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하여 말하기
미래에 관해 예측하는 것이 과학의 본 영역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이 무엇의 미래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기상청은 매일의 날씨를 예측한다. 또 해가 바뀔 때마다 주요 경제 연구소들은 새해의 경제 예측을 담은 서적들을 펴내고, 이 책들은 대형 서점의 주요 서가에 전시된다. 이들의 예측은 사회적 필요와 경제적 수요를 갖고 있다. 이 예측들은 틀릴 수도 있지만, 예측 자체가 시도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왜냐하면 특정 사건의 발생이나 부재를 예측하는 것은 절대적 필연성의 영역이 아니라 확률적 개연성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고, 예측이 빗나갔다면 그것이 애초의 예측이 기반하고 있는 인과 추론의 한계를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사건들의 다중적 인과관계를 구성하여 미래의 어떠한 가능성을 추론(extrapolation)하는 것은 탈주술화된 근대 과학의 본령이다.
그렇다면 날씨나 경제 성장률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18∼19세기의 스미스, 맬서스, 마르크스 같은 정치경제학자들부터 20세기의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토마 피케티에게 이는 분명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는) 정치의 영역일 수는 있어도 (가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일은 아니라고 보는 일군의 학자들도 존재한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나 오늘날 대부분의 주류 사회과학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창비, 2014년 11월 펴냄)는 이 두 입장의 접경지대 어디쯤에서 벌어지는 진지한 논의이다.
자본주의의 가깝고 먼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이 책은 영미권의 거시 비교역사사회학의 기성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5인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쓰였다. 5인이 공동으로 쓴 서론과 결론 사이에, 각 학자가 단독으로 쓴 다섯 개의 장이 본론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각 장이 동일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론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두 장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쓴 1장과 마이클 맨이 쓴 3장이다. 이들의 대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래를 다루는 심각한 주제를 갖고 진지하게 이루어진다. 도저히 대화가 통할 법하지 않았던 이 대가들이 같은 책에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이들의 오랜 독자로서 무척 반갑다.
2.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
첫째, 월러스틴에게 자본주의는 탄생, 성장, 사멸에 이르는 장기 지속의 수명을 갖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체계이다. 문명, 인류 혹은 지구와 같은 초장기 지속들(very long terms)에 비추어 본다면, 자본주의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학자들이 사용하는 자본주의의 개념이나 분석 단위에 따라서 다르지만, 근대 자본주의는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중에 출현하여 기틀을 다진 역사적 체계이다. 월러스틴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자본주의 세계경제란 시간적으로 유한한, 곧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역사적 체계임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는 초기에 표명했던 사회주의 세계 정부로의 이행이라는 전망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포기했다. 이 시기부터 월러스틴의 인식론적 기반에서 유사 트로츠키주의적(pseudo-Trotskist) 역사 유물론이 포기되고 프리고진의 복잡계 이론이 부각되는 한편, 반체제(antisystemic) 운동이 그의 저서 말미의 색인에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역사적 체계의 추세는 계속 상승하지 못하고 일종의 점근선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한계에 부딪치고, 이를 통해서 그 체계의 수명은 다하게 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이 글에서 월러스틴은 이전까지의 이 주장에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첨부한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본적 생산 비용을 인건비, 투입 비용, 세금으로 나누고, 이들이 하방 경직적 상승의 톱니 효과(ratchet effects)로 인하여 과거 500년 동안 인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둘째, 장기 지속적 추세(trend)가 역사적 체계의 수명을 관통한다면, 몇 개의 주기들이 겹치면서 구성되는 중기 지속의 콩종크튀르(conjoncture)는 그 체계의 시간적 마디를 구성한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개시되는 "장기 16세기"(1450∼1650년)의 콩종크튀르에 출현하였다. 이 중기 지속의 분석적 구성 요소는 콘드라티에프 주기와 헤게모니 주기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팽창하는 A국면과 수축하는 B국면으로 구성되며, 후자는 세계경제의 역사적 헤게모니가 성장·사멸을 거쳐 교체됨을 가리킨다. 이 두 주기가 겹침으로써 특정 콩종크튀르가 구성되는데, 이것이 그의 역사적 연구의 주요 시간 단위가 된다. 월러스틴은 콘드라티에프 주기의 실효성을 믿는 몇 안 되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인데, 이 책의 3장을 쓴 맨뿐만 아니라, 얼마 전 작고한 아리기 등은 콘드라티에프 주기의 발견적 가치를 명시적으로 부정한 바 있다.
월러스틴이 분석하고 있는 현재의 콩종크튀르는 미국 헤게모니가 공고화된 1945년 이후의 시간대인데, 그는 이를 1970년대를 분수령으로 두 개의 국면(phases)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이 책의 4장을 쓴 게오르기 덜루기안도 집필에 참여하였던 <이행의 시대>(1996)와 동일하다. 새로운 점은 월러스틴이 베벌리 실버가 개념화한 금융 조정(financial fix)을 콘드라티에프 B국면에 나타나는 증상으로 덧붙였다는 점이다. 금융 조정이란 산업 생산을 통한 축적에 한계를 느낀 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소위 '금융화(financialization)'란 20세기 말의 신자유주의에 특유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500여 년에 이르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에서 B국면마다 나타났던 현상이며, 브로델의 연구는 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월러스틴은 이전까지 B국면의 특징을 언급할 때 데이비드 하비가 시공간 조정(spatio-temporal fix)이라 부른 초국적 산업 재배치 과정을 주로 언급했을 뿐, 금융적 축적의 전면화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중기 지속의 측면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점은 미국 헤게모니 이후의 세계의 모습에 관한 것인데, 불확실성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동아시아 지역 경제 통합의 진행과 함께 이 지역 국가들에 의해 분점되는 헤게모니 블록의 출현 가능성을 미약하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아리기 최후의 통찰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월러스틴의 이 글은 그가 한편으로는 실증주의적 주류 사회과학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 불가지론과 실천적 허무주의를 조장해온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1990년대 후반 이후 고수해온 '유토피스틱스'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학문적·정치적 기획의 연장이다. 여전히 그는 역사적 체계의 구조적 위기에서는 국지적 행동이 큰 효과를 갖는다는 '나비 효과'를 강조하면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다보스 정신'과 이에 저항하는 '포르투 알레그레 정신' 간의 대립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점은 그가 이를 두 진영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네 그룹 간의 각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다보스' 진영은 반대자들에 대한 무력 진압에 의존하는 수구적 그룹과 "아무것도 바뀌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는 디 람뻬두사 전략"을 지지하는 개혁적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71쪽).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맹위를 떨친 네오콘이 (그리고 아마도 한국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전자에 속한다면, 능력주의, 녹색 자본주의, 반대자에 대한 관대한 대응 등을 논의하는 계몽된 우파들이 (그리고 아마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후자에 속할 것이다. '포르투 알레그레' 진영은 정당과 같은 수직적 조직을 통한 정치권력 획득과 경제 성장을 중요시하는 세력들과, 더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중요시하면서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그룹들로 분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운동의 역할에 대한 그의 기대는 이전 작업들에 비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7∼1998년의 동아시아 경제 위기,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그 직후 발생한 유럽연합(EU) 반주변부 국가들의 재정 위기 등은 그것이 단기적인 신자유주의이건 장기 지속적인 역사적 자본주의이건 기존의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대중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체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대중적 정치 운동의 힘은 20세기의 그 어느 때보다 미약한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냉전 질서의 종식이 확실시된 1989년을 1968년 세계 혁명의 연속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던 기존의 입장을 재고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89년이 반체제 운동의 연속으로 현상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우파의 승리를 공고히 하고 기세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신보수주의 우파는 기존의 구좌파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던 신좌파가 만들어 놓은 기회를 이용하여, 좌파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 지문화(geoculture)를 특징지은 중도 자유주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반격하여 성공을 거둔 것이다.
3. 이 시대의 막스 베버, 마이클 맨
3장을 쓴 맨은 월러스틴의 새로운 책이 출판될 때마다 <영국 사회학 저널>(British Journal of Sociology)에 서평을 실어 왔는데, 거시 비교역사사회학 분야의 거장으로서 월러스틴에게는 동시대 최대의 이론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2013년에 <사회적 권력의 원천들>(The Sources of Social Power)의 마지막 권을 출판하면서 4부작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한 맨은 미국의 사회학자 홀(John A. Hall)로부터 "우리 시대의 막스 베버"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장기 16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개를 다루고자 하는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계>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를 다룬 4권까지 출간되었는데, 현재로 올수록 각 권이 다루는 역사적 시기가 짧아지는 데에 비하여 후속 작업이 출판되기까지의 간격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이처럼 <근대 세계체계>가 일종의 '시간의 원근법'의 포로가 되어 그 완성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데에 비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탄생으로부터 2011년까지 인류 사회와 권력의 역사를 다룬 야심작인 <사회적 권력의 원천들>은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출판된 거시 역사사회학의 최고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맨의 작업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인 평가는 차후로 미루고, 이 책에 실린 맨의 글을 간략히 살펴보자.
맨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내재적 발전 논리를 갖는 체계로 취급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기능주의와 목적론으로 기각한다. 사실 이는 테다 스카치폴 이후 베버주의적 역사사회학자들이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분석을 비롯한 네오마르크스주의적 분석들을 비판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테마이다. 이들의 베버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사회를 유기체(organism)와 같은 체계(system) 혹은 구조(structure)로 파악하는 이론적 전통은 특정 시공간에 중요성을 띠는 특정 사회 현상을 그 연구 대상의 본질적 요소로 부당하게 특권화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전 지구적 분업의 출현과 같은 구조적 특징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어떤 구조적 특성보다는 특정 행위, 곧 이윤 극대화 행위와 관련이 있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에 대한 속류적 몰이해가 대변하듯, 자본주의의 탄생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가 결코 아니다. 베버의 연구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이해의 반정립(antithesis)이 아니라, 구조보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 지향적(action-oriented) 이론에 입각하여 있다.
맨에 따르면, 사회는 체계가 아니라 "다중적이고 중첩되는 상호 작용의 네트워크"이다(144쪽). 그는 이를 개념화하기 위해 베버의 이념형적 접근을 이용하여 'IEMP 모델'을 고안한다. 곧 사회는 이데올로기적·경제적·군사적·정치적 권력(Ideological, Economic, Military, and Political Power)이 체계적인 방식 없이 상호 작용하는 네트워크이다. 사실 여기에서 맨은 세계를 '신들의 전쟁터'로 이해한 니체의 영향을 받은 베버의 세계관을 변주하고 있다. 단, 그에게는 니체와 베버에게서 나타나는 염세주의적 경향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이해는 사회 체계의 추세, 주기, 모순, 위기, 이행에 대한 논의를 허위적인 것이라 파악하고, 우발성과 복잡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베버주의적 이해는 인류 역사와 자본주의,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세계체계 분석과는 이론적 상극을 이룬다. 예컨대, '30년 전쟁'을 통해 하나의 헤게모니가 다른 헤게모니로 이전된다는 월러스틴의 단순 논리는 맨에게는 역사적 복잡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목적론적 개념화에 지나지 않는다. 맨에 따르면, 미국 헤게모니는 독일을 상대로 한 30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확립된 것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적 허장성세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확립되어 소련이 미국과 대결하기보다는 사회주의권 내부의 결속에 치중하게 됨으로써 공고화된 일련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연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미국의 헤게모니는 시공간적으로 전일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곧 시기와 지역에 따라 때로는 관대한 후견국의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때에는 가혹한 제국주의적 침략자의 모습을 보이는 다면적인(polymorphous) 제국(empir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분별없는 제국>, <사회적 권력의 원천들> 3, 4권 참조).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이론과 다르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맨에게 양자는 동일하다. 이를 비판하기 위하여 맨은 다시 한 번 사회혁명들에 대한 베버주의적 역사사회학의 업적에 의지한다. 20세기 최대의 두 혁명, 곧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폭발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체제를 침식한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이 확실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이다(186쪽). 2050년경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퇴행(involution)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월러스틴과 달리, 그는 인구의 10∼15퍼센트가 불완전 고용과 실업에 시달리는 하층계급을 구성하는 저성장 자본주의의 모습을 예상한다. 자본주의의 체계적 모순에 주목하고 있는 월러스틴이나 2장을 쓴 랜달 콜린스와는 반대로, 맨에게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자본주의가 끝나게 되면 두 가지 사건이 여기에서 결정적일 텐데, 하나는 그 시기와 전개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발생 가능성이 잠복하고 있는 핵전쟁의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전 지구적으로 유효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기후 변화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쓴 알트파터와 유사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맨과 월러스틴이 거의 모든 면에서 이론적 맞수라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유사하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적 지배에 대한 단호한 비판자이다. 맨은 세계에 대한 제국적 지배를 지속하고자 했던 네오콘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도록 공고히 존재해온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모 관계에 대한 비타협적 비판자이다. 그는 미국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으며, 주요국의 통화들이 공존하는 다중 통화 체제가 오늘날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대체하면서 다극적인 정치 체제로 이행하리라는 점에서 월러스틴의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대화가 좀 더 확장되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4.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진지한 토론
지면상의 관계로 다른 필자들의 글은 아쉽지만 길게 다루지 못한다. 그래도 간략히 정리해보자. 콜린스는 2장에서 책 전체를 통틀어 논제가 가장 확실한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컴퓨터화 및 정보화가 "기계에 의한 노동의 기술적 대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경향을 확장·가속화해서 화이트칼라 중간계급의 몰락을 가져오리라 예측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자본주의는 이 구조적 경향을 다섯 가지의 탈출로, 곧 (1) 과학기술의 일자리 창출 효과, (2) 시장의 지리적 확산, (3) 금융화를 통한 메타 시장의 창출, (4)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에 의한 정부의 고용 및 투자 창출, (5) 교육 제도의 확장을 통한 묵시적 케인스주의를 통해 극복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컴퓨터화 및 정보화는 새로운 탈출로를 제공하기보다는 기존의 탈출로들을 체계적으로 봉쇄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을 통해서 시장의 지리적 확산의 종말이 결국 자본 축적에 한계를 부과할 것이라는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이는 이후에 부하린, 로스돌스키, 스위지 등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반박되는데, 그들의 논의를 단순화하면,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를 오해한 룩셈부르크가 이 글에서 첫 번째와 네 번째 탈출로로 제시된 위기 해결책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콜린스의 논의는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의의 21세기 버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맨은 3장에서 베버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4장에서 덜루기안은 1980년대에 이미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해 예측했던 월러스틴과 콜린스의 업적을 상기시킨다. 소비에트 연방의 충성스러운 시민이었던 덜루기안이 소련의 몰락을 예측했던 1980년의 콜린스나 1987년의 월러스틴과 조우하면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에 2015년 오늘날의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회상은 1, 2장을 읽으면서 월러스틴과 콜린스의 자본주의 종말의 예언을 미심쩍어 하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덜루기안이 이들의 예측을 월드컵 우승국을 기묘하게 맞추는 문어처럼 신비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들의 예언과 이후의 역사적 경로들을 비교한다. 그는 콜린스의 베버주의적 지정학 모델이 붕괴의 양상을 예언했지만,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초강대국의 딜레마에 대한 모스크바의 대응 속도와 방향을 예측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월러스틴이 연방 내부의 제도적 복잡성의 부담을 과소평가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특정 세계 지정학적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정치적 승리가 우여곡절 끝에서 제도화된 결과였다(257쪽). 월러스틴의 제자인 덜루기안은 이 점에서 철저하게 베버주의적인 모습을 띤다. 그는 맨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볼셰비키들이 이데올로기적·경제적·군사적·정치적 제도를 단일한 독재 구조로 융합한 것이 20세기 초반 유럽의 특정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가능하였던 정치적 승리가 제도적으로 공고화되어 70여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전개와 그 결과에 관한 연작서를 2011년에 덜루기안과 함께 편집한 크레이그 칼훈은 하버마스와 부르디외의 이론적 전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역사사회학의 제 분야에서 끊임없이 저작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다작의 사회학자인데, 이 책 중에서는 가장 산만한 글을 썼다. 단순화하기 힘든 현실 자본주의의 제 분야의 전개 양상을 일별하면서, 월러스틴과 맨의 긴장을 절충하고 양자 간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월러스틴과 맨의 자본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라는 연구 대상에 관한 양자 간의 공통적 관심을 부각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하나의 자족적 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자본주의가 지배적 체제의 자리를 내준다 하더라도 장기간의 변형을 통해서 생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내재적 위기 요소들뿐 아니라 기후 변화나 전쟁 같은 외부 문제들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맨의 입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 맺으며 : 21세기판 근대적 사회과학
이 저작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 속에서 미래를 투사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든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거대 담화'라는 부정적 낙인으로 격하될 수 없는 역사의 수레 자국을 생각하게 하는 힘이 존재한다. 필자들이 함께 썼다는 결론에서는 다시 한 번 맨과 월러스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필자들 각자가 내놓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전망이 논의되고 있다. 짧게는 21세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오작동과 불투명한 전망, 길게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후 100년 동안의 지정학에 대한 다섯 거장의 논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거대 담화의 향연을 제공한다.
이들의 차이를 마르크스와 베버의 차이로 간단히 소급할 수는 없다. 또한 베버가 마르크스에 대해서 후발 주자의 이점을 누리듯, 맨 또한 월러스틴에 대해서 후발 주자의 이점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국 사회학 저널>에 실린 한 글에서 맨은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계> 1권을 처음 접했을 때의 지적 희열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이후 그는 한때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월러스틴과 비판적 대화를 하는 속에서 오늘날의 대작을 생산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마르크스는 베버를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월러스틴과 맨은 동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이들의 대화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고대한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을 넘어 더 많은 사람이 이 대화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고민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임을, 무기력과 냉소는 그 고민의 해소가 아니라 이성의 퇴보임을 일깨워주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임 : 번역에 관하여대중적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거시 역사사회학 분야의 문제작이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온 창비 출판사의 안목과, 기울인 정성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마친 번역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번역은 다소 아쉽다. 간단한 실수부터 좀 심각한 문제까지 오역들이 꽤 많다. 사소한 오역들은 넘어가고, world-system을 '세계체제'로 번역해온 창비를 비롯한 한국 출판사의 관행을 이제 고쳐야 함을 간곡히 제언하고 싶다. system은 체계(體系)이지, 체제(regime)가 아니다. World-system은 대만과 중국에서는 世界體系로, 일본에서는 세계시스템(世界システム)으로 번역한다. 창비에서는 아마도 백낙청 선생의 "분단 체제" 개념과 맺은 연계성 때문에 이를 고집하고 있는 듯싶은데, 외래어 표기법마저 무시하는 창비의 고집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이 고집은 세계체계 분석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세계체제'는 잘못된 표현이고 '세계체계'가 옳은 표현이라는 말을 대학 학부 시절 강의실에서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는데, 정작 서평자 본인도 두 권의 번역서에서 '세계체제'라는 번역을 택한 바 있다. 그것이 이미 한국 사회의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사 과정에서 세계체계 분석을 전공하면서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대해서 이제는 확신을 갖고 있다. 체제(體制)는 일련의 제도적 구조를 뜻하는 regime의 번역어이지, 결코 부분의 작동들이 맞물려 이루는 전체라는 의미의 system의 번역어가 될 수 없다. 창비의 이러한 고집은 일반적으로 '복잡계'로 번역되는 complex system을 '복잡한 체제'(361쪽)로 오역하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한다. 또한 체제라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옆 괄호 안에 system을 병기해야 하는 비효율을 야기한다. 본인은 위의 서평을 독자로서 썼지만, 세계체계 분석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World-system은 '세계체계'로 번역해야 하고 여기에서 이론의 여지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창비 출판사의 진지한 고려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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