 간 협상은 "일단 만나서 얘기해보자"보다는 남북이 협의 가능한 주제로 범위를 좁혀 협상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한미훈련 중단'처럼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주제를 북한이 모두 펼쳐놓게 하고 소모적인 입씨름을 벌이는 것보다, 남북이 서로의 재량 하에 할 수 있는 사안들을 놓고 그 부분에 협상력을 집중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이 지금 단계에서 서로의 재량 하에 풀어갈 수 있는 사안들은 어떤 것인가? 북한이 쟁점화시키고 있는 현안 중에는 대표적으로 5.24 대북제재 조치의 해제가 있다. 5.24조치는 무조건적인 해제를 바라는 북한과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우리 정부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긴 하지만, 5.24조치 해제 자체는 남북 정부 모두가 고려할 수 있는 범주에 들어 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지난해 말 미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5.24조치의 해제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저촉되지 않는다"며 북한의 태도에 따라 해제할 수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5.24조치가 해제된다면, 이산가족 상봉과 쌀․비료 지원, 대북 인도적 지원과 남북 사회문화 교류 확대, 박근혜 정부가 제기해 온 보건의료, 농업 부문 등에서의 협력, DMZ 세계평화공원 등도 남북이 가능한 범주 안에서 진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논의의 주제를 보다 구체화하자
올해가 광복 70년, 분단 70년으로 우리 민족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 해이긴 하지만, 그런 역사적 의미를 담아 남북 간 모든 현안을 풀어보자고 하기에는 남북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이 너무 크다. 그리고, 남북이 허심탄회하게 모든 것을 논의하며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가자는 얘기는 '정치적 주판알'을 튕길 수밖에 없는 남북의 현실에서 대화의 판세를 형성하는 문제를 놓고 기 싸움의 과잉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지금 단계에서 남북이 할 일은 거창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5.24조치로 꽉 막혀있는 남북관계의 숨통을 트는 것이다. 북한과 천안함 사건에 대한 매듭을 짓고 5.24를 넘어서기만 해도 지금 단계에서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단 만나서 얘기해보자'라는 것보다는 남북이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할 필요가 있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포커스(http://www.e-nkfocus.co.kr)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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