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과 복지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할 헌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고, 인간 존엄성마저도 훼손당하곤 한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게 헌법이 명시한 '노동3권'이란 "해고는 물론 두 번 다시 조선소에서 일하지 못 한다"는 공포의 단어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하청노동자들에겐 '있어도 없는' 노동3권은 조선소를 곧 비정규직의 도살장으로 만들고 있다.
지난해 현대중공업 그룹 계열사에서 13명(현대중공업 9명, 현대미포조선 1명, 현대삼호중공업 3명)의 하청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산재 승인이 어려워 포기한 심혈관계 사망자 수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하청 노동자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하청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인 현대에겐 기업의 이윤만 중요할 뿐, 이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책임지지 않는 죽음의 행렬은 전국적으로 줄을 잇고 있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노동 3권을 무력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간접 고용이다.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가 저항조차 할 수 없도록 교묘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고용 형태로, 자본에겐 무한 이윤을, 노동자에겐 무한 노동을 강요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다.
때문에 사내하청 및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노동 3권이란 알고도 모른 척 해야만 하는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업체 폐업과 해고, 블랙리스트라는 형벌이 금기를 어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 형벌을 주는 '진짜 사장' 원청 기업에게 책임 있는 해결을 요구하면, 그들은 우리 직원이 아니라고 외면한다. 그래서 간접고용 노동자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이 시대의 사생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형벌을 감수하면서도,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대한 자본에 맞서 싸워왔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설립 11년 만인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교섭 역시 원청 자본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이어온 비정규직의 투쟁의 성과다. 하지만 12개 사내하청업체를 상대로 7개월 넘게 진행한 교섭에서 되돌아온 것은 "원청이 나서지 않는 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하청업체들의 진심어린 고백이었다.
200일 넘게 파업 중인 울산과학대노조, 울산대병원 민들레분회, SK브로드밴드 등 울산지역 장기투쟁 사업장의 거의 대부분이 간접 고용 사업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최저임금 수준의 낮은 임금과 회사의 구성원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인격적 모멸감이 이들을 극단의 투쟁으로 내몰고 있지만, 낮은 노조 조직률과 생계 등의 현실적 문제는 원청 자본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남아 있다.
철옹성 같은 원청 자본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인간 존엄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생명도 지킬 수 없다. 사업장별로 분산된 지금의 화력으로는 똘똘 뭉쳐있는 거대한 원청 자본의 벽을 넘을 수 없다. '진짜 사장'인 원청 자본이 책임지라는 공동의 요구를 내걸고, 전국의 모든 사내하청노동조합이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한 것은 그래서다. 사내하청 총파업은 노동3권조차 박탈된 사내하청,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분노의 표출이자, 사회적 관심을 모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철폐, 전국 총파업 성사를 위해 오는 31일 사내하청 노동자 투쟁 선포식이 열린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이중화' 전략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을 팔아 인사고과, 차등 임금, 상시 해고를 전면화하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으며 전체 노동자들에게 전쟁을 선언했다.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모든 노동자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무기력에 빠진 대공장 정규직 노조가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먼저 민주노총 총파업에 물꼬를 터야 한다.
1월 31일 오후 5시, 울산 현대중공업 일산문 앞에서 열릴 '사내하청 총파업 성사를 위한 투쟁 선포식'은 비정규직 종합대책 폐기, 원청 사용자성 쟁취, 더 나아가 간접고용 철폐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설움과 분노를 서로 확인하고 총파업을 결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 출발의 자리에,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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